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의 대호, 곽진석 영화 <대호>에서 호랑이 대역을 맡은 배우 곽진석이 1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대호'의 대호, 곽진석 영화 <대호>에서 호랑이 대역을 맡은 배우 곽진석. 1981년생으로 벌써 연기 경력 10년이 넘어가는 실력파다. 무술팀 액션배우, 여러 영화의 조연과 연극 무대를 거치는 등 쌓아온 경험도 풍부하다. ⓒ 이정민


조금이라도 드러나고 싶고, 작은 역할이라도 대중의 눈도장을 받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하지만 철저히 화면 뒤로 숨어야 했던 이가 있었다. 영화 <대호>의 호랑이 이야기다. 명포수 천만덕 역의 최민식이 시사회장에서 애타게 찾던 바로 그 '김대호' 말이다.

CG로 만들어낸 가상 캐릭터 아니냐고? 물론 그 자체는 기술이 집약된 상상의 산물이지만, 엄연하게 대역 배우가 존재했다. 바로 서울액션스쿨 8기 출신인 배우 곽진석이다.

짧은 대사 한 마디조차 없었다. 그저 상대 배우들의 감정선을 받아내기 위해 산자락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포효했을 뿐. 비중으로 치면 대호는 명실공히 영화의 주연 중에 주연이지만, 그 대역을 맡은 곽진석은 "나 혼자만의 이름이 아니"라며 대호라고 불리길 사양했다.

지난 1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의 성격을 고려해 개봉 이후인 이제야 그 이야기를 전한다.

철저히 자신을 지우다

 곽진석에서 대호로

▲ 곽진석에서 대호로 "철저히 날 지워야했다" 대역을 했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겠지만 배우 입장에서 자신을 지우는 건 또하나의 모험이다. 관객들은 배우의 이름이 아닌 캐릭터로 기억하는 법이니. 그럼에도 그는 호랑이 대역을 택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해보는 경험"이 그에겐 소중했기 때문이다. ⓒ NEW


우선 곽진석의 간단한 이력이다. 2004년 액션스쿨에 처음 들어가 무술팀 소속으로 일을 시작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5)을 시작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2005), 영화 <공공의 적2>(2005), <뚝방전설>(2006), <부당거래>(2010) 등 다수 작품에서 무술팀 및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렇다고 액션배우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연극 무대 또한 꾸준히 오르며 온전히 배우로서 자기 위치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아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를 '대호'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 일단 대호님. 반갑습니다. 아무래도 대중에겐 낯설테니 지면을 통해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이름과 키, 몸무게를 말하면 되나요? (수줍게) 안녕하세요. 오디션 보러 가서 연기로 승부하고픈 배우입니다. 단역을 하면 조연을 하고 싶고, 조연 하면 좀 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은 그런 배우죠. 말로는 더 못하겠네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몸으로 보이는 게 더 편하겠어요!"

- 영화를 보면 포수대 일원으로 잠깐 나오기도 합니다. 애초에 호랑이였나요, 사람이었나요?
"원래 포수대였어요. 그렇게 알고 준비하는데 며칠 뒤 연락이 왔죠. 호랑이 대역이 필요하다. 택일하라! 이렇게요. 두 말 할 거 없이 호랑이를 택했습니다."

- 왜죠?
"다들 아니라고 하지만, 솔직히 배역에도 크고 작음이 존재해요. 그간 작은 역할을 해왔는데, 대호는 달랐죠. 제가 언제 상업영화 전체를 꿰뚫는 역할을 해보겠어요. 얼굴 안 나와도 좋다! 이건 정말 중요한 경험이다! 생각한 거죠. 근데 허명행 감독님(<대호> 무술감독) 배려로 호랑이와 포수대 둘 다 할 수 있었죠."

- 그래서 대호가 된 것이군요. 그간 공개행사 등에 좀 나오시지 그랬어요. 최민식씨가 '대체 대호는 어딨냐'며 간절하게 찾기도 했는데.
"(웃음) 그런데 제가 대호라고 볼 순 없어요. 저 혼자 그 이름을 가질 수 없습니다. 대호는 저를 비롯한 여러 스태프 분들의 결과물이거든요. 엔딩크래딧을 보시면 제 역할은 '범'으로 나와요.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제가 모션 액팅을 했다고 아시는 분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대역이지 모션 액팅은 아니거든요. 그건(모션 액팅) 온 몸에 센서를 붙이고 움직임을 캡쳐하는 작업이라 좀 달라요. 대역은 일종의 배우들 가이드 역할에 그칩니다. 관객이 아닌 현장 배우들에게 신뢰를 주는 게 제 임무라고 할 수 있죠."

