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 현장. 박소담 스페셜.

▲ 위험한 숲 뱀파이어 일라이(박소담)가 있는 숲은 위험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숲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 곽우신


자작나무가 가득한 눈 내린 겨울 숲. 하얗게 깔린 바닥 위로 무수히 많은 하얀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스산한 느낌이 드는 이곳, 어른은 갈 수 있어도 아이는 갈 수 없단다.

"사건은 숲에서 발생했습니다. 숲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거꾸로 매달려 피가 뽑혔다. 어떤 사람은 목덜미가 물어 뜯겼다. 어머니도, 경찰도 오스카에게 말한다. "숲에는 가지 마라"고.

하지만, 오스카는 숲에 가고 싶다. 숲에 가야 한다. 어른들이 숲에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자신에게는 숲밖에 없다. 숲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복수하는 꿈도 꾸고, 혼자 루빅스 큐브도 맞추며 놀 수 있는 공간이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안녕?"

옆집으로 이사 온 그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그녀만이 오스카를 위로한다. 이제 오스카는 누군가로부터 달아나려고 숲으로 향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그의 유일한 친구, 그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소녀 일라이를 만나기 위해.

[숲] "안녕"하고 만나는 그곳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 루빅스 큐브 오스카와 일라이의 첫 대면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인사 그리고 루빅스 큐브를 통해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숲은 이렇게 만남이 발생하는 광장이다. ⓒ 곽우신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은 동명의 원작소설보다는 영화(스웨덴판)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스크린을 무대에 옮긴 작품은 아니다. 존 티파니 연출은 전작인 뮤지컬 <원스>에서 같은 이야기의 영화 <원스>와는 다른 매력을 어떻게 무대에 풀어낼 수 있는지 잘 보여준 바 있다. 연극 <렛미인> 역시 영화 <렛미인>과는 다른 맛이 있다.

대극장 연극이지만, 넓은 무대를 화려한 무대장치로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대의 가로등 빛은 처연하고, 여백의 공간감은 주인공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쉽게끔 돕는다. 단조로우면서 깊은 맛이 있던 예술영화 <렛미인>은 풍성하고 강렬한 맛의 연극 <렛미인>으로 탈바꿈했다. 배경과 조명의 톤은 뱀파이어 일라이가 마시는 붉은 피를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오도록 한다. 여기에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이 더해지며 극의 분위기를 영화와는 전혀 다른 색감으로 끌고 간다.

무브먼트 등 그의 새로운 시도가 낯설 수 있고, 속도감보다는 공간감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극의 진행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연극의 문법과는 다른 '신선함'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 현장. 박소담 스페셜.

▲ 피를 마시는 일라이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 현장. 일라이(박소담)가 굶주린 끝에 숲에서 사람을 습격해 피를 빨고 있다. 박소담은 리나 레안데르손(스웨덴판 <렛미인>의 이엘리)만큼 신비로우면서 클로이 모레츠(할리우드판 <렛미인>의 애비)만큼 매혹적인 일라이를 소화한다. ⓒ 곽우신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 오스카의 분노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에서 오스카(오승훈)가 나무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존 티파니가 내세운 '무브먼트'는 다소 실험적이지만, 동시에 이채롭다. 오스카는 달아나기 위해 숲으로 떠났지만, 이후 만남을 위해 숲으로 향한다. ⓒ 곽우신


무엇보다 영화와 달리 연극은 '숲'이라는 공간을 강조하면서, 오스카와 일라이의 성장담을 미려하게 풀어낸다. 연출 존 티파니가 프레스콜 현장에서 말한 것처럼, 동화 속 아이들은 숲을 통과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그랬고, <빨간 망토>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소녀는 숲으로 향해서 숲 안에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숲을 나온다. 헨젤과 그레텔은 마녀를 물리쳤고, 빨간 망토는 늑대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오스카와 일라이는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런데 이 소녀, 뭔가 묘하다. 자신이 "여자아이"가 아니란다. 뭔가 말투고 고루하고, 몸에서 이상한 냄새도 난다. 돈도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다. 옆집에 이사 온 그녀는 숲에서만 그것도 밤에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녀가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으니까. 그녀와 있으면 외롭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다. 일방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뿐이다. 어머니와 헤어진 아버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 가끔 오스카가 찾아오는 건 괜찮지만, 함께 사는 건 부담스러워 한다. 학교 친구들은 자신을 돼지라고 놀리며 심하게 괴롭힌다. 그나마 체육 선생님 정도가 따뜻하게 대해주지만, 모든 학생을 책임져야 하는 그는 오스카를 세심히 살피지 못한다. 결국, 오스카가 숲으로 향한 건 외로웠기 때문이다.

