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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왕’은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함규진은 그런 왕에게도 ‘투쟁’이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왕이 무엇을 투쟁한단 말인가? 과연 그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있단다. 저자는 <왕의 투쟁>에서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 등 4명의 왕을 중점적으로 살펴 투쟁으로 점철된, 그들의 고독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세종은 조선시대를 떠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으로 뽑힌다. 세종의 업적에 대해서 논하면 끝이 없겠지만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장영실을 중히 쓴 것이다. 장영실의 신분은 미천했다. 조선시대에 신분은 곧 법이자 하늘의 뜻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그를 중히 썼고 이것은 성과를 거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어떤가? 세종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하들 때문에 가출을 했다고 한다면 어떨까? 또한 단식투쟁을 했다면?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왕의 투쟁>은 세종의 고독함을, 특히 말년에 이르러 그가 신료집단과 벌어야 했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정적인 장면은 궁궐 내부에 내불당을 지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는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필요했던 터였다. 궁궐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태종 때 세워졌다가 개축하려고 공사가 멈춘 것을 세종이 다시 지으려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집단적으로 반대를 한다.

 

한창 때의 세종이라면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얻는 방법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종은 지쳤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모두 반대한다고 하자 “정승 1천 명이 반대한다 해도,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착한 임금이라면야 너희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나쁜 임금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집단적으로 반대하고 세종은 “내가 부덕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위협을 하더니 궁궐을 나와 임영대군의 집에 들어가 버리고 만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종이라는 군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집현전 학자들까지 반대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고독감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세종이 이러한데 연산군이라고 해서 좋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연산군의 나쁜 모습만 기억하는데, 즉위 초만 해도 연산군은 촉망받는 군주였다. 연산군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세조 때 주춤했지만 성종 때 힘을 키운 ‘언론권력’이 연산군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논쟁에 논쟁이 거듭되는데 그 정도가 심각했다.

 

세종 때 논란이 된 내불당 논쟁은 1개월 간 지속됐다. 그런데 연산군의 정치 초기에 1개월 이상 지속된 논쟁이 21회에 이른다. 1년이 넘은 논쟁은 3회에 달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1개월까지 이어지지 않은 논쟁까지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논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는 일이 생긴다. 그런 연산군은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정치에 정을 붙일 수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휘둘러 모두를 죽인다. 그러자 모두 잠잠해진다. 논쟁 같은 건 사라지고 모두 자신 앞에서 벌벌 떨기만 한다. 이때 연산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광해군이라고 해서 나을 것은 없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사표 쓰기 경쟁’이라고 벌이는 듯 계속해서 사표를 쓴다. 구체적으로 보면 왕위에 오른 지 5년이 지나는 사이 주요 정승이었던 이원익이 83회, 이덕형 70회, 이항복 64회, 심화수 50회 등을 쓴다.

 

사표를 쓰면 사극에서 봤듯이 왕은 그를 달래기 위해 애를 쓴다. 신하는 또 거절하고 왕은 다시 사자를 보내 달랜다. 혼란한 시기에 광해군은 엉뚱한 곳에 시간낭비를 해야 했던 셈이다. 젊은 군주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힘겹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탕평책으로 신하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25년간 이조판서만 150여명 교체한다. 이것이 이러한데 다른 직책은 어찌하겠는가. 투쟁의 가운데, 정조가 전제정치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지도 모른다.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신하들이 반대하는데 보인 반응이다. 정조는 대역죄인이지만 혈육이기도 한 은언군을 몰래 만난다. 그것을 안 신하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반대를 한다.

 

그러자 정조는 “나는 온돌에 평안히 앉아 있고 경들은 이 추운 겨울에 마당에 엎드려 있다. 과연 누가 오래 버티겠느냐?”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일종의 ‘조롱’인 셈인데 그 모양새가 안타깝다. 정조 또한 왕이라는 자리에 올라 느껴야 했던 환멸과 고독함을 어찌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왕은 천하제일이 자리였지만 이렇듯 고독했고 힘겨운 자리였다. 책 제목처럼 ‘투쟁’을 해야만 했던 자리였다. <왕의 투쟁>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뿐인가.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역사까지 짚어주고 왕이라는 존재와 조선 시대의 형상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조선의 왕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고단한 삶 덕분에 여러 가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왕의 투쟁 - 조선의 왕, 그 고독한 정치투쟁의 권력자

함규진 지음, 페이퍼로드(2007)


태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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