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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오전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입장하던 중 정의당 의원들이 국정화 반대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오전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입장하던 중 정의당 의원들이 국정화 반대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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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도서관에서 2008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뉴라이트 역사책이구나. 바로 뽑아들어서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여러 주요 사건들의 명칭이었습니다.

5·16 군사혁명, 80년 광주사태라고 쓰여 있을 줄 알았고,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쿠데타, 민주화운동, 민중항쟁 등 모두 일반적인 표현으로 명기되어 있었고, 각 사안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생각보다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뒤로는 흥미를 잃고 대강 훑어보고 다시 꽂아넣었는데, 하나 기억나는 건 한 쪽을 전부 할애하여 박태준 전 국무총리를 서술해 놓았던 점이 이색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부분에 중점을 두고 오늘 글을 쓰고자 합니다.

4·19, 5·16, 5·18, 12·12, 1987년 6월은 모두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굽이굽이에 위치하여 절대적인 정통성을 가지는 대사건입니다. 어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현재 여당 지도부의 대다수는 이 시기에 민주화를 위해 몸바쳤던 사람들이지요. '혁명일선의 투사'였던 김문수와 이재오는 논외로 하더라도 김무성, 서청원, 이인제, 원유철, 김태호, 정병국 등등 현재 여당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권위주의의 시대에 상도동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른바 '민주계'입니다. 여권의 외연을 정·청까지 확대하더라도, 범민주계가 확실히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대통령을 제외하면 정통 관료, 법조인, 군 출신 정도일 것입니다.

어쨌든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주류인 이 정치계 인사들이 국정화 사업을 주도하는 것이 맞다면, 큰 줄기로서의 민주화 추동이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폄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산이 몇 번 바뀌니 기억이 미화되어 자유당과 유신 시절을 좋게 바라보고 싶을 수는 있어도, 힘에 맞섰던 자랑스러운 과거의 자신을 빨갱이라고 매도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쿠데타와 민중항쟁의 표기를 분명히 할 것이며 최소한의 비판은 반드시 할 것입니다. 즉, 주요 정치사에 대해서는 크게 손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5.16은 안 사라져도 전태일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과연 국정화로 버려지고 부정당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정부여당의 수뇌부가 자신들의 이미지 악화와 다가올 총선·대선의 악영향까지 감수해 가며 기어코 잘라내려는 부분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제가 볼 때는 바로 '민중'입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민주화 세력과 방향이 달랐거나 끈이 닿아있지 않았던 민중 세력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이념 전쟁의 극단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유족들이 있습니다. 보도연맹 사건, 제주 4·3, 노근리, 거창·산청·함양, 마산·창원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었던 엄혹한 시대가 불과 반세기 전에 있었지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억울함을 풀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민주화의 큰 물결에 함께하거나 힘있는 중앙 야권에 발을 대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노동운동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 전쟁과 군사정권기를 거치며 극한의 강도까지 담금질되어 온 반공의 이데올로기는 기득권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 노동 투쟁이 해서는 안 될 반국가 행위라고 각인 시켰습니다. 1987년에 형식상의 민주화를 이뤄낸 후에 석 달에 걸친 대투쟁을 벌였으나, 사회 전반의 공감대를 사지는 못했습니다. 공안 정국은 갈수록 단단해져 갔고, 힘들게 얻어낸 정권교체 후에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노동자들은 절벽을 마주한 것처럼 야속했습니다. 이들은 끝내 사회 주류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거죠.

끝내 힘의 중심에 접근하지 못한 이들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훨씬 더 많이 있을 겁니다. 이들은 힘없는 소수집단이면서 사회의 주요 관심사 밖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전통적 개념으로 본다면 여성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 등이 있을 것이고 현대적으로 확장한다면 아르바이트·비정규직,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읊어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제가 서두에 박태준 전 총리를 언급한 것은, 그것이 현재 교과서 국정화의 취지와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열심히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은 "현대사를 실패의 역사로 가르친다"와 "민중사관의 극복"입니다. 이들은 성공의 역사, 한강의 기적은 바로 박 전 총리같이 훌륭한 기업인들이 일궈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공은 엄연히 기업인들에게 있는데, 좌경화된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바짓가랑이나 붙잡는 기층민들에게 그 공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죠.

얼마 전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쇠파이프 노조만 없었어도 3만불 달성했다'라고 말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정치사회학적으로, 특히 한국사회에서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 돈을 많이 번 사람들, 높은 자리에 올라 힘을 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성장의 걸림돌로, 발전을 저해하는 짐짝으로 여기고 있다는 매우 명쾌한 예시인 것입니다.

왜 갑돌이와 갑순이의 역사는 없는 걸까

저의 짧은 생각이 맞다면, 저들은 국정화 교과서에 5·16을 쿠데타라고 적고 유신 헌법을 적절히 비판할 것이며 12·12의 불법성과 5월 광주의 학살적 측면을 충분히 써놓을 겁니다. 이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역사의 메인스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지금 '친일·독재 미화 시도가 있다면 내가 나서서 막겠다'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대신에,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요, 약자들의 이야기가 사라질 겁니다.

자신있게 추정컨대 4·3과 거창, 보도연맹에 관한 내용이 줄어들 것입니다. 대구 추수봉기가 사라지고 광주대단지 사건이 삭제될지 모릅니다. 전태일의 평화시장 이야기가 생략될지 모르고 아름다운 새마을운동의 뒤편에 강력한 저곡가 정책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슬쩍 넘어갈지 모르죠. 2008년 새벽의 숭례문 방화는 기록돼도 2009년 벽두의 용산 남일당은 안 실릴지 모르고, 평택 쌍용차를 비롯한 여러 사업장에서 해고되어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과 삼성을 위시한 여러 작업장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언컨대 없을 겁니다.

그 빈 공간에 바로 박태준과 이병철, 정주영과 이명박이 '성공의 역사'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잡겠죠. 저는 이들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살면서 저질렀던 과오와는 별개로, 그들이 보여줬던 발군의 경영 능력과 끈기, 투지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역사의 배타적 주인공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이 일반 민중을 짐짝으로, 걸림돌로 여기는 사상적 토대 위에 서술된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득 세력의 국정화 추진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사 연구는 그 근간을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두고 있습니다. 왕실과 조정의 공적 기록이기 때문에, 일반 민초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미시사'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학계에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중궁궐의 각종 비사와 관리들의 권력 투쟁은 이렇게도 자세한데, 갑돌이와 갑순이의 이야기는 도대체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정부여당이 국정화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주요 논리 중의 하나는 '긍정의 역사 확립'입니다. '나라에서 이러이러한 선정을 베풀어 민생이 안정되었다'는 식의 서술을 원하는 것으로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기좋은 내용만 남기고 갑돌이와 갑순이가 핍박받았던 이야기를 아예 잘라내려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올바른 교과서'가 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정부가 스스로 전근대적 왕조의 사고를 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미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립니다.


태그:#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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