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맥아더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장군이었을까.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맥아더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장군이었을까. ⓒ CJ엔터테인먼트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년)에게 인천은 영광스런 곳이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그랬다. 상륙작전의 사전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를 다룬 이 영화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는 맥아더의 모습을 영웅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상륙 이후의 상황도 함께 다루었다면, 그 상륙으로 인해 맥아더의 인생이 어떻게 뒤틀렸는지도 동시에 보여줘야 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천상륙은 당장에는 '승천'의 기쁨을 선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의 아픔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그에게 인천상륙은 꼭 영광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으로 명장 입증

6·25 한국전쟁 얼마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서태평양지구 총사령관으로서 태평양 해상에서 전쟁을 지휘한 맥아더는 일본군을 상대로 87회나 상륙작전을 벌였다. 이런 방법으로 적의 퇴로와 병참선을 끊는 것이 그의 주 특기였다. 이렇게 한국전쟁 이전부터 상륙작전의 귀재로 유명했던 그였지만, 그런 상륙작전 중에도 인천상륙만큼은 그의 전쟁사에서 최고의 기억으로 남을 만한 것이었다.

인천상륙 당시 북한군의 주력은 낙동강 전선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 병력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에 비해, 1950년 8월 28일 미 10군단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인천상륙에 걸림돌이 될 만한 북한군 병력은 7000명도 안 되었다.

인천상륙에 걸림돌이 될 만한 병력이라는 것은 인천 해안과 가까운 인천시·서울시·김포비행장에 배치된 병력을 말한다. 10군단의 정보에 따르면, 인천시에는 약 1000명, 서울시에는 약 5000명, 김포비행장에는 약 500명의 북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이 인천상륙을 사전에 인지했을까를 두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사전에 알았든 몰랐든 간에 북한군이 대비를 게을리 했다는 점이다. 인천 주변에 7000명도 안 되는 병력을 배치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주인공인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가 북한군 기뢰 책임자인 림계진(이범수 분)의 최측근을 납치해서 미군 비행기에 넘겨주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북한군이 인천 해역에 매설한 기뢰를 미군이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게 이 영화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인천상륙 뒤에 미군이 확인한 기뢰는 12개 밖에 안 됐다. 인천 주변에 7000명 이하의 병력을 배치한 사실과 더불어 북한 기뢰가 12개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이 상륙에 대한 대비를 거의 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천 상륙 전에 중국은 '인천을 포함한 몇몇 지역에 미군의 상륙이 있을지 모르니 대비하라'고 북한 지도부에 언질을 주었다. 그런 언질이 없더라도, 북한 지도부가 인천 같은 중요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북한이 사전 대비를 거의 하지 않은 것은, 승부처가 낙동강 유역에 형성되어 있는 판국에 미군이 인천까지 와서 위험한 상륙작전을 벌일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낙동강 전선에서 좀만 더 고생하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할 수 있는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인천이란 지역이 잘 안 보였을 수도 있다.

평소와 달리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는 최고지도자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극히 좁아진다. 전시에는 사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현저히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최고지도자의 신경이 한쪽으로 쏠리면 온 나라의 역량도 그쪽으로 몰리기 쉽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북한 지도부 내에도 그 같은 심리적 문제점이 있었을 수 있다. 낙동강에 집중하느라 인천을 간과했을 수 있는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맥아더는 북한 지도부의 그런 심리 상태를 역이용해서 인천상륙이라는 대담한 작전을 벌인 인물이다. 상대의 심리를 역이용해서 허를 찌를 줄 아는 명장이었던 것이다.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의 모습. 인천시 중구 송학동의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의 모습. 인천시 중구 송학동의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인천상륙작전> 후 추락의 길 걸은 사연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은 군인 맥아더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전체 인생은 물론이고 미국의 전쟁 전략에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의 역할을 했다.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고, 그의 인생을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미군은 1950년 6월 27일(미국 시각)의 유엔 안보리 결의 제83호에 의거해서 한반도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라는 제목이 붙은 이 결의에서는 유엔군 즉 미군의 활동 범위를 대한민국 지역 내로 한정했다. 이 결의에 따르면 미군은 북위 38선 이남에서만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내는 일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기적이 연출되면서 미국 쪽의 변화가 나타났다. 전장(戰場)을 38선 이남으로 국한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추동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맥아더다. 안보리 결의와 관계없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가장 강력하게 분출되었던 것이다.

