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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6일 오전 8시 20분]

열정페이, 무급 인턴, 삼포세대... '청년'에게 붙이는 이런저런 말들이 늘어나고, '청년'을 걱정하는 기사도 연일 쏟아진다. 그런데 온 대한민국이 '청년'에 대해 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청년이자 여성으로 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올해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들은 20~30대 여성 스무 명을 만나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먹고 살기는 괜찮은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그려나가고 있는지 인터뷰했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일하고 있지만, '성장'은커녕 '경력'도 쌓기 어려운 현실에 놓인 "할 말 진짜 많다"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직접 만난 활동가가 전한다. - 기자 말

도영(가명)을 만난 건 어느 토론회 자리에서다. 활동가나 여성학 연구자 같아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고 기자도 아닌 낯선 얼굴. 혹시 저분이 일하고 있는 20~30대라면 인터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다가갔다.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일 경험에 대해 인터뷰하는 중인데, 혹시 인터뷰가 가능하겠냐고 조심스레 묻자, 도영은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할 말 진짜 많죠."

'어디서 어떻게 일하는 걸까?'라는 물음이 드는 순간, 도영에게 건네받은 명함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대기업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들 취업하기 힘들다고 난리인 마당에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한 도영은 도대체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기에 일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바로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우리 회사는 여자가 승진이 안 된다. 알고 시작해라"

<미생>의 하대리(전석호 분)와 안영이(강소라 분).
 <미생>의 하대리(전석호 분)와 안영이(강소라 분).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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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하는 회사가 도영에게는 첫 직장이다. 말이 좋아 '인턴'이지 교육이나 경험은커녕 온갖 잡무만 다 담당하는 인턴 생활을 두 번 거친 후, 되는대로 몽땅 지원한 15개의 회사 중 딱 하나 붙은 곳이다. 그런데 5주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부서에 배치된 첫날부터 줄곧 도영은 '여자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제가 입사를 딱 하고 연수를 끝내고 이 부서에 처음 들어왔는데 차장이, 우리 차장은 아니고 옆 팀 차장인데 하는 말이 '우리 회사는 여자가 승진이 안 된다. 알고 시작해라.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런 말부터 했어요. 그거부터 저는 좀 충격이었죠.

그리고 그다음 회식을 갔는데 하는 말이, '원래 내가 널 안 받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네가 왔다. 원래 남직원을 원했다'는 얘기를 부장이 하더라고요. 왜 굳이 우리 회사에 여자가 들어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대놓고 말을 했어요."

"우리 회사가 너무 성차별적이고 부당한 게 많다 그랬더니, '그건 맞는 이야기인데, 앞으로도 안 바뀔 거다' 그러는 거예요."

도영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여주기도 전에 '여자'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했 다. '여자'라는 사실은 당장 도영이 바꿀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상사들이 던진 말은 회사와 일에 대한 기대를 꺾게 만든다. 첫 직장에서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조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대우를 받았다면, 앞으로 다른 직장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라 기대하기보다는 직장과 일에 대한 기대치 자체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상사들은 도영에게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된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도영을 회사에 잘 적응하고 '성장'하도록 도와야 할 신입사원이자 동료로 대하지 않고, 머지않아 결혼하고 그만둘 '여자'로 여기고 있다.

"맨날 회식 시간에 상사가 와서 '너는 아빠가 돈도 잘 벌고 그러는데 왜 굳이 회사 생활하냐, 살림이나 하면 됐지.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하니, 남자친구랑은 어떻게 지내?' 맨날 그렇게 꼬치꼬치 사생활 캐묻고."

한둘도 아니고 도영이 회사에서 접하는 많은 상사가 매일같이 도영에게 부정적인 말과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초반 3개월, 도영은 매일 울며 회사에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적응한 자신이 오히려 무섭다.

"여기 좀 이상한 데예요. 진짜 미쳤어요. 제가 초반 3개월 동안에 맨날 울었어요. 회사 가기 전에 울다가 가고... 지금은 사람이 또 신기하게 적응을 해서 다니는데, 저 자신이 무서워요.."

여자는 출장도 못 간다

'여자는 안 된다'는 말은 상사들이 그저 개인적인 편견에 기초해서 하는 '말'로 그치지 않았다. 도영이 다니는 회사는 '여직원'이 제대로 자리 잡기 어려운 형태로 굴러가고 있었다.

도영이 속한 파트는 해외영업팀이다. 해외 거래처와 소통하면서 수출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을 처리하는 것이 주 업무다. 영어를 잘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도영에게는 어쩌면 잘 맞는 업무일 것이다. 일은 만족스러우냐는 질문에 도영은 "사원인데 할 수 있는 게 많고, 너무 싫거나 무의미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할 만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더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빼앗기고 있었다.

영업의 핵심은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중간에서 일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도영에겐 자신이 속한 파트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습득해야 할 능력을 배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출장을 통해 거래처들과 직접 대면하며 소통하는 기회, 공장에 직접 가서 자신이 영업하는 물건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 알고, 자신이 중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도영이 자신의 업무에서 경험을 쌓는 데 핵심적인 일이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상사들은 도영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출장에는 여자를 안 데려갈 거래요. 그냥 자기는 여자가 출장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어떤 대리는 제가 공장에 가서 사람도 좀 만나면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왜 네가 굳이 가느냐. 여자가 가봤자 무슨 임팩트가 있느냐"며 막아서 못 갔어요."

