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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의회로 모든 사항을 결정하면서 학급 살림을 꾸린 지도 4개월이 됐다. 확실히 불만과 실패가 많이 줄었다. 지난 3월만 하더라도 꽉꽉 차 있던 건의함이 요즘에는 먼지만 쌓인다. 재잘재잘 "학급의회 언제하느냐"며 나에게 따져 묻던 교탁 앞도 이젠 한산하다.

그렇게 점점 아이들은 학급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일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소란스러워진 교탁 앞, 아우성인 아이들

이변없이 최악의 정책으로 뽑힌 '인성 체크리스트'
 이변없이 최악의 정책으로 뽑힌 '인성 체크리스트'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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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학급 정책들이 하나둘 안정기로 접어 들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내 교탁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울먹거리며) 선생님, 있잖아여. 인성부. 여자는 체크리스트에 안 적고 남자만 적어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니에요. 쌤. 분명히 얘가 욕 먼저 썼대요."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아니거드은! 쟤가 먼저 욕 썼거드은!"
"(눈물에 당황한 듯 나를 보며) 쌤, 진-짜 아니에요."
"(눈물을 훔치며) 그리고여. 있잖아여. 막 사소한 것도여. 적으니까여. 친구랑 뭘 할 수가 없어여."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는 그냥 정책대로 하는 거거든!"

대체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이 무엇인가. 인성부의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성부에는 직접 정한 학교생활과 관련한 몇 가지 약속들이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어기는 행동을 하면 체크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다. 각종 고자질이 이 인성 체크리스트로 향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하루에 두 번 이름이 올라간 친구는 반성문 한 장이 주어진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와 제보를 받았으니 인성 체크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는 인성부원 간의 갈등은, 이미 서로 굉장히 날이 선 상황이었다. 갑자기 갈등이 터진 일은 아니었다. 꾸준히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이 갈등은 결국 인성 체크리스트를 없애야 한다는 급진파와 유지하되 바꿔야 한다는 온건파, 그리고 인성 체크리스트는 꼭 유지되어야 한다는 보수파 세력으로 나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분명한 것은, 다수의 의견은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는 5월 말로 예정된 정기 의회를 기다려야 했다. 나도 일단은 갈등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조용했던 건의함이 가득 차 있었다.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인성 체크리스트와 관련된 건의임에 확실했다. 자신이 가진 달력에 5월 말 학급의회를 적어두는 친구도 보였다. 교실에는 알 수 없는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썼다가 지웠다가 반복하기를 여러 번 결국 인성부는 '보류'를 선택했다.
 썼다가 지웠다가 반복하기를 여러 번 결국 인성부는 '보류'를 선택했다.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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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정기 학급 의회 당일이 됐다. 개회되기 전, 정책에 관한 사전투표가 열렸다. '감사부'의 정책에 따라 학급 최고의 정책과 최악의 정책을 하나씩 투표하는 것이었다. 투표로 뽑힌 최고의 정책은 폐지나 수정이 불가능하고 반대로 최악의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정을 하거나 폐지를 해야만 한다. 이변은 없었다. 최악의 정책에는 '인성 체크리스트'가 선정되었다.

'보류' 처리된 인성부 체크리스트, 타협할 줄 아는 아이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다. 보수파로 대표되는 인성부는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을 유지하고 싶어도 반드시 개혁의 칼을 꺼내야만 한다. 인성부는 어떤 선택을 할까? 단칼이었다. 폐지. 자기들도 쉬는 시간 쪼개가며 인성 체크리스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욕까지 얻어 먹어가면서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인성부의 중론이었다.

"인성부, 체크리스트 어떻게 하기로 했어?"
"폐지할거예요."
"좋아. 그럼, 인성부가 우리 반의 바른 행동을 위해서 새로운 정책을 만들 거야?"
"근데 인성 체크리스트 말고 할 게 없어요."
"그럼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을 수정해보는 건 어때?"
"뭐든 다 싫어할 거 같은데요, 쟤네."
"그래도 수정을 해보거나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봐. 그게 인성부가 할 일이니까."

사실, 나도 딱히 대안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과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정책은 있을까? 결국 '인성 체크리스트'는 학급의회 시간 내에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보류' 상태로 정책이 공표되었다. 이젠 인성부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물음표로 던져질 시간이었다.

"인성부에서 발표하겠습니다.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은 보류입니다. 혹시 인성 체크리스트에 대한 의견 있으시면 지금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성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성 체크리스트 급진파들의 의견이 들끓었다.

"그냥 우리의 양심에 맡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성 체크리스트 없어도 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진짜 상대방이 기분 나쁜 경우에만 선생님께 데려갑니다."

하지만, 큰 지지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인성을 점검할 수 있는 정책의 필요성에는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진파들의 의견이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반대로, 온건파들의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체크리스트를 담당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친구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가 체크하고 여자는 여자가 체크해야 합니다."

인성 체크리스트의 급작스러운 폐지보다는 순기능 강화와 공정성 확보에 초점이 맞추어진 의견이었다.

소폭 개정된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
 소폭 개정된 '인성 체크리스트' 정책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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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간의 긴 의견 나눔 끝에, 결국 온건파의 의견이 지지를 받으며 선택되었다. 그렇게 인성 체크리스트는 '선생님께서 인성 체크리스트를 담당하되, 한 달간 한 번도 체크되지 않은 친구에게는 자유놀이 1시간을 제공한다'로 소폭 개정되었다. 내가 이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이들은 무엇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결국 인성 체크리스트가 바뀌었다. 마음대로 되진 않았지만 후련하다."
"난 의견을 양보하지 않는 친구들 때문에 좀 화가 났다."
"인성 체크리스트를 반대만 했었는데, 체크리스트 말고는 할 게 없다."
"괜히 불만 말하다가 선생님이 직접 체크리스트를 하게 되었다. 망했다."
"인성부가 그동안 고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미안했다."
- 아이들의 아침 한 줄 글쓰기와 모둠 일기장 중에서

이번 학급의회는 단순히 정책을 만들어내고 조정하는 시간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내가 편한 정책, 나를 위한 정책은 환영받지 못했다. 반대로, 우리 반을 위해서 내가 조금 양보하는 정책은 많은 친구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스물여섯 명의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양보하고 조정해가며 모두가 다 행복할 수는 없을 지라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는 정책을 만들어 보는 경험. 내가 처음 인성 체크리스트를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나중에, 또 다른 정책에서 같은 갈등 상황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다만, 그때는 서로의 의견에 더 귀 기울이고 서로를 위해 양보하려는 현명한 자세를 미리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가 아닌 '우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 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태그:#초등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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