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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메갈리아>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표방하는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주장성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기타 의견을 보내주신다면 가감없이 싣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불우한 시대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온갖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논쟁이 쓰나미처럼 눈에 들어온다. 논쟁의 맥락을 따라가다가도 피로감이 겹쳐 창을 닫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무지와 광기의 힘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시대다.

어느 성우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인증했다가 배역에서 교체됐다. 해당 게임 회사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반대 진영의 사람들은 게임 회사를 비판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제작했다. 성우를 옹호했던 많은 이들이 SNS 활동을 중단했다. 결국 이 움직임은 웹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예스컷' 운동으로까지 확장됐다. (관련 기사 : "웹툰 규제 찬성"... '예스컷 운동'의 진짜 문제)

핵심과 맥락을 잃은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반목과 분쟁이 사태의 전부를 정의해버리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논쟁은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무언가를 남긴다. 때로 무가치해 보이고 불필요해 보여도, 사회 전체로선 그것이 성장의 과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하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이 상황에서, 나 역시 목소리를 얹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은 되지만, 메갈리아는 안 된다?

2015년,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구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SNS에서 이 구호를 활용한 해시태그 운동이 일기도 했다.
▲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2015년,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구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SNS에서 이 구호를 활용한 해시태그 운동이 일기도 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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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논쟁의 배경이 되는 사상은 하나다. 페미니즘.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명징하고 상식적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성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 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이 견해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만큼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으면서도 논쟁적인 단어를 찾기는 어려울 정도다.

사회의 상식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지점까지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됐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인터넷 공간 위에서 무한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는가.

이 배경에는 '메갈리아'가 있다. 온라인커뮤니티 DC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이 사이트는, 인터넷상의 모든 '과격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선동하는 사이트로 묘사된다. 때로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심지어는 이 사이트가 만들어지기 전에 활동한 페미니스트까지도 조종하는 암흑 권력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사실 정작 '메갈리아' 내부에서는 사이트가 망해가고 있다는 의견이 대다수인데도 말이다.

이제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메갈리아'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이미지를 얻었을까. 핵심은 '미러링'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해 일상적으로 벌이던 성적 차별 혹은 대상화를, 여성들이 남성들을 향해 돌려주겠다는 것이 이 사이트의 활동 방식이다.

미러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의 폭력성. 메갈리아가 지닌 문제는 이것이었다.

메갈리아 아이콘
 메갈리아 아이콘
ⓒ 메갈리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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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러링'이라는 전략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미러링'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도가 지나친 남성에 대한 비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하기 위해 이용하는 근거 중 하나다. 이런 수준의 폭력성은 상대방에게 비판의 여지를 주는 것을 넘어,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폭력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성소수자, 특히 남성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였다. 메갈리아 안에서는 한때 "남성 성소수자도 한국 남성이므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 사회에서 매장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곧 운영진에 의해 차단당했고, 밀려난 이들은 '워마드(WOMAD)'라는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상 공개는 흔히 '아웃팅'이라고 불리는 범죄 행위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메갈리아가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저질렀으니 문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면 되는 것일까? 그 결론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산술적으로 평등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다. "성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주 간명하고 상식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그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와, 그 무지가 가지고 있는 패권과 수없이 다퉈야 했던 이들의 삶을 보고도,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던질 수 있을까.

커뮤니티 사이트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물론 '여론'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전부 똑같을 수는 없다. 메갈리아에 접속한 어떤 사람은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원할 수 있다. 때로는 범죄적인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문제적 발언이 등장할 수도 있다. 때로 여론이 이에 동조할 수도 있다. 도를 넘은 비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용인될 수도 있다. 그렇게 폭력성이 발현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사이트 외부의 사람들은, 해당 글이나 발언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웃팅 범죄나 특정인에 대한 명예훼손 등 범죄적 행위를 제외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모든 폭력은 나쁘다"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 있을까. 물론 모든 폭력은 나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라면, 그 유아기적 발상에 갇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성장할 여지도 거기서 끝나고 만다.

메갈리아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결론에 갇히지 말고, 눈을 돌려 사회의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다. 메갈리아보다 더 폭력적이다. 메갈리아의 폭력은 저항이다. 사회 전체가 벌이는 폭력에 대한, 아주 일말의 저항이다.

여성폭력에 눈감은 채 메갈리아만 비난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5월 25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살해된 여성의 추모집회에 참석해 차별과 폭력을 말한 여성들의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이에 대한 악성 댓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장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5월 25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살해된 여성의 추모집회에 참석해 차별과 폭력을 말한 여성들의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이에 대한 악성 댓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장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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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일베와 같은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혐오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회사,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 고정하려는 사회 분위기,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여성의 노동 환경, 박탈되는 여성의 승진 기회.