한국판 앤디 서키스의 가능성

 산군으로 추앙받는 대호는 울음소리 하나로 인간은 물론이고 산짐승까지 오금저리게 한다. 호랑이 대역의 곽진석은 "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당시 연기에 대해 말했다.

산군으로 추앙받는 대호는 울음소리 하나로 인간은 물론이고 산짐승까지 오금저리게 한다. 곽진석은 "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 사나이픽쳐스

- 그래도 단순 대역이라 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컴퓨터그래픽을 입히기 위해 옷도 파란 쫄쫄이? 이런 걸 택해야 했을 거고, 장소 헌팅 땐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지형을 파악했고, 캐릭터도 엄청 연구했다고 들었어요.
"쫄쫄이만 입기엔 너무 추워서...(웃음) 의상팀과 상의한 결과 위아래가 모두 파란 보드복을 입었어요. 아마 첫날 촬영 때 절 본 배우들이 의아했을 겁니다. 시퍼런 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니까요. 얼마나 웃기겠어요. 그래도 흔들리면 안 됩니다. 배우들의 연기를 받는 역인데 진지하게 했죠. 나중엔 한 스태프가 제게 '이젠 걸어오는 모습이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했을 정도였답니다. 헌팅 때야 제가 몸으로 연기할 장소니까 돌이 많은지 어떤 지형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요.

포효는 진짜 고민 많았어요. 실제 호랑이는 으르렁거리기만 해도 사람들 오금을 저리게 하는데 전 그렇지 못하잖아요. 처음엔 몸에서 풍기는 에너지를 주고 싶어서 몸으로 막 표현했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소리를 내고 다녔어요. 걸을 때도 호랑이 높이에 맞춰서 사족보행과 이족 보행의 중간으로 다녔고요. 나중엔 다들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곽진석을 보며 할리우드 배우 앤디 서키스를 떠올렸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골룸 역을 소화한 바로 그 사람이다. 영국 출신의 연극 배우였던 앤디 서키스는 <혹성탈줄> 시리즈, <고질라> 등에서 모션 액팅을 선보이며 해당 분야의 선구자로 부상했다. 실제로 그는 모션 캡쳐 스튜디오 이미지나리움의 설립자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곽진석도 앤대 서키스를 잘 알고 있었다.

- 대호 대역이라고 스스로 제한해서 표현했지만, 어쩌면 한국에서 전무했던 모션 캡쳐 연기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게임 쪽에선 꽤 그 경험이 풍부하다고 들었는데.
"이미 게임 쪽에선 많이들 절 찾아주시죠. 사실 저도 앤디 서키스를 보고 생각이 좀 바뀌긴 했어요. 배우를 계속 하면서 그런 쪽으로 접점이 생길 수 있잖아요. 내 장점이 있는데 굳이 반드시 인간 캐릭터만 하라는 법은 없고! 이걸 잘 살려 할리우드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언어 문제는 생기겠지만(웃음). 여튼 앤디 서키스의 영화들, 메이킹 필름 등 닥치는 대로 찾아보고 있어요. 새로운 경험을 꿈꾸면서."

- 충분히 한국의 호랑이로 어필하면 가능성이 있을 거 같은데요? <어벤져스2>에 한국인 캐릭터도 나왔는데, 동물이라고 못 나올 건 없죠. 할리우드로 간 호랑이 어때요?
"(웃음)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자신 있어요! 근데 물론 내 얼굴이 직접 나오는 게 좋긴 하죠. 게임 쪽에서 모션 액팅을 한 2004년부터 했으니 꽤 오래 한 셈이죠. <블레이드 앤 소울>, <레이븐> 등 아시는 분도 많을 거예요. 아, 골프 게임도 했어요. 스윙은 프로선수들의 모션을 캡쳐하지만, 타격 이후 리액션은 배우의 몫이거든요. 흥분해서 좋아한다거나, 아쉬워 한다거나, 그런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게 제 일이었죠."

