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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에서 이어집니다.)

"오하라 검사님, 정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히비야 공원 맞은 편에 있는 도쿄 법조타운의 한 커피집에서 오하라 검사를 만난 미키가 묻는다.

"무슨 말씀인지?"
"물론 실례인 건 알지만요. 오하라 검사님께서 아까 저희 보도본부장님을 괜히 만나신 것은 아닐 테고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무슨 보도에 대한 요청 건 아닌지 궁금해서요."

"아니, 무슨 고등검찰청 검사가 언론 보도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냥 대학교 선배이기도 해서 인사차 들린 것 뿐…."
"오하라 검사님, 지금 검사님 눈빛이 흔들리는 것, 아세요?"
"……."

"저 같은 기자나 아니면 검사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사람을 일단 의심하고 자신이 알고 싶은 걸 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잖아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심증이라는 것, 잘 아시죠? 오하라 검사님께서 지금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안 하셔도 됩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자, 일어나시죠?"

미키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오하라 검사가 미키의 팔을 잡는다.

"미키님, 그냥 가시려고요? 일단 한 번 앉아보세요."

미키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오하라 검사는 망설이며 말한다.

"사실 미키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다는 게 무슨 얘기죠? 맞으면 맞는 거고, 틀리면 틀린 거 아닌가요? 그런 정치인 같은 말이 어딨어요?"

"사실이에요. 맞는 것은 요즘 여론이 워낙 안 좋으니까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이슈는 좀 더 완곡하게 보도해 주십사 해서 맞는 거고요. 틀리는 것은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바르게 보도해 달라는 겁니다."

"근데 언제부터 관방성이 아니라 고등검찰에서 언론 보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가요? 이거 월권 아닌가요?"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가 명함에는 고등검찰청 검사지만 지금 현재 하는 일이 국가안전보장회의 연락관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네?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고등검찰이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 고등검찰청의 공안 사건들은 NSC와 관련이 있죠. 그래서 연락관이 필요한 거고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오늘 하네다공항 입국 거부 건 아시죠?"
"네. 뉴스에서 봤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취재하고 맡았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입국 거부 사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어요. 하지만 데스크에서 밑도 끝도 없이 제 기사를 손봐서 정부의 입국 거부를 옹호하는 기사로 바뀐 거예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건, 제가 기사를 편집하는 사람도 아니고, 방송사에서 알아서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오하라 검사님이 온 것이 그 배경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기사를 가려서 방송하라는. 제가 너무 앞서갔나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저는 기사 하나 하나에 대해 알지 못할 뿐더러 시시콜콜하게 어떻게 기사의 방향을 정하느냐는 전적으로 방송사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역시 미키의 짐작이 맞았다. 정부의 차가운 입김이 방송사를 얼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 마치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현역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 스카웃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재선을 앞둔 대통령은 이를 감추기 위해 정치꾼인 브린(로버트 드니로)을 불러들여 여론을 조작한다. 브린은 알바니아와 전쟁 위기를 연출시키면서 국민들을 속이며, 대통령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결국 대통령은 재선한다는 불행한 이야기다.

미키는 걱정한다. 앞으로가 문제다. 이보다 심한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울부터 이어진 오하라 검사와 인연으로 내각에 무언가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하라 검사가 정부의 은밀하고도 중요한 움직임에 대해 자신에게 귀띔을 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닉슨 대통령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영화화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도 나오는 '딥 스로트(deep throat, 실제로 그는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이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좋은, 그리고 정직한 정보원이 되리라는, 여자로서 미키의 직감이다.

'정육점인가.'

눈에 붉은 빛이 들어오는 것 같다. 아직 눈꺼풀이 무겁다. 머리는 깨지듯 아프고, 목은 갈증으로 불이 난 듯하다. 몸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안간힘을 써서 손으로 더듬어 물을 찾는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없다. 과음을 해서 생기는 숙취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숙취보다 수십 배 더러운 느낌이다. 침도 말라 입안은 뙤약볕에 잘 마른 모래를 한 움큼 뿌려 놓은 것처럼 거칠다. 일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생각뿐이다.

'정육점 맞는 것 같다.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그런데 왜 내가 정육점에 있지?'

K는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난다. 조금 춥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어본다. 무언가 끈적인다. 마치 피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커멓게 어두운 방에서 두리번거리며 벽을 더듬는다. 겨우 스위치를 찾아내고는 불을 켠다.

"허억!"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화 '캐리'에서 주인공 캐리 화이트가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돼 돼지피를 뒤집어 쓴 모습처럼 피칠갑이다. 침대 한쪽에는 여자가 등을 돌리고 누워있다. 무슨 상황인지 여자에게 묻기 위해 어깨를 두드린다. 반응이 없다. 단지 침대에 반쯤 굳은 피가 흥건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도저히 상황 인식이 안 된다. 밖에서 누군가 발로 차는 듯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검찰이다.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한다. 미란다 원칙은 알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

비아냥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봐요. 무슨 소리예요? 살인이라니?"

다짜고짜 뺨을 때린다. 그리고 마치 이슬람 테러단을 연상케 하는 검정 두건으로 K의 얼굴을 덮어씌운다. 그리고 차로 옮겨진다. 승용차는 아니다. 승합차다. 뒤로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K는 차에 오른다. K에게 검찰이라며 자신을 지칭한 사람들이 상사에게 신고를 받은 살인자를 체포해 옮기는 중이라고 보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K에게 더 없이 긴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폭풍처럼 다시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는다.

