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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전 이야기] 한달에 13만 원짜리 집, 제가 살아봤습니다
[내 세상은 잿빛 ①] 고시원 총무는 시체 썩는 냄새를 안다
[내 세상은 잿빛 ②] "401호는 자극하지마, 또 송장 치우기 싫어"

[지난 이야기: 대학 2학년 때, 나는 주거비용을 아끼려고 낮에 학교에 다니고 야간에는 고시원 총무 일을 한다. 주거빈곤 시설인 고시원에는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이들이 모여살지만, 외국의 슬럼가와 같은 연대와 저항은 구조적으로 막혀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고시원의 장기체납자였던 성훈(가명)씨의 방에서 악취가 스며나온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나는 비상키로 그의 방문을 열고 그가 숨져 있는 것을 보고 신고하지만, 형사와 원장은 성훈씨가 자살한 이유에는 무관심하고 유가족은 시신 인수를 거부한다. 결국 그는 장례조차 못 치르고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된다. 그후 나는 환멸감을 느끼다 고시원을 그만둔다.]

1. "이 언덕을 또 오르다니..."

이 언덕을 또 오르다니...
 이 언덕을 또 오르다니...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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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 고시촌 월 13만 원 고시원 방에서 나온지 약 3년, 구로시장 인근 고시원 야간 총무를 그만둔 지 약 2년이 흘렀다. 2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지난 1월 24일 또 고시촌으로 돌아왔다. 3년 전보다는 형편이 조금 좋아져 원룸을 얻을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월 40만 원짜리 하숙을 선택했다.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가 월~금 하루 3끼를 주고(일명 월식), 방은 1인당 최소주거기준인 14m²(4.235평)가 넘는다. 전기·수도·가스 등 다른 공과금은 없다. 물론 단점도 있다. 하숙집은 악명이 높은 고시촌 특유의 가파른 언덕 거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이삿날부터가 고통이었다. 지인이 내 짐을 차로 실어다주었지만, 하숙집 초입에 주차할 곳이 여의치 않았다. 주말이라 좁은 골목에 차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인은 조금 아래쪽에 주차를 했고 나는 부지런히 짐을 날라 올렸다. 책이 많다보니 반복 노동에 상당히 진이 빠졌다. 3년 전 겨울이 떠올라 "이 언덕을 또 오르다니..."하는 허무감도 들었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옮겨놓으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옮겨놓아야 하는 무한한 형벌을 그리스 신들로부터 받은 시지프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등장인물 시지프스가 받는 형벌.
 그리스 신화 속 등장인물 시지프스가 받는 형벌.
ⓒ free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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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는 왜 이런 형벌을 받게 됐을까. 우선 그리스 신들의 성격이 대체로 '지랄 맞다'는 건 잘 알려진 상식이다. 이들은 다른 종교의 신들처럼 나름의 원칙대로 세상을 주재하는 엄숙한 신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보다 '더 강한' 혈통과 특수 능력들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요즘 말로 신들이 상대적 '금수저'였다면 인간은 상대적 '흙수저'였던 셈이다.

그런데 금수저 신들은 꾀가 많았던 흙수저 시지프스가 아니꼬왔다. 시지프스는 남의 여식을 탐하는 신들의 수장 제우스의 추태나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폭로하고도, 신들의 복수를 요리조리 잘 피해다녔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일이지만, 제우스는 신들과 맞먹는 그가 짜증난다는 이유로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옮기는 '영원한 노가다형'에 처했다.

현대 사회에서 신들의 자리는 상위 1%의 인간이 대신하는데, 1%와 나머지 99%를 가르는 건 타고난 '재력'이다. 경제적 부정의와 갑질은 상위 1%의 특권이지만, 시지프스의 자리를 대신한 99%는 '평범한 삶'이라는 유토피아를 향해 그저 '노오오오오오…력'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자는, 이런 식의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이들의 꼰대성을 풍자하는 말투 만은 아니다. 그런 노력이 대부분 무의미하다는 뜻도 있다.

