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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의 절망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넘쳐납니다. 청년들이 참 할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린 것이 뭘 아느냐', '사회문제에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라는 '꼰대'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가 많습니다. '할많하않', 이 신조어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입니다. '할많하않'이 아닌, 할 말이 많으니 하겠다는 청년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김민섭씨는 '309동1201호'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가 대학원생 시절 살았던 집주소다. 그는 그곳이 젊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김민섭씨는 '309동1201호'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가 대학원생 시절 살았던 집주소다. 그는 그곳이 젊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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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일이 많았지만,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마주할 때면 항상..."

그는 차분하고 담담하다가도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강의실에서 하던 말을 전할 때는 다시 의연해졌다. 그는 대학을, 그곳의 사람을 여전히 사랑했다.

지난해부터 '오늘의 유머', <슬로우뉴스>, <직썰>에서 지방대 시간강사의 삶을 다룬 에세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연재한, 필명 '309동1201호' 김민섭(32)씨의 이야기다. 인터넷 연재 당시 누적 조회수 200만을 넘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지난 11월,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책이 발행되고 갓 한 달이 지난 12일, 김씨는 대학에서의 삶을 정리했다. 이제는 강의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간 숨겨왔던 이름과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대학 바깥에 더욱 큰 대학이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넷 연재 당시 누적 조회수 200만을 넘겼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지난 11월, 같은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인터넷 연재 당시 누적 조회수 200만을 넘겼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지난 11월, 같은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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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은 교수님, 사흘은 패스트푸드점 알바생

"대학의 맨얼굴은 괴물이었어요."

김씨는 지난 2010년부터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러면서 조교, 연구자, 시간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한 교수는, 누군가에게 조교인 그를 '잡일 돕는 아이'라고 소개했다.

김씨가 2013년부터 시간강사로 일하며 받은 돈은 연 1000만 원 남짓. 결혼할 때 아내에게 말했던 "처음 1년은 한 달에 80만 원을 생활비로 가져다줄 것이고, 그다음 1년은 100만 원을, 그다음은 기약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조금은 더 가져오겠다"는 소박한 약속조차 지키기 어려웠다.

결국 지난해 8월, 아이가 태어난 뒤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하는 생각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교수님, 사흘은 알바생으로 살았다.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최저시급을 챙겨준 것도, 아들의 돌잔치에 작은 성의를 보인 것도 대학이 아닌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그는 적어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었다. 패스트푸드점의 점장은 낯선 그에게 먼저 "놀이공원에 놀러 가자"고 했다. 반면 대학에선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듣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가 마주한 대학은 지식의 전당이기보다 기업이었고, '괴물'이었다.

"아직도 제 시급이 얼마였는지 몰라요.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이 하부 노동자에게 학문의 신성함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론 가혹하게 구는 것이 굉장히 모순적이죠. 지식을 만드는 공간보다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이 사람을 위하고 있구나... 물론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지만, 대학은 사회적 책무가 있잖아요."

그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가 "어떤 특정 대학, 대학원, 지도교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방대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경험을 기록하려 했는데, 쓰다 보니 모든 80·90년생 청년을 대변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지만, 모두가 힘들어요. 각자의 위치와 공간은 다르지만 비슷하죠. 결국 우리 시대 청춘의 이야기예요. 뒤돌아보면 '힐링'을 주도한 건 기성세대예요. 김난도 교수가 쓴 책 제목,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보면 화가 나더라고요.

기성세대는 노력, 그것도 그냥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한 세대이고, 청년은 노력하지 않은 세대라는 프레임이 생긴 거잖아요. 결국 기성세대가 자신을 위한 '힐링'을 한 거죠, 오랫동안."

김씨는 분하고 담담하다가도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강의실에서 하던 말을 전할 때는 다시 의연해졌다. 그는 대학을, 그곳의 사람을 여전히 사랑했다.
▲ 309동1201호, 김민섭씨 김씨는 분하고 담담하다가도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강의실에서 하던 말을 전할 때는 다시 의연해졌다. 그는 대학을, 그곳의 사람을 여전히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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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는 모든 청년의 이야기"

김씨에게 대학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오는 공간이다. 씁쓸하고, 서글픈 기억이 서려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대학에서 사람의 힘을 발견했다.