직급이 낮은 여자들

성차별적인 직장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면 성희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평소 그냥 넘어가던 생각과 행동들,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직장 내 성희롱, 모두를 위한 안내서 평범한 용기> 중에서.
 성차별적인 직장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면 성희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평소 그냥 넘어가던 생각과 행동들,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직장 내 성희롱, 모두를 위한 안내서 평범한 용기> 중에서.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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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이 다니는 회사에는 여직원들만 따로 분리하여 운영하는 구조도 존재한다. 고졸, 전문대졸 여직원은 '5급 사원'으로 따로 구분되어, 20년을 일해도 승진이 불가능하고 연봉도 크게 오르지 않는다. 5급 사원으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20년 동안 사무만 해요. 승진도 안 되고, 무조건 5급. 이게 문제가 진짜 많아요. 부당한 승진 제한도 있고, 월급도 저보다 현저하게 낮고, 하는 일도 항상 사무로 정해져만 있어요. 대우도 안 좋고, 그런 직급이 있다는 게 참 웃기죠."

여자는 결혼하면 퇴직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 '여성 결혼퇴직제'가 적용되고, 은행권에선 '행원'과 '여행원'을 따로 뽑아 여행원에게는 별도의 임금과 승진체계를 적용하는 '여행원제'를 시행했던 1980년대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많은 기업에서는 여직원에게만 적용되는 직급이 따로 존재한다. 회사에서 보조 업무만을 담당하는 자리에 여직원만 배치하고 승진과 임금에 제한을 둔다는 이야기는 도영 이외에 다른 인터뷰이들에게서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여직원 비율이 너무 낮다

도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직원 수는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 즉, 도영이 20대의 젊은 신입 여직원으로 일하면서 겪는 고충을 공감하며 들어줄 사람이 회사 내에는 거의 없다. 도영이 매일 울면서 회사에 다닐 지경이라면, 분명히 도영이 "군대"라고 단언하는 남성 중심적인 회사의 분위기와 남자 상사들의 막말에 불편했을 여직원이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수가 적기 때문에 서로 눈치 보느라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팀이 1명은 여자가 있는데 그게 다 5급 아니면 계약직이에요. 그 외에는 거의 정규직 여자가 진짜 없어요. 비율이 3천 명 중 50명이에요. 참, 말도 안 되게 작죠."

"일단 너무너무 절대적으로 소수고, 여자들끼리 단합이 안 돼요. 그 안에서 서로 싫어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게 더 많지, 서로 소수자끼리 연대해서 힘을 내는 게 너무 없어서 저는 그게 되게 힘들어요."

그래도 도영은 가뭄에 콩 나듯 여자 직원들끼리 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행복하다고 한다. 도영에게 마초 같은 상사 욕을 같이 할 여자 동기, 팀 내에서 긍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멋진 여자 상사가 있었다면 도영은 좀 더 행복하게 회사에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시대가 어느 땐데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된다는 부장에게 여자 동료들과 함께 호되게 눈치를 줘서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같은 여자 직원들끼리 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가 한시적으로 있어요. 근데 자주 안 일어나요. 서로 눈치 보고 난리라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행복하고, 뭔가 다닐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진짜 뭐, 가뭄에 콩 나듯."

여성학적 관점을 갖고 공부하고 싶어

성평등복지포럼 "저출산을 질문하다" 여기서 도영을 처음 만나 인터뷰 요청을 하게되었다.
▲ 도영을 처음 만났던 곳 성평등복지포럼 "저출산을 질문하다" 여기서 도영을 처음 만나 인터뷰 요청을 하게되었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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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영은 대학원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해서 학자가 되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 준비에 나서자 '너무 범생이처럼 공부만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부랴부랴 준비해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도영은 다시 학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3년 차까지 버티면서 돈도 모으고 공부도 해서 대학원에 가는 게 목표다. 남성 중심적인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젠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3년까지 채우고 나갈 거예요. 그다음에 대학원을 갈 거예요. 지금 공부하고 있어요. 진짜 대학원에 안 가더라도 이 회사는 안 다닐 거예요. 제가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거기서 어떻게 해보면 했지 (...) 지금은 이 회사의 영향인 것 같은데 여성학을 하고 싶어요. 할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나마 도영에게 지금의 상황을 버티게 해주는 책과 희망이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 도영이 '세계적인 수준의 저서'를 써서 내 입을 딱 벌어지게 해준다면 참 좋겠다. 그런 날이 온다면 도영이 여성학으로 위로받았듯이, 도영의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버틸 힘을 얻는 여성들도 있을 테니까. 몇 년 뒤, 어느 토론회 자리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도영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30대 여성의 일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면 기억해두세요!

*정책토론회: 청년 노동, 말하는 대로 : 10/29 (목) 오후2시 장소 미정
20~30대 여성 20명의 일 경험 사례를 기반으로 청년 노동의 대안을 모색합니다. 진짜 대안을 함께 찾아봐요!

*11월 둘째주에 민우회가 만난 20~30대 여성 20명의 인터뷰를 담은 소책자가 발간됩니다. 기사보다 더 많은 내용이 담길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행사 안내
 한국여성민우회 행사 안내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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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정훈 기자


덧붙이는 글 | 류형림 시민기자는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일다(www.ildaro.com)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년, #노동, #민우회, #대기업 , #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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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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