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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살자, 그래 살아보자! 그래, 다시 일어서자!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인생에 지친 이웃에게 용기를 나눠준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등불을 켠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공동체를 가꾼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을 위로하며 사랑을 베푼다.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은 월 1회 연재한다. [편집자말]
2016년 1월, 잠시 귀국한 나주옥 목사에게 식사 대접했다.
 2016년 1월, 잠시 귀국한 나주옥 목사에게 식사 대접했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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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만인의 사랑을 선택한 여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다

지난 1월 말, 고국을 잠시 방문한 나주옥(73) 목사에게 식사 대접했다. 일흔셋이면 은퇴할 나이인데 그녀는 한참 현역이다. 체구는 아주 작았지만 삶의 여정은 거인의 발자취였다. 눈은 아주 작았지만 웃음은 매우 통쾌했다. 일인의 사랑보다 만인의 사랑을 선택한 독신녀의 삶은 당돌했고 명랑했다.

그녀는 전쟁과 피난의 굴곡을 헤쳐 왔다. 동생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그녀는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날아갔다. 미국에 버려진 한인 아이들, 짠한 아이들을 거뒀다. 그리고는 LA 뒷골목 홈리스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대모로 살고 있다. 어떤 미인보다 아름다운 여장부, 나주옥 목사의 일흔셋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피난민의 딸과 페스탈로지 선생의 감동 실화

<경향신문> 1959년 4월 16일자
 <경향신문> 1959년 4월 16일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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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법천리 502번지. 부모님이 피난 와중에 혹시라도 잃어버릴까봐서 하도 일러주셔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 수 없는 고향입니다."

그녀는 일곱 살이던 1951년 1.4 후퇴 피난민이 됐다. 피난 가족은 일흔둘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자신과 여동생 3명 등 모두 7명. 피난 행렬을 향해 폭격이 시작됐다. 피바다와 비명 그리고 죽음의 아비규환이었다. 어리고 늙은 목숨은 피난의 걸림돌이었다. 버리고 가라고, 그러다 다 죽는다고 피난민들이 아우성이었지만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함께 남하했다. 하늘의 보우하사인지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다.

농부인 그녀의 아버지는 땅을 떠메고 오지 못했다. 전쟁과 폐허 속에서 농부는 농사를 짓지 못했고 가족들은 굶주렸다. 전쟁은 잔인했고 매정했다. 고아로 떠돌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배움보다 생존이 급선무였다. 더구나 딸을 공부를 시킬 순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 우수했다. 입학시험을 치고 진학하던 당시에 명문학교인 서울사대부중에 특차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도저히 없었다.

입학금이 없어 갈 수 없는 학교, 명문 여중 제복을 동경했던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소녀에게 수련장이며 입시문제집을 몰래 챙겨준 서울마포초등학교 담임 송소년(생존했다면 106세) 선생이 애제자의 손을 잡아줬다. 송 선생은 학교에서 페스탈로지라 불리었다. 눈물 젖은 제자와 스승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경향신문> 1959년 4월 16일 치에 실렸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다.

"나주옥양은 어려운 가정 속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사대부속중학교에 당당히 합격되었지만 품팔이 살림에는 입학금을 채 마련해 낼 수가 없었다. 즐거워야 할 어린 가슴에는 돈이라는 못이 박혀졌지만 이 괴로움을 알아주고 격려해주는 이는 담임교사인 송 선생밖에 없었다. 입학 수속 마감 날은 자꾸만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는 송 선생이 종이로 싼 것을 나양의 손에 쥐어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빨리 수속을 해야지. 이젠 여학생이 되는 거야.' 울먹이는 나양의 어깨를 쓰다듬듯 떠밀었다. 교문을 나가는 어린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송 교사의 눈이 무엇엔가 흐려갔다. 창이 흐린 탓일까."

15명의 아이들을 키운 독신여성 "가난한 사람들 위해 살겠습니다!"

