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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상해보자. 영어에서 두 음절 이상으로 이루어진 단어를 모두 한 음절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물론 지금도 긴 단어를 줄여 쓰는 경우가 있다. '악어'를 뜻하는 'crocodile'은 'croc'으로, '바지'를 뜻하는 'pantaloons'는 'pants'로, '마이크'를 뜻하는 'microphone'은 'mike'로 줄이는 식이다(출처: 영어도 긴 단어를 줄여서 쓰나요). 더 나아가서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겹치는 단어, 즉 동음이의어가 무척 많아진다. 이를테면 '외골격'을 뜻하는 'exoskeleton'도 'exo', '탈출'을 뜻하는 'exodus'도, 'exo'로, '퇴마하다'를 뜻하는 'exorcise'도 'exo'가 될 것이다.

둘째, 단어만 보아서는 뜻을 짐작하기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hypersensitive'는 '지나친'을 뜻하는 'hyper'와 '예민한'을 뜻하는 'sensitive'가 합쳐진 말로 '지나치게 예민한', 즉 '과민한'을 뜻하지만, 이 단어를 'hype'로 줄이면 '광고'나 '피하 주사침'을 뜻하는 'hype'와 혼동될 뿐 아니라 원래 의미를 유추할 수도 없다. 한발 더 나아가 단어를 단순히 길이만 줄이는 게 아니라 아예 철자를 다르게 바꿔보자. 'hypersensitive'를 'teem'으로 줄이면 원래 단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가 된다.

이렇게 단어의 길이를 줄이면 나쁜 점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점도 있다. 영어 단어 중에서 가장 긴 것은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으로(출처: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동녘사이언스, 2013) 194쪽), '어떤 것을 무의미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범주화하기'라는 뜻인데 이 단어를 'floc'으로 줄이면 발음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원래 단어는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으로 나눌 수 있으며 'flocci', 'nauci', 'nihili', 'pilifi'는 모두 '낮은 가격으로'나 '공짜로'를 뜻하는 라틴어다.

학술 용어를 포함할 경우 영어에서 가장 긴 단어는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으로(출처: 위키백과), '주로 화산에서 발견되는 아주 미세한 규소 먼지를 흡입하여 허파에 쌓여 생기는 만성 폐질환'을 뜻한다. 이 단어는 'pneumono', 'ultra', 'microscopic', 'silico', 'volcano', 'coni', 'osis'로 이루어졌다. 이 단어는 'pneum'으로 줄여보자. 그러면 '주로 화산에서 발견되는 아주 미세한 규소 먼지를 흡입하여 허파에 쌓여 생기는 만성 폐질환을 무의미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범주화하기'를 뜻하는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floccinaucinihilipilification'을 'pneumfloc'이라는 단 두 음절로 나타낼 수 있다.

이렇듯 영어에서는 복잡한 개념을 일컫는 단어는 길고 복잡하지만 간단한 개념을 일컫는 단어는 짧고 간단하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셈이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인 한자는 음만 놓고 보면 겉과 속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한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문자의 원시 형태로 생각되는 서남아시아의 불라에 대해 알아보자.

한자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던져주는 불라

불라(bulla)는 속이 빈 진흙 공으로, 안에는 진흙 덩어리(물표)가 들어 있으며 겉에는 홈이 파여 있다. 불라는 무엇에 썼을까? 불라의 용도는 거래를 나타내는 물표를 안전하게 모아두기 위한 것이었다(불라가 등장한 것은 교역이 시작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피에르 아미에는 불라가 농촌에서 제작되어 도시의 유통 센터로 운송되는 완제품―이를테면 직물―의 교환 영수증 구실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생산자가 중간상에게 제품을 넘겨주면서 건네는 불라 안에는 제품의 수량에 해당하는 물표가 들어 있었다. 불라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단단히 밀봉되었다. 제품을 받은 사람은 불라를 깨뜨려 수량이 정확한지 확인했다.

