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열여섯 번째로 <논픽션 다이어리>의 정윤석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포스터. 영화는 연쇄살인범 지존파를 비롯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연달아 추적하고 관련 인물을 만나는 구성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했다.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포스터. 영화는 연쇄살인범 지존파를 비롯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연달아 추적하고 관련 인물을 만나는 구성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했다. ⓒ 정윤석


서병수 시장님께

안녕하세요. 시장님.
저는 <논픽션 다이어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한 정윤석이라고 합니다.

처음 부산 국제영화제 사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 망설임의 이유가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이 없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입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글을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장님께 보내는 이 편지를 제가 소중히 간직해왔던 영화제의 추억들로 나열하진 않겠습니다. 저의 작은 무용담들은 이번 사태의 크기에 비춰볼 때 너무나 작은 단편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시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많은 언론에서 <다이빙벨> 상영에 대한 외압이 이번 사태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절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시장님 또한 세월호와 그 유가족들에 대한 마음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싼 언론 보도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달라보이지만 같았던 세 장면들

 영화 <다이빙벨>의 한 장면.

영화 <다이빙벨>의 한 장면. ⓒ 시네마달


# 1.
"(영화를) 다 보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그건 영화가 아니라고 본다."

시장님께선 어떻게 <다이빙벨>을 다 보지도 않고서도 이것이 영화가 아니란 걸 알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혹시 시장님의 발언은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인용한 패러디가 아니었을까요? 마그리트의 작품처럼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영화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질문을 유도하는 시장님의 발언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궁예의 관심법과 같은 시장님의 발언은 현대 영화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여기서 그 논리적 단계를 재현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 : 앞서 언급한 기사에서 시장님께서 언급하신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두 번째 질문 : 첫 번째 질문을 뺀 나머지 영화들은 과연 '영화'인가?

세 번째 질문 : 만약 두 번째에 해당하는 영화가 다른 모든 영화제에서 초청을 거절당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네 번째 질문 : 서병수 시장님께서 직접 영화제를 만들었는데 관객들이 그걸 끝까지 보지도 않고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영화는 '영화'인 것인가?

다섯 번째 질문 : (없음)

여섯 번째 질문 : 나는 왜 영화를 만드는 것인가?

# 2.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것을 상영하는 것은 정치적 논란을 낳고 여론을 분열시킬 수 있어 상영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현재 많은 영화인들이 시장님을 "부도덕하고 편향된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님의 인터뷰 발언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언제나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부디 저의 의도를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시장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사실(Fact)의 여부를 다시 질문하는 것은 결국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다시 질문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처럼 모든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화두인 '사실(Fact)의 양가성에 대한 윤리'를 지적하신 시장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음모론이라 폄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시장님의 의도를 윤리적으로 다시 재현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 : 시장님께서 기사에서 언급하신 사실은 과연 '사실'일까?

두 번째 질문 : 만약 첫 번째 질문의 그 사실이 '사실'이라면 시장님이 판단하는 거짓들 역시 '거짓'인가?

세 번째 질문 : 만약 두 번째 질문의 사실을 거짓이라 말씀하신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사실'들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네 번째 질문 : 만약 세 번째 질문의 사실을 다시 "거짓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시장님의 '사실'은 사실과 거짓 중 어느 쪽에 가까운 걸까?

다섯 번째 질문 : (없음)

여섯 번째 질문 : 사람들은 왜 사실을 요구할까?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한 장면.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한 장면. ⓒ 정윤석


# 3.
"세월호는 우리 부산의 구석구석에 도사려 있다."

저의 첫 장편인 <논픽션 다이어리>는 2014년 개봉 당시 세월호 사건과 비교하며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한국사회를 예언한 것 같은 영화로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컨대 연출자로서 이러한 언론보도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제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20년 뒤 세월호로 귀결되는 역사의 반복으로 독해될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봉 일주일 뒤, 저는 영화에 등장하는 성수대교 사고 유가족 중 한 분의 통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핸드폰 너머 들리는 그 분의 목소리는 아마 무척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상기된 목소리에는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는 자제력이 느껴졌고, 그 차분함 속에 깊은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비록 분노의 방향은 저를 향해있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은 비밀처럼 들렸습니다.

