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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교과서의 국정화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의견 대립이 생기게 된 것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려 몇 년 전으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대야소의 형국이 만들어졌던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사 청산'을 주요 국정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각종 특별법제가 시작되거나 힘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5월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통과되었고, 12월에는 공적 권위를 가지는 장관급 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보수 진영은 반발했습니다. 이른바 '뉴 라이트 운동'을 전개하며 "과거 청산보다 미래 지향"을 외쳤습니다.

2005년 1월 '교과서 포럼'이 창립됐고, 이들은 기존 학계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규정하며 자체적 교과서 제작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2006년 2월, 스테디셀러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한 글자를 덧붙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출간됐고, 2008년에는 드디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선보였습니다. 보수 정치권과 언론계는 크게 환영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정통성 옹호하는 교과서 출간'이라고 평했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청소년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교과서 검정을 받지 못했고, 논쟁은 사그라드는 듯했습니다.

2013년, 교과서포럼과 대부분의 인적 구성을 공유하는 '한국현대사학회'라는 뉴라이트 계열의 단체가 또다시 세상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좌파 진영이 교육과 언론계의 7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며 다시 교과서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한국현대사학회의 전/현직 학회장이 주요 집필자로 참여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2013년 5월 검정 본심사를 통과했고, 8월 최종 심의를 통과하여 교육 일선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교재를 선정하는 실질적 권한을 가진 각지의 고등학교들은 이 논란의 교과서를 외면했고, 결국 2014년 1월 기준 교학사 교과서를 최종 채택한 학교는 전국에 1개교에 그쳤습니다. '역사 전쟁'은 또다시 마무리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교과서 채택 시기 직후부터,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이제는 '국정화'라는 새로운 담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1월 <조선일보>는 칼럼을 통해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고 현대사는 사회과의 다른 과목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제기했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도부도 국정 교과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김무성 의원은 2013년부터 한국현대사학회와 활발히 교류하며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고, 교과서 논쟁의 주무 장관인 황우여 사회부총리는 "역사를 한 가지로 가르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는 소신을 밝힌 바 있습니다.

"검인정 제도는 국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라고요?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교과서가 국정이었던 시대와 지금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여당 원내대표의 입에서 "검인정 제도는 국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걸까요.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과거 국정 교과서의 시대를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러한 첨예한 갈등은 다사다난했던 우리 현대사의 거의 모든 질곡을 소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짧은 글에서 모든 국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기에, 저는 주제를 하나 정해서 접근하려 합니다. 바로 4·3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항쟁이라고도 하고 사건이라고도 하고 폭동이라고도 하는, 해방정국에서 한국전쟁의 시기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교과서 상에서의 4·3 인식 변천사를 살펴보겠습니다.

4·3이 대강 마무리된 직후인 1955년, 1차 교육과정이 시작됐습니다. 뒤이은 2차 교육과정은 1963년에 개편되어 1974년까지 이어집니다. 대강 10년을 주기로 개편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1차와 2차 교육과정을 거치는 20년 동안 고등학교 사회·국사 교과서에 제주 4·3은 전혀 기술되지 않았습니다. 1976년 발행된 3차 교육과정 상의 <국사>에 4·3이 처음 등장했는데,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에서의 폭동과 여수·순천에서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1982년에 발행된 4차 교육과정 상의 <국사>에는 위의 기본 설명에 '남한 교란작전'이 추가되고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이라는 '공산 폭도들의 상세 죄상'이 기술됩니다. 노태우 정권기였던 1990년 발행된 5차 교과서 또한 4차의 기술을 그대로 답습했으며, 1996년 발행된 6차 국사에서는 기존 '공산주의자의 무장 폭동' 기본틀은 유지한 채 '무고한 시민의 희생이 있었다'라는 말이 추가되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서두에 언급했던 7차 교육과정 상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오기 전까지의 제주 4·3에 대한 공적(公的), 정확히 말하면 '교과서적' 인식입니다. 이 시기의 4·3에 대한 담론은 국가권력이 독점했습니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커녕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연좌제의 압박 구조를 통해 4·3에 대한 발설 자체를 금기시했습니다. 유일하게 '허용'되어 있는 말은 상기한 교과서 기술과 같은 국정(國定), 즉 국가가 정해 놓은 인식 뿐이었습니다.

