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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展 입구
 모딜리아니 展 입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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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는 그다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인물이 아니다. 모딜리아니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천재적 인물들이 넘쳤다. 그 후광에 가려서인지 모딜리아니는 생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20세기 예술은 인상주의의 바통을 물려받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과도기였고, 마티스와 드랭, 피카소 등의 인물이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1905년 살롱 도톤느(가을에 파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는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조르주 루오 등의 파격을 추구한 작품이 하나의 방에 전시되고 그 한가운데에는 15세기 도나텔로의 조각이 놓여 있었다. 비평가 루이 복셀은 이 배치를 보고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Ah, Donatello chez les Fauves."
"아, 도나텔로가 야수들한테 둘러싸였구나."

야수파(Fauvism)는 위인들이 난립하는 시기에 태어난 수많은 '-ism'들 중 하나였다. 모딜리아니는 급격한 예술사의 폭풍 속에 있었지만 '-ism' 열풍의 주역은 아니었다. 예술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이전의 전시들에서 모딜리아니는 큰 역할을 맡지 못했으며, 국내에 알려질 기회 또한 적었다.

작년 이맘때쯤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되었던 <르누아르에서 데미안 허스트까지>의 전시에서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보이지 않았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오르세미술관 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의 전시회에서 단 하나의 초상화만이 국내에 소개된 것이 전부다. 이런 그의 작품을 단독전시하는 것은 나름 파격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그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벽하게 젖어들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모딜리아니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입체파, 야수파, 후기 인상주의 등의 용어들은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다. 그 대신 몽파르나스에서 무절제한 삶의 에너지를 예술로 해소했던 한 인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는 단명하였기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관성이 없다고 여긴 작품들은 스스로 불태워버렸다. 주최 측이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을 한데 모으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관람객들에게도, 주최 측에게도 전시의 의미를 부여한다.

'몽파르나스' - 실험적 예술가들의 전당

전시회의 부제에 제시된 파리의 '몽파르나스'는 예술가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1910년대 파리의 몽파르나스에는 소위 '파리파'라고 불리는 실험적 예술가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용납된다. 샤갈, 후지타, 모딜리아니의 절친이었던 샤임 수틴과 키슬링도 몽파르나스에 매료되었다. 이들은 입체파나 미래파와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들에 대해서도 독립성을 유지한다.

수많은 천재들 속에서 자신의 능력에 좌절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파리에 온 후 무절제한 삶을 지속한다. 술을 살 돈이 없어 재킷을 전당포에 맡겨 술을 마시고, 웃통을 벗은 채 카페의 탁자 위에 올라가 "나를 봐라. 마치 신의 모습 같지 않은가?"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의 절친인 모리스 위트릴로 또한 폭음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예술적 영감을 '암살자들의 카페'에서 압생트를 입에 털어넣으며 얻었다. 결국, 이런 삶이 모딜리아니를 단명으로 몰아넣긴 했지만 그곳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모딜리아니는 여자친구와 다투다가 창문 밖으로 여자친구를 던져버릴 정도로 다혈질이었으며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다. 수 많은 연애와 불륜으로 얼룩진 디에고 리베라와 친분을 맺은 사실은 놀랍지 않으며,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으며, 그와 관계을 맺었던 다양한 인물들의 초상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가 그린 친구들의 초상을 바라보는 것은 전시회에 즐거움을 더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 artelist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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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칸 미술과 초상화

모딜리아니는 전 생애에 걸쳐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울한 분위기의 초상화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연구했던 에트루리아 미술과 시에나의 고딕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한 세잔의 초상화들 및 바울레족과 야운데족의 아프리카 가면들에서도 영감을 얻는다.

당시 아프리칸 미술에 영감을 받은 사람은 모딜리아니뿐만이 아니었다. 피카소는 1900년대에 마티스가 우연히 '페르 소바주'라는 가게에서 사 온 흑인 조각상을 보고 영감을 얻고 전설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게 된다. 피카소는 프랑스의 작가였던 앙드레 말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나 혼자서 으스스한 박물관(트로카데로 민족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었지요. 인디언이 만든 가면과 인형, 뽀얗게 먼지 앉은 마네킹들… 가면들은 보통 조각과는 달랐어요. 주술적인 데가 있었죠. 그건 우리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정령들에 대항하는 힘이었어요."

