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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45분 어김없이 방송이 흘러나온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말씀 드립니다. 주민들이 층간 소음에 대한 민원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저녁시간에는 피아노, 세탁기, 청소기를 가급적 자제해주시고,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는 매트를 꼭 깔아주시고, 아이들이 심하게 뛰지 못하도록 교육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말씀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내용이다. 최근 들어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해, 층간소음으로 욱해서 저지른 가스 폭발 사고 등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층간 소음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국가소음정보시스템에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까지 개설했다. 이 모든 것들이 층간소음 사태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사실 나도 층간소음의 피해자다. 위층에 사는 아이들이 오후 11시까지 뛰어놀고, 9시 이후에 돌리는 청소기 소리에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승강기에서 만나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는 이웃이지만 '소음 공격'을 당하는 순간은 위층에 올라가 볼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왜 밤에 청소기를 돌리는지, 왜 피아노를 치는지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제는 밤 10시에 잠 들지 못하고 위층에 올라갈 요량으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두리번 거리다 책장 앞으로 갔다. 잠에서 깼으니 책을 보자는 심산이었다. 며칠 전 박성우 시인의 <창문 엽서>라는 책을 구했다. 읽지 않고 있다 그제서야 펼쳐 들었다.

박성우. <창문엽서>. 창비. 2015
 박성우. <창문엽서>. 창비. 2015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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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창문에 걸쳐 있는 연둣빛 담쟁이는 소음 공격에 시달린 내 마음을 풀어준다. 쪽을 넘기면서 시골스런 사진이 나오기 시작한다.

군대 '사진병'이었다는 박성우 시인의 특기를 살린 사진들이다. 책을 덮기 전에 시골스러운 사진이 아니라 사람 냄새 풍기는 사진이었음을 깨닫는다.

책은 전북 정읍 자두나무 정류장을 입구로 하는 산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간 극장'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인물들도 아닌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산내 마을도 방송이 있다.

"아아,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침 여섯시도 되지 않아 마을 방송이 나왔다. 백중을 맞이하여 마을 꽃길 가꾸기 울력을 할 터이니 남자들은 예초기를 들고 나오고 여자들은 호미를 들고 나오라는 이잠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꽃길 가꾸기를 마친 뒤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밥도 같이 먹고 술도 나눠 마실 터이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여섯시 반까지 나오란다.(p. 28)

내동떡 도산떡 각골떡 제실떡 남안떡 가춘떡 등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는 백중날 울력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부럽다. 떡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어르신들과 함께 '모시개 떡'을 만들어 먹는 풍경을 글과 사진으로 풀어낸 정취는 그윽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갑선, 온겸이네, 종화성 등 마을 사람들의 현재에서 과거까지 알아가며 사진찍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떠올리니 '착해빠지고 게으르고 심심한'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다. 라디오에 '라삐'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점, 애정이 드러나는 '라삐, 안녕!'도 눈에 띈다.

어제는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라삐와 함께 옥수수를 심었다. 꼭 먹으려는 것은 아니고, 옥수수의 시원시원한 초록을 늦게까지 느끼고 싶은 욕심에 텃밭에도 심고 마당가에도 심고 뒤란에도 심었다. (p.75)

전동차를 타고 달리는 미래의 시인 동한이, 열 살 소년 가윤이, 행복해서 행복한 재원이네, 첫사랑에 성공한 병희씨, 엄동설한에 이웃 할매 집 수도배관을 수리하는 산내면 청년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소음 공격'으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막 퍼부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는데, 뜻밖의 엽서들이 내 마음을 풀어주었다.

어떤 이는 참 시답잖은 내용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 사는 이야기다. 당장 한 지붕 밑에 사는 아파트 사람들의 이름조차, 하는 일조차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바쁘고 응어리진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책이다.

<창문 엽서>를 읽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한가로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학교 밖으로 나선 시인, 그의 진심이 묻어 있는 책을 발견했다. 시, 사람, 심지어 사물까지 사랑하는 이의 글을 읽고 있자니 내 귀에 소음도 아름답게 변한다.

오늘 아침 승강기에서 만난 4층의 예강, 예원이의 웃음을 처음 본다.


박성우 시인의 창문 엽서

박성우 글.사진, 창비(2015)


태그:#창문 엽서 , #박성우,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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