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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이후 페이스북을 보면 속이 메스껍다.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모습에. 그래도, 혹시 내가 놓치는 마음들이 있을까 싶어 다시 타임라인을 뒤적인다. 이 글 또한 지금 벌어지는 논쟁에 도움이 될까 싶어 적는다.

납득이 안 된다, 지금 싸우는 이유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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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댓글과 글을 보며 나는 지금의 싸움이 성립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의 반대말이 남성혐오였던가. 여성학에서 쓰인다는 저 개념(여성혐오)은 가부장적 질서에서 여성성이라 규정된 것들을 타자화하거나 폄훼하는 등 굉장히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그걸 제대로 배웠다.

또한 남성들에 대한 억압도 실로 엄청나다는 걸 체감해 마음이 쓰렸다. '인정 못 받아서 그러냐, 찌질한 XX'라는 댓글은 남성들이 받는 억압을 방증했다. 인정은 분명 인격권과 관련된 부분이고, 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 또한 외모, 힘, 돈 등으로 타자화 됐다. 여성들이 성적 타자화, 인격적 대상화 되는 데 분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지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집 장만, 징병제, 군대문화 등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이 정신적으로 억압받음을 꾸준히,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층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사건에서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생활권 내지 생존권이 무참히 깨질 수 있다는 데 분노했다. 이건 남성들이 겪는 인격권 침해와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 피해자 여성과 비슷한 층위에 놓인 여러 여성들은 공감과 변화에 호소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노린 피의자를 보며,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건 여성의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문제라는 걸 알았다.

덧붙이자면 이번 사건이 정신질환으로 사회적 약자를 공격한 사례라는 데는 동의한다. 아마 힘이 약해보이는 남성 혹은 어린이, 장애인이나 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범인이 남녀공용화장실 앞에서 남성 말고 여성을 기다렸다는 점, 불특정 여성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범행동기로 언급한 점 등까지 고려한다면 이 사건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자 여성혐오 범죄다.

무엇보다 조현병 자체가 범행의 가장 큰, 본질적 원인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 조현병 영향을 받았더라도 상대할 만한 약자를 죽여도 된다는 그 혐오의식이 끔찍한 짓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격권과 생활권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식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해결하려는 게 성평등을 바라는 페미니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생활권에 대한 문제제기, 즉 불안감은 '목숨'과 닿아 있기에 해결이 시급하다.

여성학에 능통하거나 여성운동을 전개한 적이 없는 무지렁이지만,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우리는 정말 많은 '이름표' 아래 억눌려 있다는 걸 느꼈다.

"남자라면 군대를 나와야지."
"숏컷하면 남자친구가 싫어하지 않아?"
"기집애처럼 쪼잔하게 굴지 마."
"왜 게이처럼 입고 다녀."

이 모든 평범한 말들 속에서 억압은 더욱 강화돼왔다.

그래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건 가부장적 질서라는 구조다. 구조는 눈에 안 보이고 감정은 즉각적이기에, 우리는 쉬이 눈에 보이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호소한다. 사실 남성들도 같은 고초를 다른 모양으로 겪고 있다. 하지만 그걸 다 헤아리기엔 너무 지치고, 힘든 상태다. 그래서 모든 '당사자'에게 지금의 대립이 그들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 없다. 구조와 싸우는 건 이다지도 지루하고 고되다. 계속 걷는 길을 되짚고, 때로는 자신이 없어지고, 그래도 눈물을 머금고 모두를 안은 채 안 보이는 풍경과 싸워야 하니까.

이 글에 '개념녀' 같은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은 언어들이 굴절됐고 그걸 그때그때 바로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여성들의 생존권에 더 공감하며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범죄 위험이 있는 공간을 손보고 피의자에겐 제대로 된 형량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을 말한다고 남성의 입장을 빠트리는 게 아니라는 걸 누차 강조하기 위해 긴 글을 쓴다. 참, 뭔가 허탈하기도 하다. 그동안의 침묵이 무색할 정도로 적대감이 극에 달한, 불편해서 말도 못하겠다고 힐난하는 그 편리함에, 깊은 유감을 보낸다.

열기가 사그라져도, 계속 싸웁시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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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고 일상이 복구됐을 때 나는 우리가 그대로 망각하지 않길 바란다. SNS로 열띠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그리 살도록 노력하려 한다. 기억이 머릿속에서만 머물지 않고 내 생활에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적 억압에 저항할 것이다. 강함을 요구받는 남자의, 수동성을 요구받는 여자의, 주체성을 박탈당한 아이와 부모임을 강요받는 부모의 모습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운동'을 벌이는 용기를 길러야 한다.

이런 걸 '운동'이라고 거론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 더 활발해졌으면 한다. 또한 국회의원은 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안을 강구하며 사법부는 제대로 된 판결로 나아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어려움을 화풀이하는 식의 혐오범죄를 줄이기 위해선 먹고 사는 사정이 풀려야 할 것이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나라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장하고 비판하고 행동하며 반성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다시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마 피해자에 대한 언급 자체로 고통 받을 피해자 주변인에게 송구한 마음이 크다. 그래서 정말 글 쓰는 걸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SNS에서 벌어지는 온갖 '엉망진창'을 보다보다, 답답한 마음에 몇 글자 적는다.

마지막으로 여성 혐오 반대를 표방하는 커뮤니티 '워마드'에 올라왔다는 글에 심한 유감을 전한다. '5.18이 뭐가 중요해 이게 더 중요하지'라는 태도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만능주의로 가면 안 되고 분명 울분을 풀어가며 나아가야겠지만, 이런 식은 곤란하다.

오히려 이번 사건에 대한 추모 자리와 사람들의 문제제기는 5.18의 정신과 닿아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려 하는, 무릅쓰고 목소리를 내려 했던 5.18의 정신과 행동을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으려는 마음, 우리가 그걸 인권이라 부르며 지켜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태그:#강남역10번출구, #페미니즘, #인권,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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