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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메갈리아>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표방하는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주장성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기타 의견을 보내주신다면 가감없이 싣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문제가 된 <조선일보> 페이스북 내용.
 문제가 된 <조선일보> 페이스북 내용.
ⓒ 조선일보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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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한때 양극단에서 서로를 맹렬히 비난하던 두 개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하나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오늘의 유머'와 '일간베스트'다. 최근 벌어진 '넥슨 사태'를 놓고 이들은 문제의 근원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지목했다. 하지만 <한겨레>와 JTBC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과 진중권을 비롯한 진보 인사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들을 열렬히 추종했던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결별과 불매 운동을 선언했다.

평소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매체와 사람들이 줄줄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오늘의 유머'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이들은 누가 남았을까. 바로 그들 스스로가 경멸해 마지않던 <조선일보>의 페이스북 페이지와 '일간베스트'이다.

<조선일보> 페이스북은 최근 한 남성이 차를 타고 넥슨 사옥에 돌진한 기사를 다루며 '사옥 앞에 뭔가 있었을 텐데, 햄버거 350개가 있었을 텐데'라는 문구를 남겨 논란이 된 바 있다. 김자연 성우의 목소리 삭제를 놓고 시위를 벌이던 여성들을 '차에 치여야 할 햄버거'로 비유한 것으로 읽힌다. 일간베스트의 경우 메갈리아의 탄생 초기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던져왔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도 다를 바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유머와 일간베스트, <조선일보> 페이스북 페이지가 나란히 한목소리를 내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일베에서는 오늘의 유머 회원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이들이 평소 서로를 부르던 말을 빌리자면, '선비들이 벌레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벌레들은 선비를 측은하게 여기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관련 기사 : 넥슨 사태로 맺어진 일베와 오유의 로맨스는 호모소셜이다)

전혀 새롭지 않은 그 남자들의 연대

이 같은 상황은 당혹스럽지만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남성들이 단결해 이들을 억압하는 사태는 늘 발생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이 정치적 성향, 심지어 증오까지도 넘어 연대를 이룩해낸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소 고루하지만 이 이야기는 가부장제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흔히 '부권제'라고도 불리는 가부장제는 가족 내에서 남성 '가장'이 여성과 아동들에 대해 권력을 가지고, 이 같은 구도가 사회 구조 전반에 확장된 사회적 시스템을 의미한다. 즉 남성들이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된 사회가 가부장제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들은 교환의 대상이나 혹은 재화처럼 여겨진다.

가령 여성사학자 거다 러너의 분석에 따르면, 결혼 역시도 가부장적 체계의 일환이었다. 소수 유산계급 권력가들이 각자의 계급에 걸맞은 집안에 문자 그대로 딸을 '시집' 보내고, 계급적 동맹을 공고히 했다. 사실 지금도 가끔 들리는 재벌가의 '정략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면, 초기 결혼의 이 같은 습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동등한 권력을 요구하며, 특히나 메갈리아처럼 오직 남성에게만 허락된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재화가 말을 하고 자유를 가지고 있다면 교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성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의 추락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들이 금기를 뚫고 사회적 지위 향상을 요구할 때마다 남성들이 똘똘 뭉치는 현상은 늘 발생해 왔다.

하지만 이 사태를 '가부장적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남성들이 뭉쳤다'는 식으로 갈무리하고 지나가기엔 부족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부장' 노릇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남성이 가부장적 권력을 가지기 위해선, 그만큼의 사회적 자원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사회적 자원은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소수의 남성에게 쏠려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그렇다.

박이은실의 글 '패권적 남성성의 역사'에 따르면, 식민지배 이후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가부장제가 정착한 적이 없다. 식민지배와 내전을 걸치며 한국 사회에선 전통적 의미의 '집'이 빈번히 해체되었고, 이는 공/사 영역과 성별 역할의 해체와 재배치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공적 영역에서 소득을 벌어와 가족을 부양하고 권력을 취하는 '가부장'은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경향은 지금도 비슷하다. 결혼 후 다시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 돌아가는 엄청난 수의 여성들을 보라. 가부장적 성역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왜 그들이 가계 부양을 위해 노동 시장에 다시 등장했겠는가.

때문에 이 남성들이 사회적 자원이 불균등한 상태, 말하자면 계급이 나누어진 상황을 뛰어넘어 단결하는 데는 또 하나의 분석 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다.