식사 초대에 동행한 제니퍼(우측)
 식사 초대에 동행한 제니퍼(우측)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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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그녀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이남에서 태어난 동생까지 4명의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말표신발 고무공장에 취직했다. 가난하다고 왜 사랑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가난한 서울대 학생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등록금을 대줬지만 사랑은 떠나버렸다. 그녀는 떠난 사랑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칠순의 노 목사는 "나에게 사랑은 사치였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마흔 다섯이던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동생들을 모두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그녀는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해 도미(渡美)한 것이다. 피난민에서 이주민이 된 그녀는 다시 생존 투쟁에 돌입했다. 밑바닥 생활은 이골이 났다. 1996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홈리스와 양로원 노인들을 돌보는 전도사 생활을 마친 1999년 목사가 됐다. 그는 목사 안수식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예수님처럼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성직을 수행하겠습니다. 낮은 곳에서 일하겠습니다."

낮은 길을 택한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런데 자녀가 15명이다. 미국에서 해체된 한인 가정의 아이들, 마약에 중독돼 자살한 한인 엄마와 교도소에 간 아빠의 아이들, 그리고 탈북소년과 유학생 등을 10년간 돌봤다. 아빠의 폭력과 계모의 학대로 피멍 든 아이들은 아빠 엄마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를 이모라고 불렀다.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그녀도 이모라는 호칭이 편했다.

민원이 발생하고 집세가 밀려 다섯 번이나 이사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폭탄이었다. 사내아이들끼리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한솥밥을 먹으면서 분노는 점차 줄었다. 안아주고 달래주고 기다려줬더니 부드러워졌다. 명석한 큰딸 제니퍼 자매, 행복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연희, 이모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현지, 더 좋은 성적으로 이모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던 풀과 진우….

그녀가 품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술과 마약 그리고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말도 통하지 않은 타국에서 혈혈단신…. 그녀의 품에서 잘 성장한 아이들은 사업가와 군인과 대학생이 됐고 여자 아이들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첫 번째로 품은 큰딸 제니퍼(30)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2013년부터 한국에 와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식사 초대에 동행한 제니퍼가 웃으며 말했다.

"이모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이모는 하늘이 보내주신 천사예요."

LA 흑인폭동 교훈 까먹은 한인사회... 흑인사회와의 화합은 구호에 그쳐

상단 좌측이 윌리엄 엄마 그리고 나주옥 목사. 하단 좌측이 윌리엄이다.
 상단 좌측이 윌리엄 엄마 그리고 나주옥 목사. 하단 좌측이 윌리엄이다.
ⓒ 나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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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Can Do it!"

음악인 출신 홈리스들이 야외음악회를 열었다. 검정 양복과 중절모를 쓴 에디는 할리우드 배우 같았다. 윌리엄은 신들린 사람처럼 드럼을 쳤고, 프랭크의 기타 연주는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빠트렸으며, 앤서니는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건반을 두드렸다.

술과 마약에 중독되기 전까지 이들은 잘 나가던 음악인들이었다. 해병대를 제대한 윌리엄은 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프랭크는 마이클 잭슨 동생과 같은 멤버로 활동했으며, 에디는 라스베이거스와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던 엔터테이너였다. 그런데 인생이 꼬이면서 홈리스가 된 것이다.

이들은 나주옥 목사의 홈리스 교회에 출석하면서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그리고 깨진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감동의 무대를 연출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홈리스들이 재활하기란 벼락을 세 번 맞을 확률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재기에 성공하면서 취업했고, 가정을 다시 꾸렸다.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은 나주옥 목사, 해피 맘이다.

나 목사는 마약과 범죄로 악명 높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뒷골목 홈리스와 빈민들의 대모다. 그녀가 활동하는 곳은 1992년 흑인폭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폭동 당시 흑인들이 한인 상인들을 공격한 것은 흑인들과 지역 사회를 돈벌이 대상으로 여길 뿐 가난한 흑인들을 돕거나 지역사회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LA 흑인폭동은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인 한인 상인들에 대한 분노 폭발이었다.

폭동 직후 한인사회는 흑인 사회와의 화합을 외치면서 대규모 집회와 평화대행진을 펼쳤다. 하지만 구호로 그쳤다. 폭동이 발생한지 24년이 지난 지금 흑인 사회와의 화합과 평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흑인사회가 다시 요동치고 있는 지금, 흑인 홈리스와 빈민들에게 그녀가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흑인들은 그녀를 '해피 맘'이라고 부른다. 거칠고 위험한 그들이지만 그녀 앞에선 순한 양이다.

