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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찾아 산티아고 06] 그냥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다 ⓒ 정효정
쥬비리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20km, 아르가 강을 따라 아기자기한 숲속 길을 걷게 된다. 아직 걷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 꽤 고전했다. 걷다가 쉬다가 하다보니 계속 마주치는 두 할아버지가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 피터와 제임스다. 이들은 아일랜드에서 온 은퇴자인데, 제임스의 다리가 불편해서 피터가 먼저 가서 제임스를 기다리다가 제임스가 오면 둘이 다시 출발하곤 했다.

피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피터말로는 젊을 때는 두 사람 다 독실했다고 한다. 그는 이 길을 통해 제임스가 다시 신앙을 되찾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에게 그 말을 전해주자 그는 그냥 웃었다. 그는 지금은 왜 성당에 안 나가냐는 내 물음에, 살면서 죄도 짓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하다보니 어느새 성당과는 멀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신을 안 믿는 건 아냐. 한때 원망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신과 나는 친구같은 사이지."
"신과 친구 같다는 건 어떤 거죠?"
"뭐, 지금이랑 비슷해. 내가 좀 천천히 가도 저 친구가 기다려주고, 물론 잔소리를 좀 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또 나란히 걷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믿는 거지, 항상 함께라는 것을."

그 대답을 듣고 냉큼 다음 구간에서 제임스를 기다리고 있는 피터에게 전해줬다.

"제임스는 굳이 성당에 안 가도 된다는데요, 신이랑은 피터처럼 친구사이라는데요?"
"저 늙은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하는구만. 신은 그런 존재가 아냐."
숲길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는 이런 숲길을 계속 걷게 된다 ⓒ 정효정
팜플로나로 향하는 길 팜플로나 도착 3km 전 이때부터 도시에 진입하게 된다 ⓒ 정효정
툴툴거리면서도 피터는 좀 기뻐보였다. 먼저 출발하려다가 피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간단해. 신은 사랑이지. (God is love)  "

의외로 뻔한 대답에 김이 빠졌다. 그런데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 신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신이 아냐. 일생을 거쳐서 내가 이거 하나 깨달았지. 내가 젊을 때 저지른 수많은 실수는 그 착각에서 비롯됐거든."

신처럼 숭배하던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뉴스에서 본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여자친구를 죽이고 시신을 암매장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사랑했다"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잘못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자식사랑'이나 '나라사랑' 등 '사랑'이란 단어가 붙은 채 행해지는 많은 행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서 '사랑'은 자주 자신의 욕망을 감추기 위한 당의정으로 쓰이곤 했다. 하지만 피터의 말대로 '신은 사랑이지만, 모든 사랑이 신인 것은 아니다.' 의외로 간단한 진리인데, 그동안 그 단어의 위용에 가려 못 보고 지나쳤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인생을 걸쳐 깨달았다는 진리를 나누어 준 피터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길을 떠났다. 이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모든 말들은 내게 인생의 의미가 되어 새겨지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 신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신이 아냐" 
팜플로나 입구 중세 성벽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 정효정
팜플로나 이정표가 보이더니 어느새 눈앞에 영화에서나 보던 중세의 요새가 나왔다. 시내로 들어가려면 성벽을 빙 둘러 성문으로 들어서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분위기 잡는 걸 포기할 수 없다. 이어폰을 꺼내 비장한 표정으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배경음악을 들으며 들어섰다. 

성안의 구 시가지는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골목들이 사방팔방 이어져 있다. 관광지답게 코너만 돌면 기념품 가게가 보이고, 관광 정보와 맛집 정보도 넘쳐난다. 순례자들은 들뜬 마음으로 팜플로나 구경에 나섰다. 하지만 난 피곤에 지쳐 큰 관심이 없었다. 우울하게 시내를 걷다가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났던 일본인 순례자 준을 만났다. 걸음이 빠른 그는 이미 어제 도착해 이틀째 묵고 있었다. 준은 며칠 만에 푸욱 시들은 내 얼굴을 보고 안쓰러워했다. 