[방] "나 들어가도 돼?" 두드리고 받아들이는 곳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 "나 들어가도 돼?"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일라이 역의 박소담이 오스카에게 다가가기 전 허락을 구하고 있다. 상대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의 내밀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상대의 양해를 구하는 것. <렛미인>은 결국 '관계'를 말하는 동화이다. ⓒ 곽우신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 바나나 맛 캔디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에서 일라이(이은지)가 오스카(오승훈)이 준 바나나 맛 사탕을 먹어보고 있다. 이은지 일라이의 디테일과 박소담 일라이의 디테일을 비교해보는 것도 극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물론 오스카 역의 안승균과 오승훈도 마찬가지. ⓒ 곽우신


<렛미인>에서 방은 일종의 밀실이다. 일라이는 오스카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묻는다.

"오스카, 나 들어가도 돼?"

일라이는 오스카의 허락 없이 상대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 상대의 밀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장, 숲에서의 관계가 사전에 있어야 한다. 위험하고 때로는 상처 입기도 하지만, 숲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없으니까. 오스카가 숲에서 일라이와 "안녕"하고 처음 나눈 인사.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됐기에, 오스카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스카는 일라이와 숲에서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방과 후 체력단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자기주장도 조금은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는 애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

광장에서 성장하는 건 오스카만이 아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주는 것에는 서툰 일라이.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었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았던 그녀가 자신이 먹을 수 없는 바나나 맛 캔디를 억지로 먹어보기도 하고, 위기 상황에서 오스카를 구해주기도 한다.

[애어른] <렛미인>, 현대인을 위한 동화

오스카와 일라이 지난 1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낮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 오른 배우 박소담과 안승균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일라이와 오스카는 새로운 곳을 향해 숲을 나와 떠났다. 오스카가 하칸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 둘은 관계에 대해 이해하며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까.

▲ 오스카와 일라이 지난 1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낮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 오른 배우 박소담과 안승균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극의 마지막,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오스카와 일라이의 끝이 하칸와 일라이처럼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숲에서 서로를 만나기 전과 숲을 나와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그들은 분명 다른 존재니까. ⓒ 곽우신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렛미인>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 "나랑 사귈래?" 오스카는 일라이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일라이가 자신의 애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관계의 명명일 뿐 그 이외의 부가적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라이가 오스카의 고백을 받아주고, 하칸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 곽우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저 노화에 지나지 않는다. 노화와 성장은 다른 종류의 개념어이다. 뱀파이어 일라이는 몇백 년을 살아왔지만, 오스카를 만나기 전까지는 외견처럼 그 속내 역시 아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일라이의 조력자 하칸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위해 반평생을 헌신한 그는 노쇠한 몸에도 불구하고 열렬하게 일라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일라이를 사랑하면서, 그녀와의 잠자리를 원했다. 그녀에게 사랑을 되돌려 받기를 원했다. 왜 자신이 아니라 오스카와 친하게 지내느냐며 역정을 낸다.

나이만 들고 어른이 되지 못한 게 비단 하칸 뿐일까. 침대 속으로 들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무한정 풀어놓는 오스카의 엄마도, 적당히 체스로 비위만 맞춰주며 아들의 감정을 외면하는 오스카의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연극 <렛미인>은 성장하지 못한 채 늙어만 가는 수많은 애어른을 위한 "현대인의 동화"(존 티파니 연출)이다. 이 겨울이 완전히 끝나기 전,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한 편이 아직 애어른인 당신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아직 숲에서 나오지 못했다.

연극 <렛미인> 포스터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렛미인>이 오는 28일 겨울의 끝과 함께 막을 내린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지만, 기존의 연극과 조금은 다른 매력의 이 작품은 분명 한 번쯤 볼 만한 가치가 있다.

▲ 연극 <렛미인> 포스터 지난 1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렛미인>이 오는 28일 겨울의 끝과 함께 막을 내린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지만, 기존의 연극과 조금은 다른 매력의 이 작품은 분명 한 번쯤 볼 만한 가치가 있다.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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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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