이같이 불라는 매우 편리한 수단이었지만, 커다란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불투명한 진흙 용기에 들어 있는 물표의 개수를 볼 수 없기에 수량을 확인하려면 반드시 불라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결책은 안에 넣은 물표를 불라 표면에 표시하는 것이었다."(데니즈 슈만트-베세라트, 「문자 이전의 고대 기록 체계」, 프레드 E. H. 슈레더 외, 『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시대의창, 2014) 54~55쪽)

이를테면 내가 중간상에게 양 열 마리를 넘겨주면서 양을 나타내는 진흙 공(물표) 열 개를 불라 안에 넣고 밀봉한다. 내게서 양을 산 사람은 중간상이 양 떼와 함께 가져온 불라를 깨뜨려 안에 든 물표의 개수가 양 마릿수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그런데 이 양 떼를 또 다른 사람에게 팔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라 표면에 내용물의 개수를 표시하면, 불라를 깨뜨리지 않고서도 대상의 수량과 종류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실체인 물표가 이미지―즉, 기호―인 표시로 바뀌었다. 나는 이 현상이 한자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한자는 여러 형체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것은 영어의 복합어에서 여러 어근과 접사를 결합하여 단어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영어는 어근과 접사가 형태로나 소리로나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반면에, 한자는 형태로는 드러나 있되 소리로는 알 수 없다.

즉, 영어 단어를 일종의 불라로 간주하면 물표는 의미이고 불라 표면의 표시는 발음(음성 언어)이나 철자(문자 언어)가 된다. 영어의 불라는 표면의 표시를 보고서 내용물을 정확히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자를 불라로 간주하면 물표는 의미이고 불라 표면의 표시는 발음(음성 언어)이나 형태(문자 언어)가 된다. 문제는 발음이라는 표시가 의미라는 내용물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자? 한글 전용? 제3의 길을 모색해보자
'뱡'이라는 한자는 총 57획으로, 강희자전과 현재 존재하는 모든 자전에서 나오지 않은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 중 하나로 꼽힌다.
▲ 현재 쓰이는 한자 중에서 가장 복잡한 뱡 자 '뱡'이라는 한자는 총 57획으로, 강희자전과 현재 존재하는 모든 자전에서 나오지 않은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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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형체소마다 고유한 발음이 있고, 형체소를 한 글자에 욱여넣는 게 아니라 일렬로 나열하여 새 단어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중국에서 쓰는 한자 중에서 가장 복잡한 글자는 산시성 전통 국수 뱡뱡면을 일컫는 뱡 자인데, 이 글자의 형체소를 풀어쓰면 '宀八言麼麼馬長長月刂心辶', 즉 '면팔언마마마장장월도심착'이 된다.

이것을 영어 단어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과 비교하면 길이가 별로 다르지 않다. 또한 글자의 발음인 '뱡'은 영어 단어의 축약형인 'floc'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뱡'이 어떤 형체소 발음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임의의 철자인 'teem'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로 쓴 한자어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한글 한자어는 형체소나 의미소 정보가 모두 사라져 내용물(물표)을 알 수 없는 불라다. 한자어 단어에 동음이의어가 많은 것은 이것과 관계가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글 전용에 찬성하지만, 동음이의어 문제와 신조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글만으로 온전한 문자 언어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만일 한글 전용을 강제로 시행한다면 단어 길이가 지금보다 길어지거나 한자어 발음이 훨씬 다양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자가 영어처럼 어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갑골문, 금문, 대전, 소전, 예서, 해서, 행서를 거치면서 자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 원래의 어원을 유추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은 한자에 얽매이거나 무작정 한글 전용을 추진하는 것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어쩌면 언중이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이.


태그:#한자, #한글, #동음이의어, #형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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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새의 감각』『숲에서 우주를 보다』『통증연대기』『측정의 역사』『자연 모방』『만물의 공식』『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스토리텔링 애니멀』『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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