메뉴 건너뛰기

close

최근 개봉한 영화 <간신>은 한국사에서 아주 이례적인 연산군의 성적 타락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타락의 원인을 연산군의 성적 콤플렉스와 함께 임사홍·임숭재 부자의 간신 행위에서 찾고 있다.

영화 속 임사홍 부자는 '미녀 모집책'이라 할 수 있는 채홍사(採紅使) 역할을 마다 않는다. 연산군은 미녀 앞에서 사족을 못 쓰고, 임사홍 부자는 가문의 이익을 챙긴다. 영화에서는 임사홍 부자의 이런 간신배 행위가 연산군을 타락으로 내몰았다고 풀이하고 있다.

임사홍 부자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간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미녀 모집에 광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연산군의 명령을 받고 그런 일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정치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보통의 정치적 조건에서는 군주가 함부로 그런 일을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적 지위가 없는 갑부의 경우에는, 실정법만 위반하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성적 타락을 자행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군주나 정치인 혹은 관료와 비교할 때 갑부는 분명히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최고 공인 '임금'의 타락, 그 정치적 행간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영화 <간신>의 한 장면
ⓒ 수필름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임금은 일국의 최고 공인이다. 최고 공인인 임금의 일과는 사관(史官)들의 관찰 속에 일일이 기록으로 남겨졌다. 또 임금은 사적 영역에서는 왕실 어른들은 물론이고 내시나 궁녀들의 간섭을 받았고, 공적 영역에서는 신하들의 간섭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야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런 기질을 무절제하게 표출할 수는 없었다.

조선 왕조처럼 선비 출신 관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임금 앞에 나타나 도덕적 훈계를 하는 나라에서는, 임금의 개인적 욕구가 이래저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임금을 둘러싼 정치 시스템이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육체적 욕구를 마음대로 분출했다. 자신을 둘러싼 각종 제어 장치를 무력화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정치 시스템의 통제를 받아야 할 군주가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했다면, 정치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임사홍 같은 주변 인물들의 역할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정치 시스템이 마비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도가 하나 있다. 바로 1504년이다. 이 해는 연산군이 왕이 된 지 9년 후이자 그가 몰락하기 2년 전이다. 우리가 아는 연산군의 타락은 주로 1504년 이후에 발생했다. 그래서 1504년을 이해하면, 그의 타락이 가능했던 배경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임금이 등극했을 때인 15세기 후반에 조선 정계는 훈구파(勳舊派)의 세상이었다. 훈구파는 쿠데타나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 유공자들의 집단으로, 제14대 주상인 선조가 즉위한 1567년 이전의 지배층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쿠데타나 정변으로 성립된 정권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군주라도 쿠데타·정변 주역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성종은 이런 상황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성종이 띄운 승부수는 훈구파를 견제할 대항마를 중앙 정계에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 대항마는 지방의 개혁적 선비들이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림파(士林派)라고 부른다. 유림파라고 바꿔 불러도 되는 표현이다. 이 사림파를 중앙 정계에 포진함으로써 훈구파를 약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성종의 의도였다.

그런 의도는 상당한 성과에 도달했다. 성종의 시대에는 훈구파가 우세한 가운데서 훈구·사림 두 파벌이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훈구파가 집권당인 가운데서 야당인 사림파와의 세력 균형이 형성됐던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성종은 비교적 안정된 왕권을 향유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림파가 점차 강해졌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시대에는 사림파가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강력해졌다. 만약 왕실 재정이 튼튼했다면, 연산군은 자금력이 밑바탕이 된 정치력으로 사림파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 시대에는 재정 위기가 극에 달했다. 원인 중 하나는 결혼으로 인한 왕실의 재정 악화였다. 임금이 20명 이상의 공주·왕자를 낳는 게 보통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이들이 결혼할 때마다 토지를 똑같이 떼주다 보니 재정 곤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위기가 누적되던 끝에 등극한 연산군으로서는, 정치 운용에 필요한 자금력의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폭력적 방법으로 정치적 목표를 관철시킬 수밖에 없었다.

군주가 돈이 없고 사림파가 군주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연산군이 보여준 폭력적 대응이 1498년 무오사화다. '무오년에 벌어진 선비들의 재앙'이라는 뜻인 무오사화는 사림파에 대한 정치 탄압이었다. 이것은 사림파의 승승장구를 견제하기 위한 연산군의 정치적 대응이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파는 사실상 와해됐다. 이 후속 결과는 훈구파-사림파의 여야 균형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득을 얻은 것은 연산군의 친위 세력과 훈구파였다.

연산군 입장에서 볼 때, 사림파가 와해된 것은 자신의 친위 세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훈구파를 과도하게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쁜 일이었다. 사림파의 몰락으로 훈구파가 비대해지면, 아버지 성종이 사림파를 불러들인 일이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의 친위 세력이 사림파 잔존 세력은 물론이고 훈구파까지 겨냥해 벌인 정변이 1504년 갑자사화다. 이때 사림파 잔존 세력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사림파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갑자사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제3자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사림파보다는 훈구파에게 더 많은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훈구파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인 한명회(1487년 사망)의 시신이 이때 부관참시를 당한 사실도 이 점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연산군의 '슈퍼 파워' 쟁취, 역사는 비극으로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영화 <간신>의 한 장면.
ⓒ 수필름

관련사진보기


1498년에 사림파가 사실상 와해되고 1504년에 훈구파가 타격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연산군의 친위 세력이 강해지고 연산군의 왕권이 기형적으로 강해졌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청와대'를 견제할 만한 힘이 정계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부에서도 '청와대'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생길 수 없도록 연산군의 권력이 극도로 강해진 것이다. 1504년은 연산군이 '슈퍼 파워'를 갖게 된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연산군이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 영화 <간신>에 묘사된 '전국의 미녀 모집'이다. 1504년 이후로 연산군의 성적 문란이 극대화됐던 것이다. 본래 좀 그런 인물이긴 했지만, 1504년을 계기로 아예 대놓고 그런 짓을 하게 된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에 연산군은 공직자들에게 신언패(愼言牌)를 차도록 했다. 말조심하라는 취지의 신언패를 착용하도록 한 것은 다시 비유하자면 '청와대'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1504년을 계기로 군주권에 대한 견제 기능이 와해된 탓에 이런 일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갑자사화로 강력한 권력을 가지면서부터 연산군은 도성 사방 100리의 주택을 철거하고 그 지역을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어버렸다. 또 임금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구인 사간원도 폐지해버렸다. 또 임사홍 같은 채홍사를 각지에 파견해서 전국의 미녀들을 모집하고 그 중 일부를 궁궐로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왕궁을 윤락의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이처럼 연산군이 한국사에 길이길이 남을 희대의 타락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두 건의 사화를 계기로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마저 와해돼 '청와대'를 비판할 만한 정치 세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국의 최고 공인이 개인적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간신>에서 강조한 임사홍 같은 측근들의 역할은 실상은 문제의 본질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재야·학생 운동권과 야당이 극도의 탄압을 받아 대통령에 대한 견제 기능이 크게 약화된 유신체제 말기에 중앙정보부 상층부가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을 했던 것처럼, 군주에 대한 견제 기능이 약해진 것이 연산군의 성적 타락이 무분별하게 표출되도록 만든 핵심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504년을 계기로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연산군의 정치적 고립을 초래했다. 그래서 2년 뒤인 1506년에 연산군은 쿠데타 군대 앞에서 외롭게 몰락하고 말았다. 군주가 절대 권력을 얻고 반대파의 목소리를 잠재우면 일시적으로는 좋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상식을 연산군의 사례는 잘 보여주고 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간신, #연산군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