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하고성 성내 모습
 교하고성 성내 모습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몽환적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사라진 왕국과 사라지지 않은 토성. 1년 강우량 18mm의 사막에서 비가 아니라 세월의 무게로 부스러지고 부스러져 앙상한 뼈대만 남은 토성. 그 황량함이 푸른 하늘을 어루만져 한 편의 쓸쓸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투루판시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높지 않은 언덕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 폐허가 된 토성이 있다. 옛날에는 흘러내린 강이 언덕을 만나 양 옆으로 흘렀다가 다시 만났다고 하여 교하성(交河城)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 말할 수 있다. 강을 접하는 면을 깎아 절벽을 만들었고, 성벽을 쌓지 않고 만든 길이 1750m 정도다. 이곳은 폭 300m 남짓의 타원형으로 된 천연 요새다.

침략으로 버려진 성, 흙무더기로 남은 '왕국'

고창고성 내부 모습
 고창고성 내부 모습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교하성은 기원전 100년부터 450년까지 존재한 고대 중국 차사국의 수도라고 한다. 이후 당나라에게 정복되면서 성을 버리고 고창성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계속 관리하는데 이후 13세기 경 몽골의 침략으로 버려진 성이 되었다고 한다.

전해진 대로 한다면 2000여 년 전에는 교하성 옆에 흐르는 강에 장물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강이 흘렀던 계곡만 남아 있다. 성의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 밑에 도랑 정도의 물이 조금씩 흐르고 그곳에 오리 떼가 놀고 있다. 물가에는 버드나무 등 수목도 우거져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폭 1m 정도의 보도블럭이 사방으로 깔려 있다. 길 양 옆으로 기기묘묘한 흙기둥과 흙벽, 흙무더기들이 파란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다. 흙무더기들엔 휑한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당시에 흙벽돌로 만든 건축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집과 같은 형체만 남긴 흙무더기들은 세월의 흐름에 무너질 만도 한데, 강우량이 거의 없는 기후 때문인지 바람에 깎인 흔적만 가득하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그야말로 사라진 왕국의 흔적만 흙무더기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금 들어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지하는 커다란 공간이 여러 개 이어져 파져 있다.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은 옛모습이 아니라 새로 복원해 놓은 모습이다. 무더위에 지하에 터를 잡고 생활했던 집인 것 같다.

교하고성, 지하를 파 만든 주거 공간
 교하고성, 지하를 파 만든 주거 공간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성 안으로 계속 들어가면 사방으로 길이 나뉘어져 있다. 흙무더기들이 계속 이어져 있는데,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넓은 터에 자리 잡은 불교 사원이 형태만 남아 있다. 벽은 이미 알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불상이 안치된 흔적이 남아 있다.

한 곳을 지나가니 몇 명의 사람들이 흙무더기들을 보수하고 있다. 보수라고 하기보다는 떨어지는 흙무더기를 강화하거나 붙여서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같다. 나름대로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를 설치하여 작업하는 곳도 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흙을 집어넣는 사람도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을 달려가니 이와 닮은 모습의 고성이 또 하나 나타난다. 40도가 넘는 사막 지역의 허허벌판 한 가운데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성으로 들어가는 출입문도 지하에 파 놓았다. 무더운 날씨 탓에 찾는 사람도 뜸한 안내소로 들어가자, 몇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성은 사각형 모양으로 외성과 내성이 있다. 외성은 둘레가 5㎞이고, 내성은 둘레가 3.6㎞라고 한다. 무더위에 버티기 힘든 관람객들은 전기차를 타고 내성 둘레를 돈다고 한다. 우리역시 전기차를 탔다.  

고창고성 입구
 고창고성 입구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고창국의 수도인 고창고성에도 무너진 흙더미들만 가득하다. 성이나 집을 모두 흙벽돌로 쌓았고, 무너진 흔적들에 흙기둥만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640년 당나라에 멸망하기 전까지 고창왕국이 자리 잡았던 이곳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망하여 성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너무 황량하다. 지상 온도 5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인데도 땀이 나는 순간 말라 버린다. 무더위에도 땀이 흐르지 않는 이상한 기후를 뚫고 성을 한 바퀴 돌아도, 이곳엔 왕국도 없고 사람도 없다. 그들의 함성도 없고, 그들의 삶도 없다. 사라진 이들의 숨소리를 몰래 감춘 흙기둥들만 폐허가 된 채 서로를 의지하며 안타깝게 서 있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고, 폐허된 성 안에 보리만 무성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곳은 무성한 보리조차 없다.

흙기둥에 귀를 기울여 사라진 왕국과 사라진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자 한 김은경 선생님은 그 안타깝고 쓸쓸한 심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리나요? 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 사람들의 소리가, 저기 어딘가를 걸었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저기 어느 집에선가 아침이면 빵을 굽고 밤이면 아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자고, 열기가 식은 사막의 밤은 차게 빛나고, 아이는 사막에 내리는 이슬을 보며 깨어났겠지요.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스러진 흙벽돌에 손을 대어 보면서."

전기차로 폐허가 된 흙무더기 사이를 돌다가 멈추었다. 우리가 전기차에서 내려 흙무더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0m 정도 들어가자 삼장법사가 머물렀다는 사찰이 나온다. 모두 흙으로 복원된 집인데 사원형태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돔 형태의 흙집이다.