"시지프스의 노동이 무의미한 이유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과 노동의 무목적성 때문이다. 바위 굴리기라는 일에는 내적인 목적이 없다. 신들의 형벌을 집행한다는 외적인 목적은 있지만, 시지프스의 의지와는 무관한 목적일 뿐이다. 이러한 무목적성에 더하여 … 변화나 성장이 없이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지겨움, 외로움 등등이 결합돼 총체적인 무의미를 만들어낸다." - 이윤 <굿바이 카뮈> 중.

2. "내 집 마련? 당장 월세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구 신림9동) 고시촌 전경.
▲ 월세 큐브 서울 관악구 대학동(구 신림9동) 고시촌 전경.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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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2세 병현(가명)씨는 지난 1년 4개월 동안(2014.9~현재) 5번 이사를 다녔다. '고시원→친구 원룸→또 다른 고시원→또 다른 친구 원룸'으로 짐을 옮겼고, 현재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신림동에 보증금 300만 원, 월세 42만 원짜리 원룸을 얻어 혼자 산다. 주거비는 관리비를 합하면 48만 원, 전기·가스비까지 합하면 월 50만 원이다.

보증금은 한국장학재단에서 생활비대출을 한 학기에 150만 원씩 받아, 2학기 분을 모아 겨우 마련했다. 생활비는 알바로 충당한다. 일정 기간은 돈을 벌고, 다시 학교에 복학하는 식이다. 학교 다닐 때 알바 시간을 따로 빼지 못 하는 이유는 학업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형편이 좋아 학교를 쭉 다니는 학생들에 비해 졸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관같은 고시원"이 싫어서 1인당 최소주거기준 14m²가 조금 넘는 원룸으로 옮겼지만, 주거비가 부담돼 한국주택공사(LH)의 '대학생 전세임대주택'을 신청했다. LH측은 신청자의 소득 수준을 심사해 선정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2분위와 3분위를 가르는 핵심은 집과 차를 소유했는지 여부이다. 울산에 계신 부모님의 24평짜리 집은(공시지가가 5천만 원이 조금 넘는다) 병현씨를 포함한 5인 가족의 유일한 재산이다.

집이 공시지가가 5천만 원 이상일 경우 3분위로 떨어지므로, 그가 기대하는 '이전과 좀 다른' 6번째 이사는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주거 복지 규모가 그에게 먼 이유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 전세금이라도 필요할텐데, 돈이 모이겠느냐"라고 묻자, 그는 "당장 몇달 후에 월세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십 수년 후의 집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자신은 '월세-월세-월세…'만 전전하는 "월세 유목민"이라는 것이다.

유목민의 삶에는 종종 해볼 만한 '도전'이란 게 가능하지만, 계속 집주인에게 월세를 가져다내고 이삿짐을 옮기는 처지의 그는 '월세 시지프스'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의 말처럼, "노력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때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목표는 학교 근처에 한 번 살아보는 것"이지만 "이를 실현할 만한 임금과 임대료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3. 언덕 위에서 불화살을 쏘자

내가 최근에 이사온 방. 이삿짐을 나르던 중 사진을 찍어봤다. 그래도 이전에 있었던 방들보다는 괜찮은 편이다.
▲ 내 방 내가 최근에 이사온 방. 이삿짐을 나르던 중 사진을 찍어봤다. 그래도 이전에 있었던 방들보다는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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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 성훈씨와 20대 초반 병현씨의 이야기는, 정도는 차이가 있을 망정 모두 '과연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끈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옮기는 시지프스처럼, 또 고시촌으로 이삿짐을 옮겨온 내 삶도 결국 어떤 의미도 생산해내지 못 하는 무의미한 삶이 아닐까? 최소한의 경제적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이것이 가볍게 무시되는 세상의 간극은 부조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살아야하지?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즉 자살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답변은 좀 독특하다.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사람들 앞에는 자살, 희망, 반항이라는 선택지가 놓인다. 카뮈는 최종적으로 '반항'을 택한다. 자살과 희망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는, 좀 더 상식적인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비합리성으로 가득찬 세계에게도 있지 않다.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이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은 의식의 끈을 고의로 놓아버림으로써 부조리에서 회피한다. 하지만 카뮈는 부조리를 회피하지 말고 '응시'하길 제안한다. 나 자신이 당장 현실의 부조리를 단번에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의식은 하지만, 회피하지말고 반항한다면 삶이 의미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카뮈에게는 '희망 고문' 역시 회피에 불과하다. 부조리의 또 다른 요소인 '현실 세계'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가령 종교는 현실 세계의 저편, 즉 피안의 세계를 상정한다. 물론 종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종교가 현실을 잠식하는 광신(狂信)으로 흐를 때가 문제다. 가령 박정희 향수에 도취된 이들은 현실과 핀트가 안 맞는 과거(권위주의 산업화)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그 기념사업에 1900억 원을 들여 상징물을 영속화·우상화한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고독사로 죽어나가고, 많은 아이들이 밥을 굶는다. 광신도들이 부조리를 회피할 수록, 현실의 부조리는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결국 자살과 희망 고문은 부조리를 '회피'함으로써, 삶의 현실적인 의미를 찾을 기회를 잠식시킨다.