문제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R.W.코넬이 제시한 개념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사회 내의 다양한 남성성 중에 이상적이며 모범적으로 제시되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남성성 모델을 의미한다.
 R.W.코넬이 제시한 개념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사회 내의 다양한 남성성 중에 이상적이며 모범적으로 제시되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남성성 모델을 의미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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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코넬이 제시한 개념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사회 내의 다양한 남성성 중에 이상적이며 모범적으로 제시되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남성성 모델을 의미한다. 가령 현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고정 소득을 통해 가족들을 부양하고 보살피는 중산층 이성애 남성성일 것이다. 이러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당대의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거나 혹은 권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령 유신시절 박정희 정부는 각종 캠페인을 통해 모범적인 남성성으로 병영화 된 남성성을 내세우기도 했다.

코넬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바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실현할 자원이 없는 남성들이, 왜 이 패권적 남성성을 정상적인 것으로 놓고 그 남성성을 수행하기 위해 안달을 내며, 가장 중요하게는 그 남성성을 유지시키고자 하냐는 것이다.

사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남성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 남성성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다. 불가능한 성적 수행을 향해 도전하지만 매번 도달에 실패하는 삶이 행복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남자들은 그런 남성성에 도전하지 않을까. 특정한 남성성이 헤게모니를 쥐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까. 왜 불화하지 않고 오히려 계급과 정치를 뛰어넘어 뭉치고, 자신에게 불가능한 남성성에 스스로를 동일시할까.

이는 그 남성들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남성성의 유지만으로도 부당한 배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부당한 배당이란 정확히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배당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분화된 젠더는 개별적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남성 젠더는 상호 작용하고 교섭하며 구성된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성은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더불어 구성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당대의 지배적 남성성이 이상적 여성성을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남성들은 여성이라면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이나 태도를 정하며 기득권을 유지해왔다.

남성이 가부장적 권력을 가지려면 그 반대편에는 권력의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남성이 사회/경제적 권력을 독점하려면, 반대쪽에는 성별로 인해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남자들에게 주는 배당이란 이런 것이다. 남자들이 그런 남성성을 수행하는 것과 무관하게, 여성들은 그것이 만들어 낸 이상적 여성성에 가두어진다. 그리고 여성들이 그런 여성성에 가두어진 만큼, 남성 일반은 젠더 관계에서 권력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패권적 남성성의 수행이 권력을 보장하는 것과 달리, 이상적 여성성은 당사자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가령 한 여성이 남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내조의 여왕'이 되어, 남성이 공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열심히 가사와 돌봄에 전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통해 남편이 아무리 큰 사회적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고 해도, 그 여성은 여전히 남편을 경유해 그 권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녀가 사용할 사회/경제적 힘은 매우 불안정하며 남성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여성들이 이 같은 이상적 여성성의 수행을 거부하는 것은 금기시 된다. 더 큰 사회적 금기는 이 여성들이 지배적 남성에게만 허락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남성들에게 메갈리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이 지점이다. 이 여성들은 '미러링'을 통해 남성들의 폭력적 언어를 자기 것으로 변환한다. 그리고 이 말을 자신들을 억압했던 남성들을 향해 되돌려준다.

또한 이 여성들은 엄청난 모금을 통해 자신들이 지닌 경제적 힘을 보이기도 하며, 소라넷 폐쇄를 이루어 내며 사회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의 행위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상적 여성성'의 관계를 교란한다. 그리고 이 같은 교란은 패권적 남성성의 유지를 힘들게 만든다. 이는 곧 남성 일반이 받게될 부당한 배당도 줄어들지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무리 무능해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알량한 권력을 위해 남성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게도.

진짜 사라져야 할 것, 남자들의 불온한 연대

마지막으로 이렇게 연대한 남성들이 만들어 온 세상이 어땠는가를 물어보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미 제국주의와 전쟁이 남성 젠더와 밀접함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나에게 조국은 없다'는 선언을 한 바가 있다. 성별 불평등과 젠더 폭력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는 또 무엇이 있을까. 예스컷? (관련 기사 : "웹툰 규제 찬성"... '예스컷 운동'의 진짜 문제)

한국 사회의 문제는 '메갈리아'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메갈리아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에서의 부당한 배당과 이를 지키기 위해 결성되는 남성들의 불온한 동맹, 이 현상이 기반한 것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이고 메갈리아가 그 남성성을 위협한다면 나는 메갈리안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조건 없는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판할 것이 있다면 비판은 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낙인찍고 없애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다. 없어져야 할 것은 단 하나다. 바로 남자들의 불온한 동맹이다.


태그:#여성주의, #남성성, #메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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