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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공원 광장에서 열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 창립 27돌 기념대회에 아내와 함께 참가했다. 충남지부 태안분회에서 9명, 서산분회에서 32명이 함께 관광버스를 이용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각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마이크를 잡고 내가 전교조 '배후세력'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모든 교사가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여성 교사 한 분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한 명 동반했는데, 엄마가 "이 아이도 배후세력"이라고 하여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현직 교사들과 인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 태안분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 전교조 창립 27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 태안분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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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교조에 적을 둔 현직 여교사의 배우자로 명백히 배후세력이지만, 전적으로 아내 때문에 전교조 행사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현직 교사의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배후세력일 수 있고, 전교조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1986년 서산시 음암면의 음암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모 여교사가 '교육민주화 선언'에 이름을 올려 징계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소식을 접한 나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당시 해미성당 주임이었던 윤종관 신부(현 하부내포성지 담당사제)와 논의한 후 운산성당 정지풍 신부(현 천안 성거산성지 담당사제)와 함께 운산성당 관할인 음암면 탑곡리 일대 주민들을 가가호호 방문했다.

농사철이라 집에 사람이 없으면 논으로 밭으로 찾아가서 자세히 진실 설명을 해주고, 그 여교사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았다. 여러 날에 걸친 노력 끝에 기백 명의 날인을 받은 탄원서를 서산교육청에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는 천주교 신부 2명, 개신교사 목사 3명, 불교 스님 2명도 동참했다. 그 노력이 주효했는지 그 여교사는 해직을 면하고 갈산중학교로 전보됐다.

이렇게 1986년에 현장 교사들과 처음 동지적 관계를 맺은 나는 이듬해에는 '의식화된' 교사 대자(代子)의 중매로 초등학교 여교사와 결혼했다.

'서남중사태' 회고       

세월호 참사로 자녀들을 잃은 안산시 단원고 학부모들로 구성된 '416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들은 일제히 노란 우산을 펴서 흔들며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 전교조 창립 27돌 기념대회 세월호 참사로 자녀들을 잃은 안산시 단원고 학부모들로 구성된 '416합창단'이 노래를 부를 때 전교조 충남지부 회원들은 일제히 노란 우산을 펴서 흔들며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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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1년 태안군 남면 소재 서남중학교에서 이른바 '서남중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의식화된 교사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서남중사태는 당시 남면지서장이 전체 학생들 앞에서 안보 강연을 할 때 한 교사가 질문 형식으로 왜곡된 부분을 지적한 데서 발단되었다.

오기가 발동한 지서장은 지역사회에 불을 지폈고, 관변단체 인사들과 지역 유지들의 선동으로 대다수 학부모가 집단행동을 감행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학부모들이 연일 학교로 몰려와서 '의식화교사' 퇴출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사 5명을 지목했다. 신발을 신은 채로 교실에 진입하기도 했고, 교정에서 술판을 벌이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다섯 명 교사들을 현관 앞에 세우고 심문하며 조롱을 하기도 했다. 이성을 잃은 군중심리의 적나라한 표본이었다.

나는 연일 서남중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안면 있는 학부모들을 만나 침이 마르도록 진실 설명을 하며 자제를 촉구했다. 학부모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는데, 군중심리가 작용하는 학부모들을 온전히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교사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학부모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부모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남중 사태는 다섯 명 의식화 교사들을 해직시키지 않고 다른 학교들로 전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나는 문제의 의식화 교사 중 남성 교사 3명을 태안 읍내 대폿집으로 초대해서 막걸리를 대접하며 그들의 의식화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당시 '의식화'라는 말은 '불온사상'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학부모들은 의식화라는 것을 무조건 나쁜 것, '빨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의식화라는 말은 '깨어남'을 의미한다고 누누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제대로 깨어나야 좋은 사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곤 했다.

의식화라는 말이 '깨어남'의 동의어로 인식되면서 의식화라는 말 대신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들이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깨어 있는 생각, 열린 시각, 비판적인 태도들은 걸핏하면 용공으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그런 퇴행적 기류는 2016년 오늘에도 거의 제한없이 횡행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상한 '주술'이 통하는 나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의식화'의 우람한 꽃 전교조

전교조 6만 회원 중 1만3천 명이 여의도공원 광장에 모여 생일을 자축하며 마음과 뜻이 하나임을 확인했다.
▲ 전교조 창립 27돌 전교조 6만 회원 중 1만3천 명이 여의도공원 광장에 모여 생일을 자축하며 마음과 뜻이 하나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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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꿔 창립한 전교조는 '노동'이라는 이름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무려 1527명이 해직의 아픔을 겪었다.

1994년 3월 해직교사들이 복직하고, 1999년 7월 1일 전교조는 합법화되어 법의 보호를 받게 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올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어버렸다. 박근혜 정부가 신유신 독재정권임이 거기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나는 전교조가 합법화되었을 때 아내의 등을 떠밀어 전교조에 가입시켰다. 아내는 현직 교사이면서도 전교조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교사도 아닌 내가 전교조를 명확히 알고 있어서 아내를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나는 지역의 전교조 행사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해서 오래 자리를 함께하곤 했다. 2005년 11월 태안중학교에서 열린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의 개회식 때는 축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러니 나는 전교조의 배후세력임이 명백하고, 전교조 행사에 참가할 자격이 충분할 것 같다.

전체 조합원 6만 명 중에서 1만3천 명이 함께 한 전교조 창립 27돌 기념대회는 '개회, 민중의례, 참교육상 시상, 연대단체 및 외부인사 소개, 연대사, 연대공연(416합창단), 연대메시지, 지부마당, 조합원 현장메시지, 528합창단 공연, 대회사, 상징 대동마당, 결의문 낭독, 폐회'로 이어졌다. 지면 관계상 행사 내용을 소개하는 기술은 생략하고, 다른 관련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세월호 참사로 자녀들을 잃은 단원고 2학년(당시) 학부모들로 이루어진 '416합창단'의 노래들을 들으며, 또 엄마 대표의 인사말을 들으며 또 한 번 눈물지었음을 고백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교조, #창립27돌, #기념대회, #서남중사태, #의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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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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