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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제1관문
▲ 주흘관 문경새재 제1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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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다'는 성삼(性三)재,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미시령(彌時嶺), '남쪽에 높은 고개'라는 남태령(南泰嶺), '밤에는 소들을 끌고 넘을 수 없다'는 우금(牛禁)티 등등... 우리땅은 산이 많은 만큼 그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개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재', '령', '치(티)'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우고개'처럼 그냥 '고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넘는 이들의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겠지요. 이렇듯 고개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의 사랑 이야기부터 귀신에 홀린 이야기까지... 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고개를 하나 소개합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 좁은 바위굴에서 미사를 드렸다. 탐방로에서 좀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 기도굴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 좁은 바위굴에서 미사를 드렸다. 탐방로에서 좀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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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운의 꿈을 안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 됩니다. 제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해발 1102m인 성삼재나 826m인 미시령 앞에서 높이를 말한다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겠지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습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런데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바위라고 불렀다.
▲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런데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바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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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령과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왜군들이 상륙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 명은 파죽지세로 북상합니다. 그러다 조령을 앞에 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당시 조령 앞에서 주춤했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와가 지휘하는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숨 고르기를 한 건 조령의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 일본군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험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니시유키나와는 수차례에 걸쳐 조령을 정찰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 험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신립이었는데 그는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령이 험준한 골짜기라면 탄금대는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잘 아실 겁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백병전까지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건 승산이 없는 게임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왜 신립 장군은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신립하면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는데...

제2관문 조곡관. 임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인, 1594년에 만들어졌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조곡교다.
▲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임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인, 1594년에 만들어졌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조곡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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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유는 기병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들이 보병 위주였기에 기병의 말발굽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한데다 신립 자신이 기병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문제였습니다. 산 중에서 진을 치다보면 시야가 가려질 테고, 그 틈을 타 병사들이 탈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인 당시의 조선군이기에 산악보다는 개활지에서 진을 쳐야 그나마 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4월 26일, 고니시유키나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령을 넘었고, 탄금대에서 조선 육군을 격파합니다. 탄금대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5월 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합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일본군들의 북상을 막았다면 어땠을까요?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패삼아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시각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이라는데 의병에 참여한 이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농민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같은 오합지졸인데도 후자쪽은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오합지졸을 '승리의 용사'로 만드는 것도 장수의 책무라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문경새재 트레킹을 하다보면 그런 가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더군요. 이 고지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저쪽에서는 매복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조령 방어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으로 병력을 배치해보는 것도 문경새재 트레킹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새재에는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조령원 터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조령원 새재에는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조령원 터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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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경새재에 방어시설이 들어선 건 1594년의 일입니다. 충주 사람 신충원의 건의로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 숙종대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세 개의 관문은 각기 다른 멋이 있습니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넓고 평평한 터에 세워져 있어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성문이라고 합니다.

산 중 깊은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은 조곡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앞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죠. 조곡관의 계곡물은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만큼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인 것처럼 아름다운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관문인 조령관은 조령 정상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외적 방비를 위해서 세워진 관문들이지만 딱히 그 기능대로 쓰인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 관문들 덕택에 다른 고개들보다 문경새재는 더 안전해졌지요. 시험 징크스 때문에 고집한 것도 있지만 다른 고개들보다 새재가 더 안전했기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문경으로 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제3관문인 조령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을 향해 있다.
▲ 조령관 제3관문인 조령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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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봄에는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기를!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에 대한 논란 등등...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나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올 봄에는 문경(聞慶)이라는 말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뜻한 봄날에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문경새재를 한들한들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경새재는 초보자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수 정도로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들한들거리며 거닐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봄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처럼요.

제1관문 주흘관. 사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수구가 보인다.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사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수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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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킹 정보

1. 코스: 수옥정관광단지(괴산군) ▶ 제3관문 ▶ 제2관문 ▶ 제1관문 ▶ 옛길박물관 ▶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2. 이동거리: 약 9km

3. 소요시간: 3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교통편: 수옥정관광단지는 수안보(충주)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 시외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수안보에서 수옥정관광단지까지는 7km 정도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하루에 4편 밖에 없다. 택시를 타면 1만 원 정도가 든다.

5. TIP: 트레킹 종료점을 문경방면으로 한 것은 편의성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옥정에서 수안보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편뿐이다. 이에 비해 문경새재 입구에서 문경읍까지 가는 버스는 20분마다 있다. 또한 수안보는 터미널이 독립된 건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상 정류장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문경터미널은 아담한 독립 건물로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태그:#문경새재, #조령, #탄금대,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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