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걸> 포스터. 에디 레드메인은 이 영화를 통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대니쉬 걸> 포스터. 에디 레드메인은 이 영화를 통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 UPI 코리아


"에디 레드메인 최고의 연기였다."

지난해 아카데미에서 스티븐 호킹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에드 레드메인에게 쏟아진 찬사였다. 불과 1년 전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통해 그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에드 레드메인이 이번엔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받은 에이나르 역을 맡았다. 영화는 아직 '트랜스 젠더'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20세기 초반 용기 있는 에이나르의 선택을 추적한다. 전시된 그림 속 피사체(Subject)가 아닌, 프레임 밖 주체(Project)를 선택한 에이나르의 삶. 그는 규정된 성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자아를 개척하기로 한다.

그림 속 피사체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에이나르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에이나르 ⓒ UPI 코리아


에이나르와 게르다는 화가 부부이다. 둘 모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남편 에이나르의 재능이 부인보다 조금 낫다. 시샘이 날만도 하지만 게르다는 남편을 지지한다. 남편의 그림이 전시되는 축하연에 게르다는 남편 옆을 지켜주며 축하해 준다. 남편 역시도 부인을 도와준다. 평소 인물 그림을 자주 그리던 부인의 그림 속 피사체가 도착하지 않았던 그 날. 남편은 그 역을 대신해준다. 비록 그 역할이 드레스를 입은 여자일지라도 말이다.

바지를 걷은 맨다리 위로 피부색 스타킹이 신겨지고, 구두를 벗은 맨발에 화려하게 장식된 여성구두가 덮인다. 그리고 가슴이 파인 드레스가 에이나르의 넥타이를 가린다. 처음으로 에이나르가 자신의 여성성을 깨닫는 장면. 그는 그렇게 그림 속 피사체가 되어가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는 더는 남자 에이나르가 아닌 여자 릴리였다. 물론 이를 표현하는 에드 레드메인의 연기는 압권이다.

문제는 사각형의 액자 프레임에 릴리를 가둘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게르다의 그림 속에서만 일어나는 사소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릴리는 점차 에이나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화장하고, 가발을 쓰고, 드레스를 입고 에이나르는 자신의 남성성을 지워나갔다. 게르다의 그림 속 릴리가 늘어날수록 현실의 릴리도 커져만 갔다. 릴리가 거대해질수록 게르다의 남편 에이나르는 사라져만 갔다. 급기야 에이나르는 여장을 하고 자신의 부인 몰래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기까지 한다.

정신병으로 치환된 릴리의 세계

 수술 후 부부

수술 후 부부 ⓒ UPI 코리아


에이나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릴리만이 진짜였다. 그리고 이것은 에이나르만의 관념이 아니었다.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한 부인 게르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관념도 상상도 아닌 실제 이야기였다. 설사 자신의 남편을 잃을 수 있어도 게르다는 남편 에이나르가 주체성을 찾아가도록 지지한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달랐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저술하듯, 당시 에이나르의 성정체성은 사회부적응이자 격리 수용될 대상이었다. 그가 병원을 찾아가자 의사가 내린 처방은 다름아닌 정신착란이었다. 릴리라는 성정체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워버리려는 방사능 치료와 격리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시선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가 하이힐을 신고 파리를 걷자 외간남자가 그에게 시비를 건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가격당하는 에이나르. 그렇지만 릴리는 사라질 수 없었다. 그것은 치료될 수 있는 무언가도, 비이성적인 광기도 아니었다. 릴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본연이었다.

그림 밖으로 걸어나간 에이나르 부부

 주연배우 에디 레드메인(왼쪽)과 감독 톰 후퍼

주연배우 에디 레드메인(왼쪽)과 감독 톰 후퍼 ⓒ UPI 코리아


사회적 핍박 속에서도 에이나르 부부는 꿋꿋이 릴리를 지지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지만 트랜스젠더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간다. 사회적 관념이라는 사각형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힘차게 걸어나간다. 너무나도 위험한 게임이지만 에이나르 부부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연히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난 에이나르 베게너 부부. 바르네크로스 교수는 처음으로 릴리를 정신질환이 아닌 실제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전환 수술을 권유한다. 일련의 사례를 통해 에이나르와 같은 남자들을 연구하고 있었던 바르네크로스 교수는 에이나르에게 릴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단 한 번도 시도된 적도 없고, 실패 위험성도 많은 수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이지만 에이나르는 고민 없이 릴리를 선택하기로 한다. 물론 이는 단순하게 에이나르 혼자만의 분투는 아니다. 그의 부인이자 동반자인 게르다의 도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둘의 고민과 이야기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전반부가 여성성에 눈을 뜨는 에이나르의 이야기였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남편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게르다의 이야기다. 비록 남편이란 존재는 잃지만, 인생의 동반자로서 게르다는 에이나르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다.

성전환 수술을 통해 생리학적으로도 이제 진짜 릴리로 거듭나는 에이나르. 하지만 결국 그는 수술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한다. 첫 수술 다음 해 눈을 감는 에이나르.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했지만, 이것은 인류사에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 한 부부의 용기 있는 분투였다.

평생 에이나르가 그렸던 풍경 속으로 직접 찾아간 게르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 지금까지 남편의 그림 속에서만 보았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람이 불자 자신의 남편이 건네준 '릴리의 스카프'가 그녀의 목에서 떠나간다. 그것을 잡지 않고 가만히 떠나보내는 게르다가 말한다.

"Let it fly"

 게르다 부부

게르다 부부 ⓒ UPI 코리아


영화는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시도한 인간의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그림 속 피사체가 아닌 주체로 사는 삶을 선택한 한 인간의 용감한 이야기이자, 그(녀)를 지지했던 영원한 동반자의 삶에 관한 영화다.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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