20년째 LA 흑인들의 '해피 맘', 오바마 대통령상과 365일 자원봉사상 수상

나주옥 목사는 LA 흑인마을인 웨스턴 42번가에서 매일 아침마다 700명의 홈리스와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나주옥 목사는 LA 흑인마을인 웨스턴 42번가에서 매일 아침마다 700명의 홈리스와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 나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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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스타벅스에서 빵과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기증받아 LA 흑인마을인 웨스턴 42번가와 올림픽가 한인노인센터에서 매일 아침마다 700명의 홈리스와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토요일에는 한국 사발면과 도넛, 일요일에는 식사를 제공한다. 급식을 준비하다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해 얼굴과 양팔에 화상을 입는 등 사건사고가 발생했지만 홈리스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20년째 홈리스들의 해피 맘으로 살고 있는 그녀가 1년 365일 중 쉬는 날은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이틀뿐이다. 이틀 쉬는 것도 도넛을 기증하는 가게들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도넛 가게 주인뿐 아니라 미국 사람들은 그녀의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미국 정부가 그녀에게 '오바마 대통령상'과 '365일 자원봉사상' 등의 상과 감사장을 수여한 것은 당연하다.  

"맘, 우리도 예배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교회에 가면 냄새 난다면서 싫어해요."

선배 목사를 도와 7년간 홈리스 사역을 하던 그녀는 이들의 울타리가 되리라 다짐하면서 1999년 '울타리선교회'를 설립했고 2007년엔 낡은 창고건물을 빌려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한 건 홈리스와 빈민들의 요청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국 교회들은 예수가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길 잃은 양들을 반기지 않는다. 그녀는 이국땅에서의 여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과 인생을 나누다 보니 그들이 제 삶의 전부가 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약중독자라고, 알코올중독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자식 위해 기도하는 흑인 엄마와 아들 외면한 한인 목사 아빠

마약과 술에 취한 사람들, 그들은 왜 홈리스가 됐을까?
 마약과 술에 취한 사람들, 그들은 왜 홈리스가 됐을까?
ⓒ 나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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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어디서 꼬였을까. 홈리스 중에는 의사, 교수, 화가, 배우, 댄서였던 이들도 있다. 인생이 꼬이면서 거리 인생이 된 것이다. 거리에선 엉망이지만 교회에서는 책을 읽고, 찬양하고, 기도한다. 마약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다른 교회가 아닌 우리 교회에 와주어서 고맙다고 그녀는 반긴다. 도넛을 받은 대가로 화장실 청소하는 이들, 감사 카드를 몰래 건네는 이들이 사랑스럽다고 그녀는 말한다. 

"홈리스들이 무섭다고 하지만 이들은 무서운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집이 없고, 가정이 없어지면서 거리 생활을 할 뿐입니다. 이들 중에는 마약 때문에 망가진 사람도 있고, 도로를 잘못 건너다 걸렸는데 벌금 낼 돈이 없어서 감옥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약을 먹었을 뿐이지 죄인이 아닙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할 뿐이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한 윌리엄은 해병대에서 7년간 복무했다. 선교와 봉사활동 그리고, 그룹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던 그가 홈리스가 된 것은 알코올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홈리스에서 벗어나 예전의 아들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 때문이었다. 교사 출신인 윌리엄 어머니가 나 목사를 찾아와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아들은 그런 아들이 아닌데 내가 무엇인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들이 홈리스가 됐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 아들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 아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목사님, 제 아들 윌리엄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윌리엄은 어머니의 기다림과 나 목사의 돌봄에 힘입어 취직에 성공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여성과 결혼했다.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 윌리엄은 "해피 맘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라면서 고마워한다. 반면에 마약에 중독된 아들을 외면한 비정한 한인 아빠도 있다.

"아빠, 지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여기 다운타운이에요. 아빠에게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티켓 한 장만 구해주세요."

마약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온 30대 한인 청년의 아빠는 목사였다. 이들 가족은 청년이 어렸을 때 이민 왔다. 부모는 맞벌이로 바빴다. 외로움에 못 견딘 소년은 친구들과 어울리다 마약에 손댔다. 청년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했지만 마약 때문에 쫓겨났고 급기야 감옥까지 갔다. 흑인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렸지만 한인 목사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했다. 나주옥 목사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은 홈리스가 돼 거리를 떠돌게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인 청년이 왜 약을 먹게 됐는지, 약을 먹으면 아들이 아닌지, 부모의 체면만 중요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한 자식은 자식이 아니고 성공한 자식만 자식입니까. 자식이 망가진 것에 대해 부모는 아무 잘못이 없었을까요. 눈물로 기도하는 미국 엄마에게선 희망을 보았는데 한인 목사 아빠에게선 절망과 슬픔을 봤습니다. 같은 한인으로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8월 4일 월트디즈니 홀에서 홈리스 기금 마련 음악회

