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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 청년 장준하를 바라본다. 일본 학병에 입대해 중국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뒤 광복군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절이었다. 동그랗고 큰 뿔테 안경을 썼다. 콧날이 오똑하고 눈썹이 진하다. 입술은 부드럽게 다물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순한 '범생이' 인상이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1973년 12월 24일, 서울 와이엠시에이(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년 장준하를 본다. 큰 뿔테 안경과 오똑한 콧날과 진한 눈썹이 그대로다. 앞 이마쪽 머리숱이 세월의 풍상 아래 빠져 달아난 걸 빼고 나면 26살 청년 시절 모습 그대로다. 장준하에게서는 결연한 '투사'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68년 6월 20일, 중정(중앙정보부, 지금의 '국가정보원')이 최초로 만든 인물 관리 기록인 '인물 존안 원본'에서 장준하의 '성질 소행'은 "온순하나 날카로움"으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국가정보기관 특유의 직관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온순함 이면의 강한 의지를 간파한 것일까.

중정의 분석대로 장준하는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과정에서 모두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었다. 나이 어린 후배에게도 하대하지 않고 늘 존칭어를 쓴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거대한 기득권 세력에게는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신 독재 체제를 강요한 뒤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1974년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인을 불과 1년여만인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집단 처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씌워' 죽였"(266쪽)으며, "박정희를 비판하고 반대하면 단순히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266쪽)임을 보여주었다. 장준하의 연행과 구속 역시 모두 대중 앞에서 행한 연설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장준하는 의혹 가득한 죽음을 맞이했다. 1975년 8월 17일이었다. 그로부터 40주기가 지났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 남자가 팔을 걷어 붙였다. 20대 시절 장준하를 처음 우연히 만나고, 2003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운명'처럼 장준하 사건 조사관을 맡은 인권운동가 고상만이 주인공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표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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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정의 동향 정보 기록을 토대로 장준하의 일대기를 엮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중정의 장준하 동향 기록을 입수하게 된 경위가 나의 '운명'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박정희 독재 권력하에서 숨진 장준하 선생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세상에 대신 알려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중략) 둘째, 장준하를 위시한 정치적 반대자를 상대로 그 당시 유신독재 세력이 어떤 범죄적 행위를 자행했는지 우리 국민이 이제라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이 책을 쓰기로 했다.(7, 8쪽)'

이 책은 중정이 탈법적, 불법적으로 남긴 '장준하 동향 보고'를 바탕으로 한 장준하의 일대기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유신 독재에 대한 역사적 고발장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중정은 1963년부터 장준하가 의문사로 숨진 1975년까지 모든 행적을 철저히 감시했다. 미행, 도청은 기본이었고, 장준하의 주변인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식의 비열하고 반인륜적인 방법을 썼다.

'이날(장준하가 김대중, 김영삼 등 재야의 영수급 지도자들을 접촉하며 반박정희 투쟁 전선을 단일화하자고 제안하던 1975년 2월 26일-기자 주)의 중정 동향 기록은 특이했다. 정보를 입수한 경로가 도청을 하거나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제3자의 전언을 전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물론 있었지만 이때부터 장준하의 동향 기록에 이런 유형의 보고문이 많이 보인다. 이는 장준하의 측근 중에 중정에게 포섭된 누군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누군가를 믿고 장준하가 자신의 속내를 말했는데 이 모든 것이 중정에 전부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254~255쪽)'

중정의 감시는 장준하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고 한다. 중정은 장준하가 사망한 1975년 8월 17일 이후부터 1978년까지 장준하의 유족과 그의 동지들을 감시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살아 있는 독재자 박정희에게 죽은 장준하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박정희 유신 정권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독재 체제였다. 박정희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선 장준하의 말과 행적은 '금기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독재자의 '수족'인 정보기관이 민주주의자 장준하와 동지들을 옥죄기 위해 남긴 낱낱의 기록들이 그들의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사료'가 된 것은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장준하 죽음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저자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장준하 죽음 직후 날카로운 분석 기사를 게재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강제 출국을 당한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 서울 특파원 로이 황 기자가 문제의 기사 첫 머리에 언급한 "장준하의 신비스러운 죽음"(284쪽)이 떠오른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평소 함께 등산을 다니던 지지자 모임인 호림산악회 회원 및 일반인들과 함께 경기도 포천 약사봉으로 등산을 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검찰과 경찰은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운악산 약사봉을 등반하던 중 실족하여 추락사했다고 발표했다.

중정은 당일 21시부로 '장준하 등반 중 추락 사망'이라는 제목의 상황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동일 14:40경 동 운악산 약사봉 계곡에서 실족으로 추락,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음"이라고 기록했다. '진실'일까.

2012년 8월 어느 날, 장준하가 묻힌 파주 광탄면 천주교 나자렛 묘지 일대에 폭우가 내렸다. 장준하의 묘소 바로 위 석축이 무너져 내렸다. 특이하게도 다른 석축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유족들은 묘역 이장을 결정했다. 묘를 파고 관 뚜껑을 열었다. 장준하의 두개골이 보였다. 모두 경악했다. 해머에 맞아 뚫린 듯한 손상이 뼈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준하가 죽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자리에는 시바스 리갈 양주와 젊은 여인들이 있었다. (중략) 장준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채 고뇌를 거듭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부산과 마산 시민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주장처럼 '탱크로 밀어버릴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장준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가려진 진실을 밝히라고 외쳤으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동안 그가 즐긴 주지육림의 비밀이 무엇인지 밝히라며 궁금해했다. 이것이 독재자 박정희와 이 시대의 '진정한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장준하의 마지막 평가였다. (212~213쪽)'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은 1976년 8월호 <씨알의 소리>에 쓴 기고문에서 "장준하를 가리켜 누군가가 말하기를 '금지된 동작을 먼저 시작한 혁명가'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히 바로 보고 한 말"(323쪽)이라고 적었다. "곤히 잠드시라고 빌지는 않았습니다. 금생에 못다한, 한 많은 일들을 두고 어찌 고이 잠들 수 있겠습니까? 가신 선생님이나 남은 우리들이 고이 잠들기에는, 우리 곁에 잠 못 이루는 이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323쪽)라고 말했다.

장준하가 죽은 지 40년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곁에 잠 못 이루는 이웃"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저자는 장준하를 "위대한 민주주의자였고, 혁명가였으며,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자"(324쪽)로 보았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생을 싸워왔다고 평가했다.

'나는 장준하 선생의 '정신적 아들'을 자임하고 싶다. (중략) 조국과 민중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정의에 기초한 용기 있는 실천을 흠모하게 되었다. 나 역시 장준하 선생이 걸어간 그 길을 따라 대한민국을 제대로 된 민주주의 인권 국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장준하의 정신적 아들, 딸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10만 명, 아니 100만 명쯤 생겨난다면, 장담컨대 대한민국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331쪽)'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민주주의자 장준하 40주기 추모 평전>(고상만 지음 / 오마이북 / 2015.9.21. / 351쪽 / 1,6000원)

덧붙이는 글 | 정은균 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 민주주의자 장준하 40주기 추모 평전

고상만 지음, 오마이북(2015)


태그:#장준하, #박정희,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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