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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 드라마 <대박> 속의 숙종(최민수 분)은 상당히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이전 사극들에서 나온 숙종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 드라마 속의 숙종이 남성미를 좀 지나치게 풍기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처럼 강력한 이미지는 실록 속의 숙종과 상당히 일치하는 편이다.  

숙종을 부인들한테 휘둘린 왕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것은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에 불과하다. 소설 주인공인 유연수(유한림)는 첫 번째 부인인 정숙한 사씨를 버리고, 두 번째 부인인 교활한 교씨를 맞아들였다가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

 

그런 유연수의 이미지가, 기존 왕비인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장희빈을 새로 맞이한 숙종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숙종이 대중적으로 나약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지지한 서인당의 입장에서 보면, 숙종은 유연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인당과 그 후예들이 조선 후기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므로, 숙종의 이미지가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우리가 모르는 숙종

 
 
<대박>의 숙종(최민수 분). SBS
 <대박>의 숙종(최민수 분). SBS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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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살아생전의 숙종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의 숙종은 아주 강력한 군주였다. 이 점은 그가 죽은 지 7일 뒤 2품 이상 대신들이 모여 숙종이란 묘호를 제정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묘호는 죽은 임금을 사당에 모실 때 부여할 목적으로 제정하는 칭호다.

 

음력으로 경종 즉위년 6월 15일자(양력 1720년 7월 19일자) <경종실록>에 따르면, 2품 이상 대신들은 숙종의 이미지를 '강직하고 덕스럽고 승부 기질이 강하며 진취적인 군주'로 정리했다. 2품 이상 대신들은 숙종을 가장 가까이서 접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정리했던 것이다.

 

그런 숙종(肅宗)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요약한 글자가 바로 '숙'이다. 엄숙할 '숙'이 들어간 숙종이란 묘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점은 죽기 직전까지의 숙종이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는 죽기 전뿐만 아니라 임금 자리에 오를 때도 존재했다. 1674년 왕이 될 당시 숙종은 열네 살이었다. 이 나이에 등극한 왕은 일반적으로 18세가 될 때까지 대비의 수렴청정(대리통치)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숙종은 예외적으로 수렴청정 없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했다. 열네 살이란 나이에 이미 강력한 군주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송시열 화상.
 송시열 화상.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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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서인당의 영원한 총재이자 정치 9단인 송시열을 다룬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숙종 즉위 당시, 송시열은 68세였다. 송시열은 어린 군주의 기를 꺾고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려 했지만, 열네 살의 숙종은 노회한 송시열을 정치적 코너로 몰다가 이듬해인 1675년에 가서는 그를 귀양지로 보내버렸다. 이것은 송시열 인생에서 최초의 귀양이었다. 15년 뒤, 송시열은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숙종에게 도전했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숙종의 왕권은 사망 당시나 즉위 직후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내에도 항상 강력했다.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환국이란 국면 전환 혹은 정권교체를 일으켜 소수당인 남인당과 다수당인 서인당이 번갈아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단순히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의 손을 들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선거에 개입해 선거의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었다.

 

숙종시대에 나타난 '환국'이란 정치현상은 이전 임금들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숙종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숙종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객관적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첫째는 안정된 국제정세였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 동아시아는 그 이전 200년보다 훨씬 더 평화로웠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서 새로 출현한 무신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는 내부적인 실력양성에 매진했다. 이들에게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만한 힘이 없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약해지다가 여진족의 청나라가 새로운 주인이 됐다. 여진족은 중국을 정복하기 전만 해도 조선한테 까칠하게 대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은 지금의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서 조선 임금 인조한테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다.

 

하지만 막상 중국을 정복한 뒤에는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만주에 있을 때와는 달리 중국 중원을 차지한 뒤로는, 조선 말고도 상대해야 할 나라들이 많았다. 이런 조건에서 동쪽의 조선을 자극했다가 전쟁이라도 나게 되면, 북쪽·서쪽·남쪽에서 불의의 침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1644년 중국을 정복한 이후의 청나라는 대(對)조선 관계에서 안정과 협력을 추구했다.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에 있다.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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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국제적 안정을 추구하고 조선 왕실과의 협력을 강화함에 따라, 17·18세기 조선에서는 왕권이 안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조선·중국·일본 3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 19세기 중반에 서양이 아편전쟁을 일으키기까지는 질서를 깨려는 움직임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동아시아에는 질서를 깨려는 세력이 많았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했고 왜구는 동아시아 해역을 끊임없이 교란했다. 그래서 패권국 명나라는 항상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이전 2백년간에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그 2백년간을 태평성대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이후 2백년간은 그때보다 훨씬 더 평화로웠다. 청나라의 패권에 뚜렷하게 도전하는 나라도 없었고, 해적 피해도 이전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동아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청나라에서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의 번영과 융성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숙종을 비롯한 조선의 왕들도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당파 간 균형이었다. 1623년 인조 쿠데타(이른바 인조반정)를 계기로 광해군의 여당인 북인당이 몰락하면서 조선 정계는 서인당과 남인당의 양당 체제로 재편됐다. 이 구도 속에서는, 서인당이 다수당이고 남인당이 소수당이면서도 서인당의 독재가 억제되고 양당 간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런 균형이 가능했던 것은 서인당의 독주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조와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전복한 세력은 정계의 비주류이거나 재야 유생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쿠데타에는 성공했지만, 단독으로 정권을 운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인조 정권은 소수당인 남인당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인조 이후의 정권에서는 남인당과 서인당의 공존이 가능했다.

 

이런 공존 시스템 위에서 임금들은 어느 한편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각 당파와의 협력을 골고루 추구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중립자의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씨 왕들은 '친이(李)'나 '진이'의 왕이 아니라, 나라 전체 혹은 정치권 전체의 왕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각 당파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군주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내외적 요인에 힘입어 왕권이 강화되는 양상이 숙종 시대에도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열네 살의 나이로 등극했는데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 위상이 죽을 때까지 유지됐기 때문에 숙종이란 묘호도 생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숙종은 드라마 <대박> 속의 숙종처럼 백성과 신하들 앞에서 무게를 좀 잡아도 됐던 것이다.
 

태그:#대박,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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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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