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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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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새벽, 한 여성이 낯선 남성에 의해 서울 강남 한 건물 화장실에서 흉기에 수차례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약 3시간 가량을 공용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며 범행 대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남성은 그냥 스쳐 보냈다.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여성을 발견하고 따라 들어가 소지하고 있던 칼로 가슴과 어깨 부위를 여러 차례 찔렀다. 결국 여성은 사망했다.

9시간 만에 잡힌 피의자는 30대 남성이었으며 인근 식당에서 일하는 남성이었다. 가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진술이 범행 동기의 전부일까?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에 의한 범행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여성 혐오에 의한 범행이라기보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사건은 분명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행이었다. 범인은 남성 6명을 보내고 혼자 있는 여성을 살해했다. 이 인식의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성 대상 강력범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강력범죄 피해자 중 80% 이상이 여성이다(여성가족부·통계청, 2013). 이번 사건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한 피해도 있지만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도 존재한다. 그동안 국가와 공권력은 여성에 대한 범죄에 어떠한 태도를 보여왔는가.

지난 4월 12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한 남성이 동거인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은 '우발적 살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뽑아내었지만, 피해 여성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 세 차례나 가해자의 폭행을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저 훈방조치를 내렸을 뿐, 데이트 폭력을 연인 간의 사랑싸움으로 치부했다.

여성은 결국 동거 남성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전국가정폭력 실태조사 결과(여성가족부, 2010)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했을 때 "집안일이니 서로 잘 해결하라"며 왔다가 그냥 돌아가거나 아예 출동조차 하지 않은 비율이 68.2%에 달한다고 한다.

한때 떠들썩했던 '소라넷 골뱅이 강간' 사건 때도 경찰은 미적지근하게 대응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서 여성은 그 누구로부터도 구제받거나 도움받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공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성괴' 등등 여성비하 표현에 공감한다는 남성들이 60% 가까이 된다는 통계(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5)도 있다. 어떤 웹툰에서는 여군을 남성 군인의 성적 노리개로 표현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대중매체에서는 여성 차별적이고 비하적인 표현이 난무하고 여성을 외모로 차별하고 조롱하는 개그 프로그램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방영되고 있다. 여성을 살해한 남성의 직업과 꿈, 개인 사정 등을 들먹이며 가해자를 옹호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도 인터넷에 수도 없이 돌아다닌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다.

계속 이어진 성토... 우린 혐오 범죄를 끊임없이 말할 겁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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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월 19일 저녁 7시 반 강남역 10번 출구 촛불 추모 문화제의 최초 제안자다. 나의 제안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이 사건은 한 개인으로 인해 저질러진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대한민국 사회라는 공범이 있다는 문제의식 말이다.

끔찍한 마음을 먹고 누군가를 해쳐야겠다고 생각한 사람 중 열이면 여덟은 여성을 범죄의 타깃으로 설정했다. 여성이 만만해서일까? 여성이 단지 '약자'라서일까?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에서 찾았다.

'여성 혐오'란 '나는 여자가 싫다'는 개념이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성과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남성을 보조하는 존재, 남성이 하기 싫은 일을 얼마든지 떠넘길 수 있는 존재, 성적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존재,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주체성과 인격이 없는 존재 등으로 취급하는 모든 사고방식과 언행이 바로 여성 혐오이다.

여성도 여성 혐오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여성들도 여성 혐오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의 범인이 어떤 정신질환을 가졌든, 타깃을 여성으로 삼은 것은 그가 살아온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용인해왔기 때문이다.

남녀 임금 격차, 기혼 여성의 경력 단절, 남녀 젠더 역할 구분, 서비스 직종과 비정규직에 여성이 몰려있는 현상, 압도적으로 여성의 성이 상품화 되는 것 등. 모두 여성 혐오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이것이 여성 혐오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남자와 여자의 태생적인 특질에서 오는 '당연한' 문화라고 여기고 있다. 지난 17일의 강남역 사건도 여성 혐오가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드러난 현상이다.

어제 저녁에 강남역으로 나온 수많은 시민, 특히 여성들은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여성 혐오에 분노해서 나온 것이다. 나도 또한 여성으로서 언제든지 혐오 범죄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과 공포감에 휩싸였다.

추모 문화제에 참여해 준 많은 여성분들이 마이크를 들고 자신이 여성으로서 겪은 불합리한 일에 대해 발언했다. 한 여성은 "앞으로 언제 칼로 난도질 당할지, 언제 몰카에 찍힐지, 언제 토막 살인을 당할지 너무 무섭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어떤 여성은 "이 추모 장소에 나오는 것 자체가 무섭다"고도 했다.

어떤 여성은 9살 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여성은 "술자리에서 누군가 강제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해서 거부했는데, 구타를 당했다"고도 했다. "남자 의사에게 성추행 당했다"고도 했다. 휠체어를 타고 어렵게 와 주신 한 여성분은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 협박과 폭행을 당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고, 요로감염에 걸려서 고생한 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배변 주머니를 차고 다닌다고 했다.

나 또한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성인 남성이건 또래 남자아이들이건 할 것 없이 성추행을 수도 없이 당했다. 추모의 자리에 와준 여성들은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며 이 사건의 본질이 만연한 여성 혐오에 있음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은 일상에서 언어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에 공감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여성 대상 폭력을 멈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성과 약자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도적인 개선도 물론 필요하다. 약자에 대한 혐오성이 짙은 범죄를 가중처벌하는 법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고 전체 구성원이 자신에게 내재한 여성 혐오적 사고를 성찰하는 것이다.

성별을 떠나 이 문제의 당사자가 나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사회를 변화 시켜 나가야 한다. 이 사건은 곧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동일한 범죄가 계속 저질러질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의 심각성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페이스북에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페이지를 개설했다. 이 공간에서는 이 사건이 명백한 여성 혐오 범죄임에 착안해, 다양한 여성 혐오 범죄에 계속해서 대응해 나갈 것이다. 여성들이 더는 "살아남았다"라는 안도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으면 한다.


태그:#강남역살인사건, #강남역10번출구, #여성혐오, #여성혐오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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