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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경찰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증언합니다.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에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허민숙 연구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 김아무개(34)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를 나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하기 직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 김아무개(34)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를 나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하기 직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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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에서 발생한, 말할 수 없이 참혹하고 안타깝고, 믿기조차 힘든 그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깊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 함께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을 넘어 보다 냉철하게 이 사건을 진단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이 사건에 대한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통해 일구어내고 깨달아야 할, 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과제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다.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러나 어느 정도 예견되었고, 결국 막지 못했던 이 참담한 사건을 둘러싸고 이 사건이 대체 무엇에 관한 사건인지에 관한 여러 의견이 뜨겁다. 이러한 현상은 나쁘지 않다. 우리가 목격하게 된 이 사건이 대체 무슨 일인지에 대한 프레이밍(framing)은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범행 동기를 두고 이것을 '여성혐오 범죄'라 명명한 것이 오히려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살인범의 정신 병력을 들먹이며,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라기보다는 정신질환자의 난동에 우연히 저질러진 '묻지마 살인'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범행 대상으로 고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굳이 '여성이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비약이라는 냉소도 이어졌다. 비교적 힘이 약한 아동이나 노인이 우연히 이번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아동혐오' 혹은 '노인혐오'로 불려도 좋은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여성혐오 범죄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조건이 흔들리지 않는 살해 피해의 원인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어느 개인의 우연한 생물학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요구되고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집중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는 너무 자주 듣게 되어 익숙해져 버린 '여자들이 무시해서'란 범행 동기가 담고 있는 깊고도 음울한 성차별의 그림자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룹 지위 박탈당한 이들의 분노, 왜 여성을 향하는가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범행 동기를 두고 이것을 '여성혐오 범죄'라 명명한 것이 오히려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살인범의 정신 병력을 들먹이며,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라기보다는 정신질환자의 난동에 우연히 저질러진 '묻지마 살인'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범행 동기를 두고 이것을 '여성혐오 범죄'라 명명한 것이 오히려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살인범의 정신 병력을 들먹이며,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라기보다는 정신질환자의 난동에 우연히 저질러진 '묻지마 살인'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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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는 '그룹 지위'라는 게 있다. 한 사회 내에서 같은 범주로 묶이는 사람들 간의 지위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백인 중심사회에서는 백인들의 그룹 지위가 높고, 남성 중심사회에서는 남성들의 그룹 지위가 높다. 그룹 지위가 높은 곳에 속하게 된 개인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이 속한 그룹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한다.

즉, 자신은 하등 별 볼일이 없을지라도, 백인이거나 남성이면, 백인이 아니거나 남성이 아닌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많은 가치와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구'라는 이유로 더 많은 것에 대한 자격과 권한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속한 그룹의 사람들이 응당 누려야 할 것, 즉 지위가 높은 남성이 마땅히 누리는 것을 같은 남성인 자신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남성의 그룹 지위가 높은 사회일수록, 남성이 아닌 집단, 여성에 대한 폄하와 무시는 흔해지기 쉽고, 개인 남성이 가지는 권한과 자격에 대한 믿음은 견고해지며, 이를 여성에 대한 소유와 통제, 순종과 존경을 통해 확인하려는 경향도 강해진다.

이런 사고체계에서 여성들의 거절과 무관심은 분노와 격분을 자아낸다.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인 것이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남성들이 말하는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살해 동기는 특정 여성이 아닌, 자신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 '전체 여성'에 대한 경멸과 분노의 표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사건이 왜 여성혐오를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인지에 대한 단초를 짚어 나가야 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선천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는 성차별주의,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서만 여기고 남성의 삶을 편리하게 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로 인식하는 여성혐오 없이 이런 범행 동기와 행동의 정당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남성의 그룹 지위가 높은 사회의 남성들은 모두 행복을 누리는 걸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위가 높은 그룹에 속해 있지만, 자신의 현실이 그러한 지위와 걸맞지 않을 때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과장된 남성성에 대한 압박을 토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단, 자신보다 마땅히 낮은 지위에 속해 있어야 할 여성들의 도약을 비난하며,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 분노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따라서 개인의 질병이기보다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내포한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여성들, 이를 막는 건 사회적 논의

엘리엇 라저. 2014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흉기로 3명을 살해한 후, 미국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 캠퍼스 근처 도로에서의 무차별 총격으로 3명을 살해하고 14명에게 중상을 입힌 22살의 살인범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부르짖으며 이에 분노했다.