불교를 믿었던 고창국의 왕 국문태는 삼장법사가 고승이란 말을 듣고 삼장법사를 극진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삼장법사는 이곳에 조금 머물러 불교를 가르치다가 인도로 떠나려 했다고 한다. 왕은 삼장법사가 고창국에 남아주기를 원했지만, 그가 인도로 떠나자 낙타 30여 마리 등 여행 장비를 챙겨주었다. 가는 길에 있는 나라들 앞으로 이 법사를 무사히 통과시켜 달라는 서찰까지 써 주었다고 한다. 대신 삼장법사는 돌아오는 길에 이 고창국에서 2년간 머물기로 약속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쇠로 된 몸뚱이로도 못 넘는 '화염산'

서유기의 일부 배경으로 나오는 화염산의 모습
 서유기의 일부 배경으로 나오는 화염산의 모습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삼장법사는 인도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고창국 왕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이미 당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아쉬움을 품고 당나라인 장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삼장법사가 머물렀다는 사찰에 들어서자 어떤 사람이 만돌린과 비슷한 전통악기를 연주한다. 그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 그곳에 앉아 있다가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연주를 해 주고, 적선을 받는 것이다. 그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위안화 한 장을 접시에 놓았다.

고창고성 옆에는 이스타나 고분군이 있는데, 이곳엔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무덤이 널려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작은 크기의 흙무더기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아니라 평범한 무덤 정도다.

찌는 듯한 더위로 움직이기 힘든 날씨였지만 우리는 공개된 고분 두 개를 찾았다. 계단을 밟고 땅 밑으로 내려가니 둥근 형태의 공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미라도 있었다. 연간 강수량이 적은 사막의 특성 때문에 인체를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미라로 남는다고 한다.

이스타나 고분군에 있는 미라의 모습
 이스타나 고분군에 있는 미라의 모습
ⓒ 서종규

관련사진보기


눈 앞에 누워있는 미라가 신기했다. 1500여 년 전에 살아 있었을 미라는 유리관 안에 곱게 누워 있었다. 딱딱하게 말라버린 미라는 1500여 년 전 그가 함성을 지르며 내달렸을 그 시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이스타나 고분군에서 옆에는 불에 타는 듯한 산이 쭉 이어져 있다. 아무리 보아도 산의 모양이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바로 화염산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산줄기들은 불꽃처럼 쭉쭉 뻗어 있다. 더구나 불에 타고 있는 듯한 화염산의 표면 온도는 60도가 넘는다고 한다.

화염산은 서유기의 일부 배경이 된 산이다. 삼장법사 일행이 이곳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가을인데도 너무 더웠다. 노인에게 더운 이유를 묻자 그는 봄도 없고 가을도 없이 일 년 내내 무덥기만 하다며 칠선선님에게 부채를 빌려서 때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화염산 팔백 리는 꼭 불바다 같아서 주위에 풀 한 포기 안 납니다. 만약 그 산을 넘으려면 설령 구리로 된 머리나 쇠로 된 몸뚱이라 하더라도 녹아서 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칠선선님은 파초선을 갖고 계셔요. 그걸 빌려서 한 번 부치기만 하면 불이 꺼지고, 두 번 부치면 바람이 일고, 세 번째엔 비가 내려요. 그래서 우리는 씨를 뿌리고 그 곡식이 익으면 제 때에 벱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십 년에 한 번씩 붉은 비단옷, 돼지와 양, 거위, 달 온갖 과일과 술을 가지고 목욕재계한 뒤에 산으로 가서 배례합니다."
- <서유기> 중

화염산 아래 절벽에는 1500여 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불교 석굴 사원인 베제크리크가 있다. 70여 개 석굴과 많은 불교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몇 군데를 복원했지만, 대부분의 석굴이 파괴됐고, 세워진 불상도 파괴됐으며, 벽에 그려진 그림들도 모두 다른 물감들로 덧칠돼 있다.일부 그림들은 서양으로 유출됐다.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파괴되기도 했다고 한다.

화염처럼 타오르는 산, 모든 것이 타버릴 것 같은 사막의 가운데에 서서, 내 마음도 타 들어 갔다.

○ 편집ㅣ손지은 기자

덧붙이는 글 | 7. 29(수)부터 8.6(목)까지 9일 동안 풀꽃산악회 회원 20명은 혜초여행사의 기획으로 신서역길의 중국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신서역기행은 서안에서 천수까지 320km를 버스로 약 5시간, 천수에서 난주까지 33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740km를 기차로 약 8시간, 가욕관에서 돈황까지 40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돈황에서 유원가지 120km를 버스로 2시간, 유원에서 선선까지 620km를 기차로 약 9시간, 선선에서 투루판까지 약 150km를 버스로 약 3시간,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190km를 버스로 약 3시간이 걸리는 총 2800km의 대장정입니다.
‘버스와 기차로 간 서역기행’은 총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1) 사막을 가로지르는 신서역기행, (2) 서안(西安), 당나라의 흔적, (3) 진시황과 병마용, (4) 화청지, 양귀비에 대한 인식, (5) 천수, 맥적굴, (6) 난주, 황하와 유가협댐, (7) 가욕관, 만리장성의 시작, (8) 돈황 석굴 막고굴, (9) 투루판, 사막에 사는 사람들, (10) 사라진 왕국 고창고성과 교하고성



태그:#서역기행, #고창고성, #교하고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