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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이 훨씬 지났다. 2014년 2월 세 모녀가 석촌동 지하방에서 자살한 사건 말이다. 그들은 현금 70만 원과 함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메모로 남겼다. 문화비평가 권경우는 이들의 순수함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들은 '착한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약자들이자 착한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인면수심의 반대는 쉽게 상상이 간다. 부끄러움 없는 일부 강한 자들.

최근 권경우의 책 <착한 사람들의 나쁜 사회>(생각의 힘, 2016. 4)가 출간됐다. 권경우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착한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는 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없다기보다는 박탈당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뺏겼다. 그래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드는 질문, 착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인데, 왜 그 사회는 나쁘기만 한 것일까.

착한 사람들은 결국, 나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존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권경우는 "우리 사회는 이 아이러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생존을 위협받는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의 흐름이나 구조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순수한 대중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경우는 분명 그럴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순수함이란 무엇이고, 착하게만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되짚어봐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죄를 뒤집어 쓸 수 있는 곳이 이곳, 대한민국이다.

착한 사람들을 죽이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은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착한 사람들로서 나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 책 표지 사회적 약자들은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착한 사람들로서 나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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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만 본다면, 착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분명 나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니부어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강조했듯이, 개인과 사회적 차원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니부어는 개인은 충분히 종교적 차원에서 도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이기주의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개인들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는 충분히 비도덕적일 수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도, 그 사회는 나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부어가 종교적,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해법을 찾았듯이, 나쁜 사회를 고치기 위한 정치적 해결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권경우는 책에서 지속적으로 국가와 개인, 사회적 사건들과 문화현상을 비평한다. 비평은 해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최근 TV 방송에서 '진짜 사나이', '절대 남자', '슈퍼맨' 등이 화두가 되는 것은 국가 또는 사회라는 시스템이 개인을 더 이상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공적인 시스템은 무너진 지 오래다. 진짜 사나이와 절대 남자 같은 강한 존재가 필요한 이유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비평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권경우는 밝힌다. 그는 "비평은 대중들이 생각하지 못하거나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층적 맥락을 들추는 것이어야 한다"고 적었다. 아울러, 권경우는 "비평은 대중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건너편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중이 동의하는 지점이 아니라 그 건너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평이 다루는 사건은 사건 하나가 아니라, 사건들이라는 복수로 존재한다. 그 사건을 겪는 개인은 홀로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문화비평은 특정한 장르를 넘어서, 관계와 권력의 씨줄과 날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권경우는 새빨간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이 씨줄과 날실로 짜인 직조물 같은 우리의 삶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면서 "이 책을 읽다보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가지 거짓말로 짜인 삶의 씨줄과 날실을 풀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비평은 대중의 합의에 반하는 것

책은 총 3부로 이뤄졌다. 저자 권경우는 비평을 위해 여러 곳에 투고를 했고, 그 글들을 1부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2부 '나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3부 '대학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로 묶었다. 책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건들을 다룬다. 2013년 5월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사건, 같은 달 발생한 경기도 화성의 반도체공장 사건 등. 비평은 비평 홀로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 사건들과 궤를 같이 했다.

먼저 1부를 살펴보자. 세 모녀의 자살 사건 다음으로 이뤄지는 비평은 세월호 참사다. 비평가 답게 권경우는 그 현상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식에 주목한다. 우익단체나, 보수언론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주장에 대해 세월호가 바로 우리의 일상이라고 일갈한다. 일상과 세월호 참사를 분리하는 것은 별개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그러면 세월호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 있다. 특히 세월호가 야기한 안전 불감으로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지 모른다. 허술한 국가 안전망은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지속적인 문제 제기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재난자본주의' 틀 안에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난을 대비하기 위한 수많은 수익사업들을 보라. 이미 그러한 사업들은 엄청난 산업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안전을 강조할수록 개인의 자유는 위축된다고 말한다. 안전은 단순히 물리적 형태로만 우리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비판할 자유조차 없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회야말로 안전과 안보가 제일로 추앙받는 곳이다.