북한이 자신만만하게 한국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1950년 1월에 나온 이른바 애치슨라인 때문이다. 이 라인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필리핀-오키나와-일본-알류산열도(알래스카 아래)로 한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국이 배제되면서 북한이 전쟁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맥아더 역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1949년 3월 1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방어선은... 필리핀으로부터 출발하여... 오키나와 열도로 이어지며 일본과 알래스카에 접하는 알류산 열도를 통해 후방으로 굽어진다"고 말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속의 맥아더는 한국군 소년병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보고 '한국을 꼭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배제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맥아더는 한국 문제에 대해 그다지 열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랬던 사람이 인천상륙을 계기로 자신감이 넘치더니, 38선을 넘어 한반도 통일까지 가겠다는 쪽으로 의지를 불태우게 됐던 것이다. 상륙 11일 뒤인 9월 26일, 그는 북한 해안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상륙작전의 준비에 착수했다.

인천상륙 직후의 미국 지도부는 맥아더의 의견에 대체로 동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미국 지도부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10월 16일 혹은 10월 19일 중국군이 압록강 도하 작전을 전개하자 미국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군의 남하로 전세가 꼬이자, 백악관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을 중단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휴전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이다. 2차 대전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이라는 대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지 사령관인 그는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무시했다. 인천상륙의 기쁨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전쟁 중단이 아니라 확대를 주장했다. 이참에 중국 본토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는 주장까지 내기 시작했다. 11월 7일 "만주에 대한 폭격을 허용해달라"는 요청이 그에게서 합동참모본부로 보내졌다.

원래 한국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인물이, 인천상륙을 계기로 38선을 넘어 통일을 이룩하는 것도 모자라 고구려 고토인 만주까지 '수복'하자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북벌론자인 묘청이나 조선시대 북벌론자인 정도전이 맥아더를 봤다면 '피부색만 다를 뿐, 나와 생각이 똑같다'며 끌어안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확전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태도는 트루먼 대통령의 의중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대통령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주장을 되풀이했다. 트루먼이 휴전을 모색하는 상황에서도, 1951년 1월 29일 <런던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맥아더는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트루먼을 당황시켰다. 우회적인 표현이지만 명백한 항명이었다.

결국 맥아더는 해임되고 말았다. 전쟁 중에 장수가 바뀐 것이다. 이때가 1951년 4월 11일. 인천상륙을 통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던 그는 이처럼 허무하고도 불명예스럽게 전장을 떠나고 말았다.

군인 맥아더, 정치인 맥아더

 맥아더 동상.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

맥아더 동상.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맥아더는 군인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그는 2차 대전 중에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대권 후보군에 포함된 잠룡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였지만, 한국전쟁 도중에 해임되면서 정치적으로도 추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2년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그는 전쟁터에서 쫓겨났다. 그 다음부터 여론의 외면을 받기 시작한 그는 정치적으로 소외되다가 잠룡의 위상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가 1964년에 폐렴과 위출혈로 눈을 감고 말았다.

맥아더의 인생이 갑자기 추락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때문이었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자신감이 팽배해진 상태에서,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무리한 확전 주장을 펼치다가 '레드카드'를 받고 쫓겨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에게 그리 영광스러운 기억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추락의 시작이었다. 그는 인천 바다에 수장된 잠룡이 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의 포스터에는 "전쟁의 역사는 이곳에서 바뀔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맥아더의 인생도 바로 이곳에서 바뀌고 말았다.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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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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