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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없는 사회는 없다. 지난 25일, 학벌 불평등 해소를 위한 시민 모임 '학벌없는사회'의 마지막 총회가 열렸다. 마지막 총회. 후원자들, 회원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학벌없는사회'는 한국 사회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곳이었다.

학벌이라는 것, 권력획득 수단으로 전락한 학벌, 대학 평준화에 대한 주장과 시장주의 교육권력에 대한 비판. 모두 '학벌없는사회'가 한국 교육계에 던진 의미 있는 물음들이었다. 그 물음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학벌없는사회'는 해산을 선언하고 작별을 고했다.

'학벌없는사회' 이철호 대표는 '학벌없는사회를 해산하며'라는 글에서 시민모임 학벌없는사회가 왜 진정한 학벌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해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속 아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학벌 사회와 대학서열 체제, 학벌을 통한 신분 대물림과 학벌이 만들어 낸 보편적 적대관계. 이는 여전하지만,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뜻이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같은 학벌이라는 심리적 연결도 끊어 내 버리고 모두를 파편화하고 있다. 노동 자체가 해체되어 가는 불안은 같은 학벌이라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조차 소멸시켰다. 학벌 사회는 교육에서 비롯하지만 그 본질은 사회 권력의 독점에 있다. 그러나 자본의 독점이 더 지배적인 2016년 지금은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 - '학벌없는 사회를 해산하며'

"학벌사회는 여전히 교육문제의 질곡으로 자리하고 있으나,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게 '학벌없는사회'가 해산하는 이유였다. 학벌이 해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학벌은 여전히 많은 사람을 고통에 몰아넣고 있지만, 학벌의 중요성은 (높은 학력을 지닌 사람에게도) 오히려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벌없는사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감추기 어렵다. 학벌없는사회는 오랜 기간 한국사회의 폐부를 찔러 왔고, 여전히 학력 차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학벌없는사회는 사라졌지만, 학벌없는사회가 남긴 것들과, 그동안 던져 왔던 질문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그동안 학벌없는사회의 활동과 역사를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학벌 사회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2일 오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소속 회원들이 입시경쟁과 학벌사회를 비판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가방끈으로 사람 차별하는 사회 거부한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2일 오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소속 회원들이 입시경쟁과 학벌사회를 비판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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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없는사회가 '학벌'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 학벌이라는 것 자체를 많은 사람이 인식하지 못했다. 1998년 학벌없는사회의 출범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덕분에 대학 내에서 더 이상 학문이 재생산되기 어려운 풍토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대학 교수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명문대 학생들은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것 자체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낮은 학벌의 대학생들은 높은 간판을 위해 편입을 준비하거나 국가고시에 매달렸다. 대학교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학벌없는사회가 학벌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학벌은 그저 '노력을 통해 얻은 것' 정도로만 인식됐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 형편과 학벌에 따라 교육기회는 불평등하게 제공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노력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해 버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학벌은 차별이라는 인식. 현재의 '금수저-흙수저' 담론 역시 학벌없는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대학평준화

학벌 사회를 해체하는 방법으로 '대학 평준화'를 처음 제시한 것 역시 학벌없는사회였다. 5.31 교육개혁을 통해 공교육 시스템은 시장주의 교육으로 바뀌었고, 교육은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교실은 붕괴됐고, 공교육은 파탄났다.

사교육비는 빠르게 치솟았고, 상층과 하층의 격차는 심화되었다. 그 중심에는 서울대를 비롯해 '학벌 서열' 최정상에 선 대학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서열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로 대표된다. 이는 교육력, 연구력과는 무관하게 입시성적으로 줄 세운 결과였다.

대학입시를 통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 그리고 그 승자를 부모의 재산이 만드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거의 유일한 해법이 바로 대학 평준화였다.

'영어 과몰입' 교육에 대한 비판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는 말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을 '제2의 청계천'으로 내세웠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는 말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을 '제2의 청계천'으로 내세웠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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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는 말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을 '제2의 청계천'으로 내세웠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영어전용교사 2만3천 명을 계약직으로 뽑겠다고 했다.

그 대상은 테솔(TESOL) 등 국내외 영어교육 과정을 이수하거나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영어교사 자격제도' 때문에 영어교사가 되려면 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학생들도 학교의 '영어 과몰입'을 따라잡기 위해 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학벌없는사회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고등학교 졸업자가 영어회화를 하게 된다 해도 대학입시는 여전할 것이고, 사교육비 역시 여전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계급'일 수밖에 없다.

해외에 자주 갈 수 있는 이들, 유학을 갈 수 있는 이들, 어렸을 때부터 영어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다. 이것 또한 '문화 구별짓기'라는 것이 학벌없는사회의 설명이다.

월례토론회와 학교 밖 배움터

학벌없는사회는 아주 오랜 기간 '월례토론회'를 열어왔다. 토론의 주제는 다양했다. 대안 교육과 그 지형에 대해서 토론했다. 또한 북유럽의 교육제도와 쿠바·독일 교육의 변화에 대해서, 덴마크의 교육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때로는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대해서, 대학 체제를 개편하는 방법에 대해서, 학교 바깥의 학교에 관해서 토론하고 연구하고 공부해왔다.

또한 학벌없는사회는 '학교 밖 배움터'를 운영하며, 학교를 그만두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교육 당국은 탈학교 청소년들을 '학업 중단자'라고 불러왔지만 학업이 아니라 학교를 중단했을 뿐이라는 게 학벌없는사회의 이야기였다. 또한 학벌없는사회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체제 바깥에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배움터'를 만들어 인문학 교실을 열고, 지역과 연계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짧은 글에 학벌없는사회의 활동과 역사를 모두 다 담아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학벌없는사회가 시도한 18년간의 도전은 끝나지만, 이를 결코 실패라고 말할 수 없고, 새로운 싸움을 위한 발판으로 봐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철호 학벌없는사회 대표는 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학벌없는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자본의 독점과 노동의 불안, 그로 인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타자로만 남아 소멸되어 가는 개인들, 존재하나 보이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과의 연대의 길을 찾아 떠나려 한다."

학벌없는사회의 활동은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끝'은 아닐 것이다. 이철호 대표의 말처럼 "학벌 사회를 깨뜨리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지속되고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벌 없는 사회를 향한 다른 운동이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태그:#학벌없는사회, #학벌, #고졸, #차별, #학력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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