자유가 억압된 개인들은 성과창출과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에너지음료가 판을 치는 한국에선 인공적으로라도 목표를 채우기 위해 머리를 자극해야 한다. 인간이 기계다. 과잉 생산을 위해선 과잉의 에너지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다가 개인이 죽으면 사회는 나 몰라라 한다. 권경우는 한 노동자의 죽음을 사적인 죽음이 아니라 공적 문제의 차원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언론은 좀 더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죽음만을 보도한다.

언어의 문제는 가장 위험하다. 권경우는 "우리는 말과 글의 힘과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 사례는 '일베'다. '민주화(일베 사이트에선 비공감 혹은 반대의 뜻으로 통용)'나 '산업화(일베 사이트에선 일베 회원을 더 가입시켰다는 의미로 쓰임)'라는 말에는 언어가 가진 정통적인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없다. 이러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또한 '엄마봉사부대'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막말은 언어의 유용성이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그토록 찾던 엄마와 엄마부대의 엄마는 무엇이 같고 다른가.

세월호는 일상의 문제다

2부는 나와 대한민국을 동일시 하려는 국가주의의 문제를 파헤친다. 특히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힐링을 강요하는 문화 현상의 이면을 폭로한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사람들의 힐링을 목표로 한다. 인문학의 보급을 위해 펼쳐지는 사업들이 결국 시장의 논리 안에 갇혀 버린 사태는 처참하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인문학이 의미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콘텍스트(맥락)이다.

그렇다면 저자에게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권경우는 한 마디로 "인문학은 버티는 것이고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으로 구현하는 인문학적 가치와 담론은 허구다"라고 비평한다.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철학자 강신주는 개인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고통과 문제의 원인, 그 구조이다.

철학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안의 고통과 사건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들춰내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 사람들은 자신 안의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안에서 밖을 혹은 밖에서 안을 바라보고, 다시 내면의 변화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살자 수가 세계 최고다.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들은 왜 세상을 등지는가? 연약한 개인의 의지 때문일까? 삶의 고통 때문일까?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경쟁에서 뒤처지고, 자본주의의 논리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 공정한 법칙이 아니라 변칙과 반칙으로 부가 세습되는 신자유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과연 내가 대한민국일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다.

비판과 비평의 감각은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그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이미 권위의 사회에 종속된 지 오래다. 그 사회는 자본과 권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3부 '대학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2013년 3월,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유격대 조교 복장을 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다그쳐 충격을 안겨주었다. 권경우는 이에 대해 "거대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은커녕 일상의 잘못된 관습이 더욱 강고해져가는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공부와 집단지성 그리고 자기에의 배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선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 힘은 금기의 영역으로 지정된, '다른 것'을 지향함으로써 출발한다. 책의 저자 권경우가 지향하는 해결책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공부다. 사회에서 강요하는 공부가 아니라,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언급한 '촉발'과 '감염' 차원의 학습이다. 다시 말해, 호기심으로부터 촉발돼 감염의 과정으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부는 '변태(變態, matamorphosis)' 능력을 키워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태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

둘째, 집단지성이다. 권경우는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고 믿는다. 네티즌들은 힘을 합쳐 '구제역 매몰지 협업지도'를 완성한 적이 있다. 정부가 공개하지 않은 정보를 집단지성이 밝혀낸 것이다. 이 지도에는 매몰지 표시, 구제역 신고 날짜, 가축의 종류, 매몰 숫자 등이 담겨있다. 셋째, 자기에의 배려이다. 나를 어떻게 다룰지,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배려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은 자기에만 집중하는 반면, 자기에의 배려는 타자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타자를 배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착한 사람들이 만드는 나쁜 사회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런데 착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복합적이면서 애매하기도 하다. 착한 사람들은 나쁜 사회를 만든 장본인이면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저자도 밝혔듯이,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비평의 결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중이 지닌 속성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저자의 의견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서평입니다.



착한 사람들의 나쁜 사회 - 지금 여기,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들

권경우 지음, 생각의힘(2016)


태그:#착한 사람들의 나쁜 사회, #권경우,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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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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