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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소설 <최선의 삶>은 팟캐스트를 듣다 어느 평론가의 추천을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최선의 삶이라…. 최고의 삶은 기대하기 어려울지언정 최선의 삶을 누군들 살고 싶지 않겠어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 삶에 대한 또 하나의 통찰을 얻게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소설은 한 출판사의 대학 소설상 수상작이더라구요. 수상작들은 대게 수상소감과 심사평이 실려 있기 마련이죠. 때로는 소설보다 이런 수상소감이나 심사평을 먼저 읽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먼저 예고편을 보는 기분으로요.

작가의 악몽을 받아 쓴 소설

그런데 이번엔 예고편을 본 후 조금 겁을 먹었더랬습니다. 수상 소감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어요.

"이 소설은 열여섯 살 때부터 10년 이상 꾼 악몽을 받아쓴 것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거죠. 하지만 경험만 늘어놓는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자 임솔아는 "경험과 소설이 연인처럼 깍지를 꼭" 끼도록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이 소설과 함께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소설가를 쫓아다니던 악몽이 발아해 세상에 나온 소설. 누군가의 악몽을 바라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한 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이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 얼마나 슬프고 아픈 내용이 실려있길래, 이러한 것들을 경험한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겁이 든 만큼 호기심이 강하게 발동했습니다. 그렇게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며 누군가의 악몽 속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졸지에 가장 가난한 아이가 된 강이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상상은 그 끝이 없는 것 같죠. 무한하다는 인상까지 줍니다. 하지만 상상이라고 해봤자 대게 한 개인의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긴 힘들 겁니다. 머리를 짜내고 짜내도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한 사람의 삶을 완벽히 상상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내 상상 밖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넘치고 넙칩니다. 그러니 상상보다는 현실이 더 무한하다고 볼 수 있겠죠.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강이'라는 아이의 삶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작 열여섯,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강이가 겪어야 했던 일들도 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집이 아닌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게 꿈인 아이. 이 꿈을 이룬 후라야 진짜 꿈을 꿀 수 있을 거라 믿는 아이. "집 나가면 병신같이 살아야 하잖아"라는 친구 소영이의 말에 꿈을 '병신'으로 삼은 아이. 친구와 가출을 할 때도 마치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다는 듯이 담담히 "아람은 집이 싫어서, 나는 밖이 좋아서 우리는 함께 집을 나갔다"라고  말하는 아이. 내 상상 밖에 있던 이 아이는 대전 읍내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읍내동에 사는 강이는 읍내동이 아닌 전민동에 있는 전민중학교에 다닙니다. "읍내동에 살지만 읍내동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던 부모가 강이를 전민동으로 위장전입시켰기 때문입니다. 읍내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거든요. 이런 연유로 강이는 졸지에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가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성장 소설의 특별할 것 없는 시작입니다. 뒤이어 아이는 자존심이 상하겠고, 가출 이야기가 나오겠고, 왕따 이야기가 나오겠고, 학교 폭력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이 소설의 주 이야기도 가출, 왕따, 학교폭력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 속엔 강이가 있다는 것이 다른 소설과 다릅니다. 강이뿐만 아니라 아저씨들이 있고, 접촉이 있고, 잔인한 승리가 있고, 살의가 있다는 것이 다른 소설과 다릅니다. 무서울 정도로 디테일해서 불안하고 불편한 강이의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 있었습니다.

"가출 청소년은 샤프심처럼 힘이 없었다. 쉽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아저씨가 손을 올리고 고개가 돌아갈 때 땅이 휙휙 돌아가는 횟수를 셌다. 땅이 마구 흔들려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주었다. 아저씨에게서 우리를 구해주는 사람 역시 길거리의 모르는 아저씨였다."(<최선의 삶> 중에서)

강이는 가출을 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다 또 가출을 해 3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죠. 다시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해서 강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강이의 꿈은 집에서 멀어지는 것. 강이를 행복하게 해줄 만한 것이 집에는 없습니다. 학교에도 없고요. 엄마는 그저 기도뿐이며, 아빠는 무심할 뿐입니다. 선생님들은 강이를 싫어합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나빠진 사람들

그래도 결국 집으로 돌아온 강이. 그리고 강이의 마지막 선택. 저는 강이의 마지막 선택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랬어야만 했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강이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최선의 삶> 중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서 더 나빠져야 했다는 말. 그리고 이게 최선이었다는 말. 저는 '최선'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이전엔 몰랐습니다. 그동안 제게 최선이란, 더 나아지기 위해 더 좋아지려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나빠져야 했고,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마음으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 머리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생각해봤습니다. 저자는 왜, 그게 최선이라고 했을까. 생각을 하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수상 소감과 심사평을 읽고 그 뒤에 나온 저자 인터뷰도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머리로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수상소감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나는 나의 악몽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 세상에 최선을 다한 헤어짐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나와 나의 악몽은 이제 최선을 다한 헤어짐을 겪게 되었다, 다행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나빠져야 했다는 건, 악몽과 헤어지기 위해, 지금의 이 끔찍한 현실과 헤어지기 위해, 그게 나쁜 행동이라도 어쩔 수 없이 그 행동을 취해야 했었다는 걸 말하는 것이라고요.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일 테지요. 우리로썬 좋든, 나쁘든 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나아지기 위해선 이길 밖에 없을 테니까요.

인터뷰에서 저자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와 비슷한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저자는 어쩌면 그 아이들에게 너희의 삶도 최선의 삶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어느 누구의 삶도 결코 최악의 삶일 리는 없다고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덧붙이는 글 | <최선의 삶>(임솔아/문학동네/2015년 07월 17일/1만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 게재합니다



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문학동네(2015)


태그:#임솔아, #최선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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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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