부정적인 허무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태도를 극단적으로 일반화하려 든다면, 자살이나 혼자 만의 믿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삶은 허무하다→게다가 '모든'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부조리가 없어진다면 허무함은 사라진다→부조리가 없어지려면 모든 인간은 다 죽거나 광신도가 되어야 한다... 즉 학살과 파시즘이라는 무시무시한 결말에 이른다.

낯익고도, 화살쏘기 좋은 풍경이다.
▲ 고시촌 전경 낯익고도, 화살쏘기 좋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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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허무주의자 카뮈는 사람들 각자가 부조리를 느끼고 또 반항하는 수준에 따라 삶의 의미를 얻을 수도 있다고 본다. 흥미롭게도 카뮈는 고통받는 시지프스를 도리어 '반항의 신'으로 재탄생시킨다. 시지프스는 부조리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기 때문에 부조리를 더 잘 응시하고, 또 더 잘 반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지프스가 악전고투 끝에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는 그 '간발의 순간'이라도 자부심과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벌을 주려고 했던 신들에 대한 '반항'이 된다. 벌이란 고통을 주려고 주는 것인데, 시지프스가 행복을 느낀다면 신들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약간 '정신승리'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조리를 그런 식으로 응시하고 약간의 반항을 한들, 어쨌든 바위는 지금도 굴러 떨어지고 있고 사람들의 삶은 계속 고통받지 않는가? 그것은 시지프스 혼자만의 자위일 뿐이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람은 모두 죽는다. 죽음이라는 회피할 수 없는 가능성 앞에서, 여태까지 말했던 모든 내용은 없던 일이 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삶은 종말에 이른다.

그렇다면 카뮈와 시지프스가 그렇게도 안간힘을 쓰며, 부조리에 '반항'하려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을까? 간발의 비극적 행복이 아니라면, 인생에는 어떤 행복도 가능하지 않다. 자살과 희망 고문으로 부조리를 회피하고 삶의 의미도 포기할 것인가. 부조리에 반항하며 간발의 삶의 의미라도 찾고, 다음 사람들에게 그 바통을 넘길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시촌에 오를 때마다, 세상이 조금은 더 잘 보인다는 점이다. <오마이뉴스>에서는 글을 기고하는 행위를 '불화살을 쏘아올린다'고 비유한다. 나는 우선 평지에서 취재를 한 뒤 여기에 올라올 때마다 현실의 부조리들을 겨냥해 '불화살'을 쏘아올릴 작정이다. 세상이 나를 청년(靑年)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내 세상은 결코 푸르지(靑) 않다. 내 세상은 차라리 잿빛이다. 나의 불화살 한 발, 한 발로 부조리들을 계속 잿가루로 만들고 싶다.

(연재 끝)

덧붙이는 글 | <시지프의 신화>(알베르 카뮈 / 문예출판사 / 1991 / 9000원)
<알베르 카뮈>(유기환 / 살림 / 2004 / 4800원)
<굿바이 카뮈>(이윤 / 필로소픽 / 2012 / 1만2500원)



태그:#헬조선, #시지프스,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월세 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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