몸 근육 넘어 연기 근육 만드는 중

'대호'의 대호, 곽진석 영화 <대호>에서 호랑이 대역을 맡은 배우 곽진석이 1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역 배우는 관객이 아닌 현장 스태프와 동료 배우를 설득시키는 것" <대호>를 하면서 그가 속에 품고 있던 지론이다. 푸른색 보드복을 입은 모습에 촬영 초반 현장에선 실소하는 스태프들도 있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어느새 호랑이가 되어 곽진석은 현장 일부분을 움켜쥐었다. ⓒ 이정민


- 모션 액팅 이전으로 돌아가 볼게요. 시작은 액션 배우잖아요. 본래 운동 좀 했나요?
"학창시절에 운동을 좋아했지만 엘리트 체육인도 아니었어요. 왜 이런 말 있잖아요. '좋아하는 건 취미로 둬라!' 들은 건 또 있어가지고(웃음). 그렇게 살다가 운동이 너무 하고 싶어 액션 스쿨에 들어갔고, 스턴트를 했죠. 그러다 재미가 없어져서 나오게 됐어요. 액션 스쿨 전엔 미용사였습니다. 낮엔 머리 자르고 밤엔 체육관 가서 샌드백 두드리며 살던... 액션 스쿨을 나온 후 이것저것 배우다가 연극을 하게 된 겁니다."

- 필모그래피를 보면 유독 류승완 감독, 정두홍 무술 감독과 인연이 많네요.
"별로 안 친한데?(웃음) 농담이고요. 툭툭 던지는 말로 애정을 표현하시는 분이 정두홍 감독님이에요. 욱해서 제가 대들기도 해요. <1번가의 기적>(2007) 때 역할 상 정두홍 감독님을 많이 때려야 했는데 엄청 뭐라 하셨어요. 세게 때리면 세다고 그러고, 약하게 때리면 제대로 하라고 하고(웃음). 류승완 감독님과 작업하면 좀 데 세밀하게 신경 써야 해요. 워낙 액션에 일가견이 있잖아요."

- 대부분 액션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주변 반대도 심했을 텐데.
"개의치 않았어요. 제 멋대로 살았거든요. 아버지가 반대 많이 했죠. 운동은 쳐 맞는다고 반대, 연기는 못 생겼다고 반대, 스턴트는 다친다고 반대! 오히려 연극했을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웃으셨어요. 연극하는 다른 친구들은 부모가 연기 자체를 반대하는데, 전 그보다 더한 걸 했으니 상대적으로 나아보였나 봐요(웃음). 어머니는 무한 지지자예요. 스턴트 하다가 양팔이 부러져서 3개월간 병원에 있었는데, 그때 아들 수발을 들어 주시면서도 절 믿어주셨어요.

부모님 생각하면 애틋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해 매번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정신적 지원이 사실 더 크죠. 교회에서 매일 아들 생각하며 기도해주시는데 그 에너지가 느껴져요. 잘 된다 믿는 사람과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면 잘 되는 거죠 뭐!"

- 누가 뭐라 해도 <대호>는 분명 걸음마 수준이었던 한국의 3D 캐릭터를 한 차원 높인 계기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예전엔 욕심을 경계했는데, 하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겨요. 특히 함께 나오는 배우들 연기를 볼 때 그렇죠. 힘을 잘 빼야겠죠? 최민식, 김상호, 정만식 선배들 보면 현장에 앉아 있는 거 자체가 진짜 연기더라고요. 예전엔 그게 안 보였거든요. 속으로 '운동 좀 하시지 배가 나무 나왔네' 이랬었는데... 정작 제가 더 자라야 하는 거였어요. 저도 지금 연기 근육을 키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다른 모습도 많이 보이면서 잘 키워갈게요!"

'대호'의 대호, 곽진석 영화 <대호>에서 호랑이 대역을 맡은 배우 곽진석이 1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향같은 서울액션스쿨을 찾아갈때마다 선배들은 그를 보고 "밥은 잘 먹고 다니니?"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곽진석은 "더 열심히 해서 걱정 안 끼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결심하곤 한다. 좋은 생각으로 좋은 기운을 나누며 그는 자기만의 영역을 굳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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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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