당장 국회의원 숫자만 놓고 보자. 300명 중 여성 의원은 51명이다. 비례대표는 여성과 남성이 절반씩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심지어 17%라는 여성의원 비율은 역대 최고 수치다.

이 폭력적인 사회를 아무렇지 않게 묵시하면서, 메갈리아가 벌이는 폭력만을 못 견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폭력은 나쁘다. 이 단순한 정의를 왜 이 사회에 적용하지 않고, 메갈리아라는 소수 집단에게만 적용하는가.

누군가가 개인에게 벌이는 범죄 행위는,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처벌하는 것이 '문명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적 차별과 대상화에 관해서라면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이다. 제대로 된 처벌 규정과 제재 방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야만적인 사회보다, 저항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비열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메갈리아의 전략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성평등 실현을 위해 폭력적인 방식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그들이 폭력적이지 않았다면 함께 싸워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가증스럽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제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그 '폭력적이지 않은 투쟁'을 병행해 왔다. 그들과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됐던가.

폭력적인 전략으로 '잠재적 우군'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 아닌 충고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 그 잠재적 우군은 얼마나 잠재적이기에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도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는가. 지금 당장에도 폭력적이지 않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많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과 연대해본 일 있었는가.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벌어질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도태당할 때, 심지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하는 제노사이드가 벌어질 때, "페미니즘이 싫다"며 IS에 가담하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그 '잠재적 우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잠재적 우군인가, 잠재적 적군인가.

이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기 위한 작은 폭력이다. 물론 그 과정과 별개로 존재하는, 아웃팅과 같은 대응적이지 않은 폭력은 반드시 제재되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정의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거대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한 저항이 메갈리아를 정의한다.

이 전략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이 전략에 크게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대다수가 사회의 현실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식의 운동, 대중에게 '설명해야'하는 방식의 운동은 그 정의로움과 무관하게, 성공의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폭력을 아무런 고찰 없이 단순히 "폭력적인 것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이는 핵심과 맥락을 잃은 비판일 뿐이다. 내가 허락해야만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연대해도 좋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 없이 손가락 끝으로만 "모든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는 일은 오히려 메갈리아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또한 메갈리아가 이 사회에서 해낸 역할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차별과 대상화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사는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일말도 짐작하지 못했다. "너는 여자니까"와 "너는 남자니까"를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자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수많은 압박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지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의도적 외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여성들의 대화를 듣고도 모른척한 나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한 꿈과 희망과 열정에 대해 아무런 고찰을 하지 못한 나였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며, '인간'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성 역할의 구분과 성별의 구분을 당연시하며 살아갔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을 바꿔준 것이 메갈리아였다.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많은 불쾌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과 힘든 일들. 심지어 '소라넷'과 같은 범죄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다.

메갈리아는, 나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자각시켰다. 아마 메갈리아를 통해 날개를 편 '미러링'과 각종 '폭력적'인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자각시킬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메갈리아의 전략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메갈리아가 사회적으로 절대악의 상징처럼 되어버려도, 그렇다면 메갈리아는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에서 나오는 말들에 대해 불쾌하고 짜증 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불쾌한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살았는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들을, 그 대상이 남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느낀 것은 아닌가?

메갈리아가 던지는 의문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과한 폭력성이 있었더라도, 메갈리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자유, 정의, 평등, 우애. 당연해보이는 모든 가치의 저 깊은 곳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서려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오늘이다. 불우한 시대다.
 자유, 정의, 평등, 우애. 당연해보이는 모든 가치의 저 깊은 곳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서려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오늘이다. 불우한 시대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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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를 '여자 일베'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일베'에 접속하지 않을 뿐 '일베성'을 뿌리 깊게 품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메갈리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혹은 메갈리아와 관련된 물건을 인증했다는 이유로,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가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일베적'인 이들이 아닌가.

민중총궐기에 나온 시민들을 향해 "왜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냐"며 비판하던 이들이 있었다. 결국 실제로 국가의 폭력에 의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칠십 줄 노인에 대해서 이들은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당장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독립운동에 대해,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폭력성"을 비판했다.

쉬운 말이다. "목적은 옳았지만 과정이 옳지 않았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폭력을 기반으로 확보된 자유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폭력적인'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문이다.

자유, 정의, 평등, 우애. 당연해 보이는 모든 가치의 저 깊은 곳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서려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오늘이다. 불우한 시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와 팀블로그 <이승로그>에 게재됩니다. 딴지일보 독투불패 게시판에도 올라가며, <이승로그>에 올라간 글은 <직썰>에 중복 게재될 수도 있습니다.



태그:#페미니즘, #메갈리아, #폭력성, #미러링,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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