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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고소를 걱정하지 않고 뜨거운 물로 씻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때에 절어 꼬질꼬질한 내의와 양말, 트레킹 기간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않은 재킷과 바지를 갈아입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밤마다 뜨거운 물을 물통에 담아 침낭에 넣을 필요가 없으며, 입에 맞지 않은 메뉴를 보며 고민할 필요도 없고, 한밤중에 옷을 잔뜩 껴입고 머리에 헤드 랜턴을 켜고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와이파이로 세상과 연결하였습니다. 많은 소식 중, '부고'가 있습니다. 30년 전, 대학 신입생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선배입니다. 히말라야로 떠나기 전, 웃으면서 "잘 다녀와!"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이렇게 쉽게 8848미터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곳으로 갈지 몰랐습니다.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늦가을 낙엽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설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트레킹 마지막 날
안개 자욱한 마을 모습
▲ 남체 마을 안개 자욱한 마을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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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커튼을 여니 눈이 내렸으며 안개가 마을을 뒤덮고 있습니다. 남체(3440m)를 넉넉히 감싸고 있던 꽁데(6186m)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걱정이 앞섭니다. 기상이 악화되면 루클라(2840m)에서 항공기가 뜨지 않습니다. 공항에서 기약 없이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은 악몽입니다.

날씨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려는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는 머피의 법칙처럼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날씨가 변수로 등장하였습니다. 트레킹 기간 내내 짙푸른 하늘과 화사한 햇살이 우리를 반겼는데. 침울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하였습니다. 

트레킹 마지막 날입니다.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이륙한다면 내일 오전에 카트만두에 도착합니다. 루클라까지 이동하여 숙박을 하고 항공기를 타면 이십여 일의 트레킹이 끝납니다. 이제 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입니다. 세상에서는 히말라야가 그리웠지만 히말라야에서는 세상이 그립습니다. 

남체 상가 지역을 떠나며..
▲ 남체를 떠나며 남체 상가 지역을 떠나며..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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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으로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남체는 쿰부 히말라야의 중심입니다. 관공서와 군부대가 있으며 박물관과 학교도 있습니다. 약국, 베이커리, 커피숍, 슈퍼마켓 등이 있는 산중 도시입니다. 장날에는 멀리 티베트에서도 장꾼들이 히말라야를 넘어오며 등반대와 트레커들은 고소 적응과 물품 구입을 위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입니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 하산 하는 길 동네 주민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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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길, 잔설이 남아있으며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트레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배낭을 멘 네팔리들도 눈에 띕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산골 소녀들을 들뜨게 합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끊임없이 조잘대며 산을 내려가는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고도가 낮아질수록 누워있던 나무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합니다. 울창한 소나무와 잣나무 숲이 펼쳐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풀 한포기 자라기 어려운 황무지였는데. 자연은 자신의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것, 내가 가야할 곳을 아는 삶은 행복합니다.

쿰부에서 가장 높은 출렁다리
▲ 라르자 브릿지 쿰부에서 가장 높은 출렁다리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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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코시강과 보테코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출렁다리가 걸려있습니다. 라르자 브릿지(Larja Bridge)입니다. 남체로 향할 때에는 이곳부터 깔딱 고개가 시작되어 힘들었는데.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순간 현기증이 나서 난간을 잡습니다. 히말라야에서는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건너편 언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리를 건넙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고향으로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되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정겹습니다. 크고 작은 마을이 잇달아 있으며, 마을 어귀에는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 엄마는 물을 데워 아이를 씻기고, 젊은이들은 집을 짓는데 필요한 나무를 켜고 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옛날, 고향의 일상을 히말라야에서 만납니다. 

구슬치기 하는 동네 아이들 모습
▲ 아이들.. 구슬치기 하는 동네 아이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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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서 나무를 켜는 모습
▲ 나무 켜는 젊은이들 마을 어귀에서 나무를 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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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카르(2630m)의 찻집에서 영국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포터 한 명과 트레킹을 하고 있습니다. 65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섯 번째"라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불편한 히말라야를 넉넉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걷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모습에서 미래의 제 모습을 겹쳐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아름답지만,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한 삶입니다.'

65세, 혼자 걷는 트레커
▲ 영국 할아버지 65세, 혼자 걷는 트레커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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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딩(2610m)에서 루클라(2840m)까지는 오르막입니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열심히 걷지만 루클라는 멀기만 합니다. 트레킹이 끝나감에 따라 긴장감은 풀어졌고 정신력도 해이해졌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를 스쳐지나갑니다. 체력이 바닥이 나서 걷기가 어려울 때 쯤, 멀리 언덕 위에 아치형 출입문이 보입니다.

트레킹 첫날 묵었던 마을
▲ 팍딩 마을 트레킹 첫날 묵었던 마을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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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라, 트레킹의 시작이자 마무리...
▲ 드디어! 루클라에 루클라, 트레킹의 시작이자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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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라입니다. 드디어 이십 여일의 트레킹이 끝났습니다.


태그:#네팔, #히말라야, #쿰부, #루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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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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