그분과 통화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하던 언니가 갑자기 죽어서 돌아왔는데 왜 꼭 그 때 다리가 무너져야 했는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자기 아버지를 자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언론도 싫고, 이제 가족들은 세월호 뉴스도 안 본다"며 "왜 다들 우리를 기억하려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가족 분과의 통화는 마치 과거를 통해 미래를 엿보는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통화 말미에 알게 된 저와 동갑이었다는 사실에 20년 뒤에도 숨죽여 지낼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위정자와 예술가의 궁극적 목적을 묻습니다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 부산국제영화제


시장님. 저는 이 글을 쓰기위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위의 사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진 속 시장님은 레드카펫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예술의 화려함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시장님처럼 레드카펫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상자의 얼떨떨함과 동시에 제 영화가 과대평가 되어버렸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레드카펫에 올라갈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시장님. 저는 그 때 왜 그 곳에서 도망쳤을까요?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은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고 자기 삶의 모순을 직면하려 노력합니다. 저는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고, 동시에 이것을 "아름답다"라고 표기한다고 배웠습니다. 결국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것일텐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아름다움을 의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리고 제 삶의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여전히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것인데, 아름다움에 대한 도전이 아닌 죄책감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다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수대교 유가족분의 통화 중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다짐은 "꼭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도록 지키겠습니다"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이빙벨>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들이 시장님께서 말씀하신 사실들과 과연 무엇이 달랐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배 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시장님 말씀대로 굳이 사실 여부를 따져야 한다면, 그 질문은 "왜 국가가 수백 명의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했나?"가 아니라 "수백명의 사람들이 살려달라며 죽어갈 때 왜 우리는 침묵했었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이빙벨>의 영화적 의미는 해답이 아닌 시작이었고, 진실이 아닌 질문이었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술가의 궁극적 목표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듯이 위정자의 윤리는 부끄러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제 영화는 언제나 이 세상의 아름다움 대신 부끄러움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왔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도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더 이상 죄책감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을 그릴 수 있게 된다면 그 때 꼭 시장님께서 제 영화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시장님과 함께하는 그 자리가 부산국제영화제라면 더욱 더 기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윤석 드림.

정윤석 감독은 누구?

1981년생인 정윤석 감독은 단편 <그를 찾아서>(2008), <별들의 고향>(2010) 등으로 국내외 영화제의 초청을 받아왔다. 7인의 감독과 함께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 Jam Docu 강정 >으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당시 작품은 최우수 작품상 격인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했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① 백재호] 부산시민 여러분, 부디 부산국제영화제 지켜주세요
[② 이승원] 누가 BIFF라는 오아시스를 소유하려 하는가
[③ 이근우] "저는 이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 낼 거예요"
[④ 조창호] 서병수 시장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한 장의 사진
[⑤ 박석영] 저는 믿습니다, BIFF 키워온 부산 시민들을

[⑥ 이돈구]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기적이다
[⑦ 박홍민] 영화제 제1명제: 초청되는 영화에는 성역이 없다
[⑧ 지하진] 영화 속 유령들까지 부산영화제를 지킬 것이다
[⑨ 이광국] 부산시장님, 많이 외로우시죠?
[⑩ 김대환] 많이 아픈 부산국제영화제야, 내가 너무 미안해

[⑪ 김진도] 부산 뒷골목, 노숙자 같은 남자가 세계적 거장이었다
[⑫ 김진황] BIFF에 대한 믿음,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⑬ 서은영] 자부산심 : 우리는 부산을 가졌다는 자부심
[⑭ 김태용] 해외영화인들이 계속 묻는다 "BIFF는 괜찮아요?"
[⑮ 홍석재] 영화제는 꿈! 꿈은 결코 당신 마음대로 꿀 수 없다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부산국제영화제 정윤석 논픽션 다이어리 BIFF 서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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