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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을 발굴하는 현장은 답답해 보일 만큼 '천천히' '조심조심'입니다.
 유적을 발굴하는 현장은 답답해 보일 만큼 '천천히' '조심조심'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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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답답합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조심, 소꿉장난을 하듯 긁적긁적, 산수화를 그리듯 살살 붓질을 해가며 뭔가를 꼼꼼히 살펴가며 아주 천천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면 조급증이 울컥거릴 만큼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접근을 엄격히 막고, 바둑판처럼 줄을 띄워 놓기도 하고, 돌멩이는 물론 군데군데 놓여있는 깨진 기왓장이나 움푹 파인 작은 웅덩이에도 하나하나 번호를 메겨가며 일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이나 보내려는 한량들 신세타령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야 합니다. 도적질하듯 야음을 틈타 몰래 도굴해내는 게 아니라면 더 조심해 가며 천천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담고 있는 세월, 예술성, 역사, 가치 등을 커다란 손상 없이 확인하거나 발굴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용감(?)했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용감했던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무식과 다른 이유가 서로 상승 작용을 해 그토록 철저하게 무식할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그들'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대표로한 1971년 당시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직설 무령왕릉>

<직설 무령왕릉> (지은이 김태식 / 펴낸곳 (주)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30일 / 값 22,000원)
 <직설 무령왕릉> (지은이 김태식 / 펴낸곳 (주)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30일 / 값 22,000원)
ⓒ (주)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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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지은이 김태식, 펴낸곳 (주)메디치미디어)은 무열왕을 발굴에 얽힌 뒷이야기,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고발입니다. 무령왕릉을 능욕한 횡포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고,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rherotic)을 탐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무령왕릉 발굴은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문화유적 정비계획으로 실시하던 배수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5일,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강돌 하나가 튀어나오면서 시작됩니다. 

현장 작업자들은 그렇게 발견된 강돌 하나조차 무심히 넘기지 않는 관심과 주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고 유적을 발굴해 나가는 관리들이 보였던 행동은 무식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용감함 그 자체였습니다. 

"무령왕릉은 9일 자정쯤 무덤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중국제 청자를 내준 지 불과 8시간 만에 껍데기만 남았다. 발굴단을 놀라게 한 돌짐승도 상자에 담겨 무덤 밖에서 나뒹굴었고, 무덤방 바닥을 온통 시커멓게 깔았던 관재도 공사장 판때기처럼 들려나왔다.(중략) 단 12시간 만에 발굴이 종료되었다."(본문 152쪽)

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12시간 만에 발굴 끝난 무령왕릉

무령왕릉 발굴은 도굴처럼 하룻밤 어둠을 틈탄 발굴이었습니다. 도적질을 하는 도굴꾼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삽으로 긁고 고구마를 캐듯 유적을 마구 파괴해 가며 서둘렀습니다. 그들은 급급했습니다. 성과를 내기에 급급했고 결과를 보고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기록은커녕 현장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며 눈에 띄는 것, 굵직굵직한 것만을 대충 챙겼습니다. 하나하나 번호를 붙여가며 조심조심 차근차근 발굴해 가도 모자랄 유적들이 마대자루에 담겨 쓰레기처럼 운반됐습니다.

"각하께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고 싶어 하신다"라는 전화 한 통에 공주박물관장은 경호원 한 명 없이 금제관식, 금목걸이 등 20여 점의 유물을 서둘러 보따리에 싸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까지 가야 했습니다.  

유물을 받아든 박정희 대통령은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며 두 손으로 팔찌를 쥐고 가운데를 휘어보는 무식한 용기도 보였다고 합니다. 팔찌가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할 때마다 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아차아차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니 권력자가 지니는 무식은 어떤 유적도 파괴시킬 수 있는 끔찍한 폭력이 됩니다.

박정희가 폈다 휘었다는 무령왕비 팔찌 -<직설 무령왕릉> 214쪽-
 박정희가 폈다 휘었다는 무령왕비 팔찌 -<직설 무령왕릉> 214쪽-
ⓒ (주)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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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무령왕릉을 발굴하는 과정을 영화로 제작, '대한늬우스' 같은 시간을 통해 홍보하고 싶어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진 한 방 제대로 찍지 않고 마구잡이로 서두른 탓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령왕릉을 발굴했다는 성과는 1972년도 국사교과서에 반영시키기로 해 유물이 갖고 있는 모든 가치를 홍보의 나팔수로 전락시켰습니다.

경주 개발에 숨겨진 정치 이데올로기

1971년 각종 부정선거 시비와 함께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1971년 6월 12일 신라 천년 고도 경주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지시를 내린지 사흘 만에 '경주관광개발계획단'이 출범합니다.

박정희가 먹고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신라 천년 고도 경주를 왜 대대적으로 개발하고자 했을지 궁금합니다. 역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고, 찬란한 문화유적을 발굴해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게 진심의 전부는 아니었을 겁니다.

"정권 기반이 집권 7년 내내 '타도'의 대상이 됐던 전두환 정권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영화(screen), 프로야구 출범으로 대표되는 스포츠(sports), 그리고 섹스(sex)의 이른바 3S 정책을 썼다고 하듯이, 박정희는 반(反)유신 분위기를 잠재위기 위해 긴급조치 발동으로 대표되는 강압적 진압 방식과 함께 신라와 경주를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고고학자들을 어용화했다."(본문 464쪽)

신라 화랑을 순국무사로 끌어 올린 사학자 이선근, 이순신 성웅화를 몫으로 떠안아야 했던 국문학자 노산 이은상, 박정희가 추구한 '국민'의 이상을 기초한 철학자 박종흥은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 '삼두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무령왕릉과 같은 유적, 고고학 분야의 학문조차도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활용했음을 읽을 수 있기에 충분합니다. 1971년 당시 발굴단과 정부관계자, 취재진의 증언 등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 <직설 무령왕릉>은 무식한 권력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고발, 무령왕릉을 능욕한 작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직설 무령왕릉>에서 무령왕릉에 대한 레토릭(rherotic), 사유(思惟)와 표현을 함께 고찰하며 탐구하는 멋진 기회를 찾아 새길 수 있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직설 무령왕릉> (지은이 김태식 / 펴낸곳 (주)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30일 / 값 2만2000원)



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메디치미디어(2016)


태그:#직설 무령왕릉, #김태식, #(주)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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