이에 반하려 하는 움직임들은 모두 강하게 억눌렀습니다. 유족회 조직은 반국가단체 결성죄가 되었고, 4·3에 대한 기록 시도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었으며 위령제 개최를 시도했던 학생들은 체포되었습니다. "국군은 정의로운 군대이니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죽였다 해도 모두 인민군에 부역한 통비분자들이었다."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1950년대의 공적 인식이 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4·3에 대한 담론을 권위적으로 독점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정 교과서 제도의 문제점입니다. 의도적인 왜곡과 사실관계의 오류 유무는 오히려 차치할 일이고, 국가권력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담론을 독점하고 국정 이외의 논의 자체를 권위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국가가 틀을 만들어 놓고 따르기를 강요하는, 이에 저항하면 반국가이고 이적행위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4·3, 그리고 다른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의 관련자들이 지난 70여 년간 살아왔던 삶의 절대법칙입니다.

이들은 분명 눈 앞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고모나 동생이 죽어갔던 기억이 생생함에도 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공적 기억을 강요하는 국가권력 앞에서 그야말로 '숨만 쉬고' 살아왔습니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국가의 공적 역사에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뻔한 가해자들이 경찰서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아버지 제사도 마음대로 지내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국가권력 앞에서 '숨만 쉬고' 살았던 사람들

이렇게 국가의 테두리 밖에 내팽개쳐져 있던 이들에게 2000년을 전후하여 국가가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느 유가족은 전화를 받고 "40년 만에 연락하셨네요"라고 말했습니다. 1999년 4·3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3년여의 조사를 거쳐 4·3위원회의 정부 공식 보고서가 2003년 10월 15일 확정됐습니다. 10월 3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7차 교육과정 개편에 의거해 출판된 6종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서술이 처음으로 실리게 됩니다.

폭동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사라졌고, 군정의 일반 주민 투옥 사실과 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 '무고한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라는 표현이 들어갔습니다. 비록 유족들 입장에서 마음에 꽉 차는 내용은 아닐지라도, 처음으로 '폭도'의 굴레를 벗은 그들은 교과서를 펴들고 세월에 빛바랜 미소를 띠었을 것입니다. 수십 년간 지녀왔던 마음 속의 돌덩어리를 조금이나마 덜었을 것입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친지를 쏘고 자신을 쏘았던 국가권력에 협력하고 복종하며 오랜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국가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워 억눌렀으나, 조용히 숨만 쉬며 버텨왔습니다. 오랫동안 4·3을 들여다보고 연구해왔던 여러 학자들은 이들의 생애를 '기억 투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계적 문인인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이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어느 학자는 말했습니다. 이 체제 하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기억을 지우고 국가가 제시하는 공적 기억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기를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오랜 시간을 견뎌 내고 소정의 성과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기억 투쟁'을 강요하는 날들이 다시 오려는 먹구름이 보입니다. 군사정권기의 4·3 인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교과서를 만들어내고 국정화를 논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어쩔 수 없이 유족들이 다시 나서게 됐습니다. 총상으로 턱이 날아가 한평생 말을 하지 못한 할머니나 엉덩이에 입은 총상으로 평생 목욕탕을 가지 못한 할아버지, 왼팔이 으스러진 상태로 60년을 산 그의 어머니 같은 피해자들이 아무리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70년대에 머무르려 하는 그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이들은 다시 '기억 투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올해 6월 25일에 '4·3 흔들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제주 도민은 16년 만에 범도민 대책기구를 결성했고, 2013년 조직된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의 주요 구성 단체는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정대협),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한국전쟁유족회 등 과거사의 직접적 피해 단체들이었습니다. 이미 역사의 판단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실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과거의 어두웠던 면을 감추려고만 하는 시도는 당당한 국가가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 일본의 우익 세력이 위안부 문제를 없던 일로 덮으려는 행태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는 절대로 불가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제주 4.3항쟁-저항과 슬픔의 역사 (양정심, 선인출판사)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김동춘, 사계절)
4.3의 공적 인식 및 서술의 변천 (박찬식, 한국근현대사연구 2007년 여름호 제 41집)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신문 참고했습니다.



태그:#교과서 국정화, #제주 4.3, #교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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