141페이지의 매니페스토(성명서)에서 그는 자신이 "진정한 알파 남성(the true Alpha Male)"이 되어 진정으로 우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노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알파 남성"이란 미국의 남성권리운동(men's rights movement) 회원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일컫는 용어다.

살인범 라저의 공격으로 2명의 백인 여성과 4명의 아시안 남성이 사망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소위 메노스피어(남성권리를 지향하는 인터넷 블로그와 웹사이트)의 유저였던 그가 남성도 같이 공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월감과 자신감이 넘치는 백인이었기에,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여성과 유색인종 남성을 살해한 걸까?

아니 현실은 정반대였다. 엘리엇 라저는 외견상 백인으로 보이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을 부모로 둔 소위 혼혈이었으며, 백인 남성과 데이트를 즐기는 여성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백인 여성들과 마음껏 즐기는, 자신은 범접하기 어려운 백인 남성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는 백인 남성을 동경했고 숭상했다.

자신은 결코 부유하고 남성다운 "진짜 백인"이 될 수 없음을 한탄하던 그는 백인 남성을 처단하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아시아계 남성을 살해한다. 백인 중심사회에서 반쪽 백인이던 그는 정확히 자신과 동일한 아시아계 남성을 살해하고, 자신에게 백인 남성에 대한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백인 여성을 살해했으며, 곧 자신을 살해함으로써 자기혐오와 여성혐오가 맞닿아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불행한 일이지만, 유사한 일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한국보다는 조금 낫다는 미국 사회에서도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삶을 마감해야 했던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있었다. 사건을 보도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 미국 사회는 여성에 대한 권리가 남성에게 있다고 가르친 성차별적 사회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점을 깊이 있게 분석했다.

남성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들을 단지 욕망의 대상, 무엇이든 요구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면 이러한 범죄는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어느 미친 남성이 저지른 실수'나 '개인적 질병'이 원인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책임이라는 결론 하에 어떠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를 열어나갔다.

모두가 아픈 우리, 성찰하는 용기가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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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노조절 장애'를 가졌다고 하는 가해 남성들이 얼마나 침착하고 냉철하게 피해자를 '정확하게 선별하고 고르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범행 동기가 충분히 이해받고 참작될 수 있는 대상, 오히려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를 쉽게 조성할 수 있는 대상을 목표물로 정확히 조준한다는 점에서 이들을 '분노조절의 대가'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수도 있다. 남성, 아동, 노인이 피해자일 때 대중의 공감과 피해자 비난을 재빠르게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왜 이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할 수 있는지는 보다 명확해진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너무도 아프다. 모두가 당사자인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로서 딸아이 같은 피해자를 추모하고, 청년으로서 누이 혹은 애인을 떠올리며 마음 아프게 피해자를 애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남성들의 공감과 지지를 모른 채 하는 것이 '여성혐오'를 거론하는 이유가 아니다. 성차별적인 사회,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인 차별의 개선 없이 이러한 사건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란 걸 말하기 위함이다.

'여성혐오'라는 인정하기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이미 사회 곳곳 깊숙이, 그리고 우리의 삶에 침투된 이 현상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성찰해 나가려는 용기를 통해서만이 참으로 원통하기 한이 없는 젊은 여성의 넋을,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함께 삶을 나누던 가족과 지인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보듬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허민숙님은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입니다.



태그:#여성 혐오, #강남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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