모딜리아니는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미의 근본적인 변화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으며, 특히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 또한 금세 아프리카 미술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아프리카 미술의 고유한 형태적 왜곡을 그의 작품에 적용한 모습들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프랑스 '트로카데로 민족박물관'에 전시된 아프리카 토속 마스크에 영감을 받아, 작품에는 그 특징인 아몬드 형태의 눈, 타원형 얼굴이 반영된다. 타원형의 몸과 긴 목, 긴 얼굴형은 요소들을 타원, 원기둥 등으로 치환하려 했던 세잔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시회에서는 '동공이 없는 공허한 눈'을 모딜리아니 초상화의 주요한 특징으로 강조하였으나, 전 작품에 걸쳐 그러한 일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브랑쿠시와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1909년 몽파르나스에서 조각가 브랑쿠시를 만나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전시회에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은 없지만, 조각들의 구상을 스케치한 것들은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조각 스승이었던 콘스탄틴 브랑쿠시에 대한 소개가 적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1904년 파리에 도착한 브랑쿠시는 당시 조각의 거장이었던 로댕으로부터 조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목 밑에서는 어떤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는 법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브랑쿠시의 조각은 핵심을 추구하며 이외의 모든 디테일을 생략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딜리아니 또한 인물의 형상을 단순화해 작품의 원초적 힘을 발산시켰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얼굴의 조형적 양감은 한때 함께했던 브랑쿠시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에서도 나타난다. 여인의 조각상을 탐구했던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포기한 후 누드화를 시도하고, 그 누드화는 여인 조각상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탐구를 직접적으로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중 하나는 그의 사후 경매에서 엄청난 값을 받고 팔린 것이기도 하며, 스케치 버전 또한 같이 전시되고 있다. 아트샵에서는 베개 커버로도 판매하고 있으며, 구매욕을 불러 일으킨다.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

전시회의 마지막 테마는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의 협업작품이다. 키슬링은 파리파의 일원 중 하나였다. 모딜리아니를 포함한 대부분 예술가들은 가난한 생활을 했으나, 키슬링은 여유 속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정물화와 풍경화 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며, 절친이었던 모딜리아니와의 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키슬링의 정물화와 풍경화는 세잔과 드랭을 계승했기에 입체파의 기하학적 형태와 풍부한 색채감을 보인다. 이는 전시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이다.

키슬링의 작품처럼, 몽파르나스에 거주했던 다른 예술가들의 회화 또한 전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모리스 위트릴로, 강렬한 표현력을 가졌던 샤임 수틴, 멕시코 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 등 모딜리아니가 초상화를 그려주었으며 몽파르나스에서 함께 했던 인물들의 작품들도 조명했다면, 전시회의 구성이 좀 더 풍부해졌을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모이즈 키슬링의 초상
 모딜리아니가 그린 모이즈 키슬링의 초상
ⓒ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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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전설'이 되었는가?

전시회의 부제인 '몽파르나스'는 위에서 살펴보았으며, 이제 '전설'을 해명할 차례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두 가지 축에서 '전설'로 인정받을 만하다. 첫 번째 축은 '초상화에 대한 천착'이고 두 번째 축은 '비극적 스토리'이다.

미술사에서는 하나의 대상, 혹은 기법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친 인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드가는 전자에 속하고 쇠라가 후자에 속한다. 드가는 발레에 천착했다. 드로잉, 유화, 심지어 조각상마저 발레리나의 동작을 묘사하는 데 중점이 맞추어져 있다. 점묘법을 고수한 쇠라는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는 데 꼬박 2년을 쏟아부었다.

현대 사회에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인물은 소위 '덕후'로 낙인찍힌다. 모든 것이 균질화돼야 하는 사회의 압력 속에서 한 개인이 도착적 천재성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모딜리아니는 세잔, 피카소, 브랑쿠시 등의 천재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초상화 분야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낸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만하다.

쇠라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
▲ A Sunday on La Grande Jatte 쇠라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
ⓒ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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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 잔느 에뷔테론느는 아이를 밴 채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그의 누드 작품은 사후 엄청난 값에 팔리기도 했다. 전시회 부제를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한 이유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극적 요소들이 그의 무절제한 삶에서, 그리고 사후에서도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정말 '전설'이라 불릴만한지, 관람자가 개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권리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들의 도덕관을 초월해 달리 취급받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 Modigliani

전시정보

제목 :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
기간 : 2015.06.26(금) - 2015.10.04(일)
시간 : 10:00 - 20:00
장소: 한가람미술관 제5전시실, 제6전시실
가격 : 성인 15,000원 / 청소년 10,000원 / 어린이 8,000원
문의 : 1588-2618
주최 : 서울경제
기타 : 매월 마지막 월요일은 휴관

덧붙이는 글 | 예술의 전당에서 모딜리아니의 단독전시(6월 26일~10월 4일)가 진행 중이다. 우리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화가인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을 파헤쳐보았다.



태그:#모딜리아니, #예술의전당, #몽파르나스,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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