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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상급식'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때가 있다. 나는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반대의 입장 중에서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무상급식이 필요 없는, 부유층의 아이들까지 급식을 무상으로 먹는 것은 재원 낭비가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신청을 통해서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과 차별을 낳을 소지가 있다고 반박했지만 '그렇다면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신청 여부를 비밀에 부치면 될 일이지 모두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는 반발에 부딪히곤 했다.

그때 인상깊게 다가온 반론이 있었다. 무상급식은 교육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 받음으로써, 다름 아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먹는 것'을 지원 받음으로써 학생들이 사회적 지원 시스템이란 나와 먼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내가 먹는 식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공동체로부터 급식을 제공받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학생들이 사회적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되리란 의견이었다. 그것은 법과 제도를 결과와 효용의 측면에서만 접근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 때로 법제는 효과적인 교육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지난 2014년 1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 주최로 서울학생인권조례안 동성애옹호 조항 삭제 환영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대책위 회원들 맞은 편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3년 12월 30일 서울시교육청이 입법예고한 서울학생인권조례 개정안은 그동안 논란이 된 동성애 관련 표현을 대폭 수정했다.
 지난 2014년 1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 주최로 서울학생인권조례안 동성애옹호 조항 삭제 환영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대책위 회원들 맞은 편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3년 12월 30일 서울시교육청이 입법예고한 서울학생인권조례 개정안은 그동안 논란이 된 동성애 관련 표현을 대폭 수정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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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광주에서 열린 '광주 학생인권 개선 방안 모색 정책토론회'가 논란이다. 무려 광주시의회의 주최로 진행된 이 토론회는, '개선 방안 모색'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상 학생인권조례의 퇴보를 요구하는 말들로 가득했다.

토론회 참여자들이 주요 문제로 삼은 것은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 것을 규정한 조항이다. 몇몇 패널들이 기존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나 혐오 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과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즉각적인 규탄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들은 혐오의 목소리가 시의회가 주최한 공적인 행사에 등장하는 것부터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상황에서, 이 같은 행사는 혐오의 목소리를 전파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만연한 상황에서, 성소수자 청소년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위협받는 것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이 같은 의견에 깊이 동의한다. 가뜩이나 사회적 낙인으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의한 차별 금지' 조항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하나의 목소리를 더하고자 한다. 이 조항은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중요하지만 성소수자가 아닌 청소년들에게도 필요하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정 집단이 보이지 않을 때의 효과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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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단연 '혐오'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문제는 단지 혐오만으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또 다른 큰 문제는 바로 성소수자들이 비가시화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최근들어 비약적일 정도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근래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 공간, 학교나 혹은 직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며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이는 공공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1년에 한 번인 퀴어문화축제 정도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광장이나 거리에서 성소수자들과 섞여 살아간다는 걸 인지하게 되는 경험이 드물다.

물론 누군가가 24시간 성소수자로 살며 어디에서나 그것이 드러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은 심할정도로 성소수자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강제로 숨겨져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상황에서 누가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상을 살고 싶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또 다른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성소수자들 또한 사회적 구성원이며 일상을 나누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떨어트린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를 떠도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말들이 대부분 자극적인 가십이나 편견에 기반을 둔 풍문이라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그 사람이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며 나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의 말들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사회에 성소수자가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들은 여전히 외부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공동체 외부의 대상으로 여겨질 때, 그 집단은 손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만연한 혐오가 만들어내는 사회 문제

<혐오와 수치심>에서 마사 누스바움이 정교하게 분석한 것처럼, 혐오는 단지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만이 아니다. 혐오는 특정 집단을 마치 오염물인 것처럼 배격하고, 이를 통해 혐오하는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는 인지 구조이기도하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 집단을 비정상성을 가진 외부인으로 몰아냄과 동시에, 자신은 그 대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정상성을 확고히하는 행위인 것이다.

즉 혐오는 대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를 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만약에 혐오자들이 소원하는 것처럼 성소수자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사라지는 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지 혐오 그 자체가 아니다. 배격을 통해 정상성을 획득하는 행동을 한번 경험하면, 행위자는 금세 또다른 대상을 찾아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혐오는 제때 막지 않는다면 증식할 가능성도 크다. 혐오가 자아를 공고히 하는 습관이 되어버릴 때, 다른 사회적 약자 집단을 마주한 경우 같은 방식의 행동을 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혐오가 증식된 사회에 살고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는 비단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여성, 외국인, 장애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있다.

당장 자신은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적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다. 당장 2011년 3월 원전 사고 이후 일본 후쿠시마 출신인 사람들이 겪는 차별을 보라. 그 사람들이라고 그런 일이 닥치리라고 예상했겠는가. 이런 식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비단 '성소수자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다.

학생인권조례의 차별 금지 조항이 만들어 낼 것들

13일 오후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 경의선숲길공원에서 '미국 올랜도 성소수자(LGBT)클럽 총격사건 희생자 추모 촛불문화제'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회원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미국 올랜도 성소수자클럽 총격 희생자 추모 촛불문화제 13일 오후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 경의선숲길공원에서 '미국 올랜도 성소수자(LGBT)클럽 총격사건 희생자 추모 촛불문화제'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회원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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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학생인권조례에 구체적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은 중요하다. 누군가를 단지 그 사람이 지닌 차이만으로 차별해선 안된다는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있을 때,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 나갈 때, 사람들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손쉽게 혐오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조례가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해 학교에서 차별이 사라지고, 많은 수의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자신을 드러낼 때 그들의 친구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는 균질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정체성과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당연하다는 것을.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만들어낼 사회는 분명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 조항은 훌륭한 교육 수단이며 또 다른 사회를 위한 발판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모두에게 위험하다. 달라진 사회는 누구에게나 좋다. 때문에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은 성소수자 청소년과 비성소수자 청소년 모두를 위해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며 이 글을 닫고자 한다. 내게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나는 답답함에 관련된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았는데, 얼마 전 만났을 때 그 친구가 180도 달라진 입장을 보여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우연히 한 자리에서 성소수자인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만난 성소수자는 자신의 상상처럼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대화를 통해 자신이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편견을 가지고 있음도 알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눈을 뜨자, 기존에 자기가 막연하게 싫어했던 집단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모든 종류의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이런 식의 경험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나 학교에서 성장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렇게 달라진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모두에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낼것이다.


태그:#성소수자, #학생인권조례, #차별,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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