8월 4일 월트디즈니 홀에서 열리는 울타리선교회 17주년 모금 음악회 포스터
 8월 4일 월트디즈니 홀에서 열리는 울타리선교회 17주년 모금 음악회 포스터
ⓒ 나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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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엔 유명해지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은 후원을 많이 받기 위해 유명해지고 싶어요. 유명해지면 후원금 액수가 커지거든요. 후원금을 많이 모으면 홈리스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잖아요. 마더 테레사 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유명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잖아요."

그녀는 유명해지고 싶다고 했다. 홈리스들을 더 많이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진실한 자선활동보다 언론플레이와 이벤트에 치중하는 자선단체와 자선가들이 적지 않다. 명품과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듯 유명한 기관과 자선가들을 선택하는 후원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후원 형태다. 하지만 그녀는 유명해지지 못했다. 유명해지려면 쇼를 잘해야 하는데 쇼보다 몸으로 때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산은 고물차 2대다. 독신이기에 자식 걱정 없고 사치를 부리지 않으니 돈이 크게 필요치 않다. 하지만 홈리스를 도우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녀에겐 돈은 없지만 4만 명의 홈리스와 2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다. 주변에선 홈리스 사역은 돈이 되지 않으니 장애인 사역으로 갈아타라고 권유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하려는 것은 사역이지 사업이 아니라며….

"교회와 자선단체들은 돈을 쌓아두면 안 됩니다. 아이들과 장애인, 홈리스들을 팔아서 건물을 크게 짓고 사리사욕을 챙기는 경우가 있는데 천벌 받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울고, 버려져서 울고, 아파서 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십만 달러를 쌓아 놓고 거들먹거리는 게 말이 됩니까. 저희들은 몇백 달러가 없어서 단전·단수되고 가스가 끊기는데… 쇼하지 않고 진실 되게 나누겠습니다. 저희에게 후원해주십시오."

나주옥 목사는 다음달 4일 월트디즈니 홀에서 울타리선교회 17주년 모금 음악회를 연다. 홈리스와 한인 독거노인을 돕기 위한 모금이 목적이다. 그런데 대관료 낼 돈이 없어서 자신의 생명보험을 해지해 지불했다고 한다. 음악회에는 아주사 종합대학 김연주 음악교수, 이화여대 챔버 콰이어(지휘 박신화 교수)와 박미숙 교수, 최승원 서울종합예술대학 교수와 오동규 교수 등이 재능기부로 출연한다. 폼 잡으려는 부자 말고 선한 부자들이 많이 참석해 듬뿍 후원하면 좋겠다.

[에필로그] 일흔 셋에 부르는 인생 찬가 '맨발의 청춘'

일 년 363일 행주치마 걸치고 거리를 누비는 여장부 나주옥 목사.
 일 년 363일 행주치마 걸치고 거리를 누비는 여장부 나주옥 목사.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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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도통 폼 잡을 줄 모른다. 거룩한 척 하는 성직자와는 거리가 멀다. 은퇴 후의 삶을 위해 후원금 빼돌리는 일에도 관심 없다. 자식이 없으니 교회를 세습할 일도 없다. 홈리스 교회를 누가 이을지 걱정될 뿐이다. 1년 363일 행주치마 걸치고 거리를 누비는 여장부의 노래를 들어보시라.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로 목숨을 걸었다
거리에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외롭고 슬프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맨발로 걸어왔네 사나이 험한 길
상처뿐인 이 가슴을 나 홀로 달랬네
내버린 자식이라 비웃지 말라
내 생전 처음으로 받친 순정을
머나먼 천국에서 그대 옆에 피어나리

(최희준의 노래 '맨발의 청춘') 

이순신 장군에겐 13척의 배가 있었지만 나주옥 목사에겐 4만 명의 홈리스가 있다. 전쟁터 같은 삶의 거리에서 일흔 셋 인생을 불태우는 맨발의 청춘에게 밥 한 끼 밖에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태그:#나주옥 목사, #LA 뒷골목의 대모, #홈리스, #LA 흑인폭동, #울타리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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