그는 학생들이 괴물이 된 대학을 역행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맡은 김씨는 "타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 타인을 여러분이 갑으로 존중할 수 있다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강의하는 것이 '아주 작은 돛단배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향해 홀로 출항하는 것' 같았지만, 학생들과 만나며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한 선배가 맡았던 수업이 갑작스레 폐강돼서 정말 아무 말도 못하고 생계를 잃었어요. 한 학생이 그 소식을 듣고 교무처로 가서 '이 수업을 듣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다, 책임질 것이냐'고 따졌대요. 교무처에서는 "모든 학생의 동의서를 받으면 강의를 살려 주겠다"고 했어요.

결국 학생들이 교무처에서 모든 학생의 전화번호를 받아 동의서를 써왔고, 선배는 다시 강의할 수 있게 됐어요. 학과장도, 지도교수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대학에는 오로지 학생만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아요."

김씨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누구나 정규직을 원하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며 "그러한 꿈을 이루기까지는 계속 대학에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대학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했다. 어느 학생은, 그런 김씨를 보며 "교수님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의를 처음 맡았을 때는 가르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강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부터는 가르치기 위해서 아니라, 배우기 위해 들어갔어요."

하지만 결국 김씨는 그가 사랑하던 공간을 나왔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가 단행본으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선배들이 그를 술자리에 불렀다. 그때 "왜 이 공간을 비리의 온상처럼 묘사했느냐, 감사를 받으면 어쩔 것이냐"는 원망의 말을 들었다. "(책 때문에) 대학 측에서 외압이 들어왔다면 오히려 기쁘게 버티며 여전히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라던 김씨는 "버틸 근거를 잃었다"고 했다.

"대학의 맨얼굴과 마주하면서 '내가 알던 대학이 아니고, 신성함과 숭고함으로 포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연구를 하고, 학생들과 마주하고 싶었는데..."

김씨는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1차적인 이유"이고, "글을 쓰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 대학을 나오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대학의 강의실과 연구실은 가치 있는 공간이지만, 대학 울타리 바깥에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제가 추구하던 제도권의 학위,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문학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 애썼는데, 내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김씨는 "삶을 증명해줄 사람은 나 자신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 나의 구원자, 학생들 김씨는 "삶을 증명해줄 사람은 나 자신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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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며 댓글로 등 두드려준 학생들 

담담하게 대학을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김씨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막막하고 겁도 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 번도 이런 용기를 낸 적 없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이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한 어조로 "행복하다"고 했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선 그의 옆에 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그만둔다는 글을 올리고 (SNS 페이지에) 학생들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때 잠깐 웃었어요. 계속 마음이 무거웠는데, 학생들이 들어왔을 때 큰 응원이 됐어요. 내 삶을 증명해줄 사람은 나 자신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이기도 해요. 학생들이 나에게 와서,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며 등을 두드려주는 느낌..."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날, 그는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사정으로 후배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오래도록 박수를 쳐줬다. 김씨에 앞서 대학을 떠난 한 선배는 <슬로우뉴스>에 올린 연재 글에 "고생 많았다, 나도 힘들었어"라는 댓글을 남겼다. 부모님은 김씨가 대학을 떠났다는 사실과 감춰뒀던 그간의 사정을 며칠 전에야 전해 들었다. 그들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김씨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부모님은 김씨가 대학을 떠났다는 사실과, 감춰뒀던 그간의 사정을 며칠 전에야 전해 들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 "떳떳하게 맞서거라" 부모님은 김씨가 대학을 떠났다는 사실과, 감춰뒀던 그간의 사정을 며칠 전에야 전해 들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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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자격을 정할 자격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힐링'하려는 게 아니라, 삶의 자기 결정은 자기가 해야 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누군가의 결정에 대해 관심 두지 않아요. 그리고 내게 가까운 사람들은 그 결정을 존중해주겠죠."

김씨는 한동안 글을 쓰며 살아볼 작정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는 다음 '스토리펀딩'에 글을 연재할 예정이다. 또 그는 "대학원에 들어와서 남이 쓴 소설을 열심히 보면서 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김씨가 학창시절부터 이어온 바람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랜 꿈에 닻을 내린 '과거 진행형'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연구자 시절 아주 오래된 잡지를 많이 봤다"며 "과거의 문화사와 그 시대를 재구성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천진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삶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생각이에요. 인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배움이 울타리 저 너머 대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에 있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요."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22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나는지방대시간강사다, #지방시, #김민섭,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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