얼마가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다. 손은 여전히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처럼 다리에는 감각이 없다. 눈을 뜬 K가 둘러본 곳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취조실 같다는 느낌이다. 앞에는 사무실 책상과 비슷한 탁자와 건너편에는 취조하는 사람이 앉을 빈 의자가 놓여있다. 그 의자 뒷면 벽 상단이 검정색 통유리로 된 것을 보니 편광유리처럼 보인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K는 고개를 돌린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아직까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자꾸 기억을 더듬는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의 숨결 냄새를 애써서 맡아본다. 술 마신 다음 날 묻어나는 알코올 흔적은 없다. 처음에는 만취해서 정신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되새겨 봐도 의식을 놓칠 만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수사관으로 짐작 가는 남자가 들어와 K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K 입에 담배를 물려준다. 그리곤 불을 붙여준다. K는 수갑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역시 그 남자는 말없이 수갑을 풀어준다. 날마다 첫 담배가 다 그렇듯 핑 돈다. 담배를 다 피운 K에게 진술서를 내민다.

"당신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살인을 저질렀어. 그것도 불법적인 성매매를 하면서. 한국인들은 우리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귀찮고 도움이 안 되는 존재야. 왜 죽였나? 마음에 안 들었어? 반성문을 쓴다는 심정으로 6하 원칙에 따라 진술서에 당신이 행한 모든 일을 빠짐없이 적어.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영영 햇빛을 못 보게 될지도 몰라."

"무슨 얘깁니까? 저는 성매매 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인 일도 없어요."

"이 작자 보게. 당신 옆에 죽어 있는 콜걸 시신을 못 봤어?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과도에 당신 지문이 남아 있어. 모든 정황과 증거가 당신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는 거 몰라. 당신이 안 죽였다는 근거는 당신의 말 뿐이야."

"김나영씨 좀 불러줘요. 그리고 이시이 레오도요. 안나도요.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어젯밤 일에 대해 얘기를 해줄 거예요."

"정신 못 차렸구먼. 그 사람들이 누군데,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당신을 위해 증언을 해줘? 증거가 명백한 범죄인에게 누가 그런 증언을 하냐고?"

"아니, 어제 밤에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그럼, 거기 진술서에 술집 이름, 위치,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적어 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핸드폰은 어디 있나요? 거기에 김나영씨 연락처가 있는데요. 그리고 제 재킷도요. 그 안에 이시이 레오의 명함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야. 핸드폰 같은 것은 없었고, 재킷도 없어. 당신이 지금 입고 옷과 소지품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야. 그러면 그 술집, 어디에 있는 거야. 위치나 얘기해 봐."

"그게, 눈을 가리고 가는 바람에 술집이 어딘지 정확히 몰라요."

"뭐? 이 사람이 좋은 말로 하니까 장난치려 들어?"

"아니에요. '멤버십 하이클래스 이메쿠라'라면서 눈을 가리고 데려가서 정말 어딘지 몰라요. 신주쿠에 있는 건물이라는 것 밖에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럼 집에 연락 좀 해주세요. 집에 못 간다고 전화도 못 했어요. 일단 집에 알리게 되면 제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핸드폰 번호 같은 거 없어?"
"모두 제 핸드폰 안에 있는데…."

사실 미키의 핸드폰 번호도 가물가물하다. 바로 디지털 치매인가.

"그럼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적어 봐."

겨우 겨우 주소를 기억해 내서 적어주자 수사관은 K를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K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서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전날에 찾아간 김나영의 클럽에서 어떻게 그 모텔 같은 곳에 가게 됐는지, 거의 12시간 이상으로 가늠되는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틀림없이 위스키 한 병을 셋이 마셨고, 안나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들어와서 한두 잔 더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블랙 아웃됐다. 그 정도 주량에 기억을 잃을 정도는 물론 아니다.

문득 옛날 서울에서 술집 심야영업을 금지시켰을 때 읽었던 기사가 생각난다. 술에 취한 손님이 '삐끼'들에게 끌려들어가 술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10개가 넘는 위스키 빈병이 놓여 있었고, 그 모든 술값을 치른 다음에야 술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그 술에는 수면제 같은 약물을 넣었고, 취객을 대상으로 술집이 바가지를 씌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K에게는 지금 핸드폰과 재킷만 없을 뿐 지갑과 약간의 현금, 그리고 신용카드도 그대로 있다. 돈을 목적으로 K를 정신을 잃게 만들었으면 충분히 돈을 뜯어냈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K는 영화 '노 웨이 아웃(No Way out)'에서 우연치 않게 실족사를 한 정부(情婦) 때문에 살인 혐의를 쓴 브라이스 국방장관(진 해크만) 신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열악한 것은 K를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전히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과정이나 이유를 K는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여느 때처럼 결국 술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다. 큰 덫에 발이 걸린, 움직이면 조여드는 올무에 목이 걸린 절박한 처지다.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살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혐의가 씌워졌다.

'타국에서 살인혐의라니?'

말도 안 되는 희비극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K 인생을 하얗게 혹은 까맣게 지워버릴 만큼 무서운 음모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난 것 같다. 수사관은 화가 난 얼굴로 나타난다.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아나? 이 주소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당신 도대체 어떤 인물이야? 이 사람 한국인 스파이 아냐?"

기가 막히다. 스파이라니. 무엇을 위하고, 무엇을 염탐하는?

"……."

쓰게 웃을 수 없다. 울 수도 없다. 무슨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할 수 없다.

"안 되겠네. 이봐. 이 친구 독방에 쳐 넣어."

K는 이국 땅 유치장인지, 구치소인지도 모르는 곳, 독방에 갇힌다. 미키에게 전화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도 이젠 소용없다. 어두운 독방으로 가는 길, 저녁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지지 않은 한여름 해가 창을 통해 여전히 끈적끈적한 한줌의 빛을 보낼 뿐이다.


태그:#영화 왝 더 독, #미란다원칙, #영화 노웨이아웃, #영화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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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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