"원래 초반에는 힘들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그런 날이 올까. 도저히 걷는 걸 즐기지 못하겠어."
"그걸 넘어서는 게 도보여행의 묘미야. 그리고 곧 다른 즐길 것들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네가 처음 이 길을 걷겠다고 한 이유를 생각해봐."

말 못할 이유는 물론 '남자를 찾아서'다. '눈앞에 멋진 남자라도 보이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꾹 삼켰다. 내 속을 알 리가 없는 준은 끝까지 내 기분을 풀어주고자 애썼다.

"팜플로나는 관광지니까 한 이틀 쉬면서 기분전환도 해. 카스티요 광장에 헤밍웨이가 갔다는 카페도 있어. 그리고. 팜플로나 대성당은 가봤어? 거기 박물관 입장료가 3유로인데 꼭 가봐."
카페 이루냐Cafe Iruna 훼밍웨이가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했다 ⓒ 정효정
성난 소 모양의 입상 팜플로나에는 성난소에게 일부러 쫓기는 산페르민 축제가 유명하다 ⓒ 정효정
헤밍웨이가 갔다는 카페는 '카페 이루냐(Café Iruña)'다. 팜플로나는 그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배경이 된 도시다. 소설의 주인공은 팜플로나의 소몰이 축제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다. 산페르민(Festival of San Fermin)이라는 그 축제는 좁은 골목에 화가 난 소를 달리게 하고 그 소를 피해 달리는 축제다. 그 과정에서 매년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겨 해외토픽에 오른다. 

하지만 도저히 '유명한 카페에서 음료를 시켜놓고 인증샷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릴 기분'이 안난다. 결국 팜플로나 대성당(La catedral de Santa María)으로 향했다. 성당에서 차분히 우울한 마음을 달래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방문한 것은 뜻밖의 큰 수확이었다.

팜플로나 대성당은 입구까지만 해도 평범한 큰 성당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오래된 공간과 빛, 전시물, 음악까지 조화를 이루도록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조용히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12세기 목재 성모상도 인상적이었지만,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큰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십 개의 성모마리아상 컬렉션이었다. 특히 그 공간은 흑백의 천으로 장식해 현대식 갤러리를 방문한 느낌이었다.
팜플로나 대성당 성당박물관 방문을 추천한다 ⓒ 정효정
성당 박물관을 한 번 돌아보고, 감동에 겨워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지금까지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저 '축구 잘하는 나라'였다. 인터넷에서 한국 막장 드라마 못지않는 스페인 드라마를 보며 깔깔 웃었던 적도 있었다. 그 외에는 플라멩코와 투우, 가우디 정도가 내 배경지식의 전부였다.

하지만 팜플로나 대성당 박물관에서 깨달았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나라는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유럽 패권을 장악한 나라다. 당시 "스페인이 움직이면 세계가 떤다"고 할 정도였다. 원양항해술이 가장 발달한 해양강국이었기에,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그 황금은 안데스 왕들의 금을 약탈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은 당대 최고의 문화수준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문화적 전통은 잘 보존되고 가공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순례 5일째, 전혀 의도치 않게 내가 걷고 있는 나라가 단순히 축구만 잘하는 나라가 아님을 실감했다.
팜플로나 대성당의 마지막 전시실 성상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 정효정
그냥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다

순례길을 출발하기 전, 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대뜸 산티아고 순례길에 간다는 내 말을 듣자마다 "아니, 거길 왜가요?"라며 공격적인 어투를 시전했다. 그는 '한국 여행자들은 자기 주관도 없이 무분별하게 유행만 따른다'며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책이나 방송에 소개된 유명한 장소에는 언제나 한국인이 몰린다는 거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산티아고 길 말고도 전 세계에 멋진 트레킹 코스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한국 사람도 많은 거길 가는지 모르겠어요."

여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여행법만이 정석인 양 목소리를 높이고, 남의 여행에 잣대를 들이대는 여행자들을 만나곤 한다.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남들이 많이 가는 곳에 가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남들이 잘 안 가는 곳에 가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주관이 없다고 비난받을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인 여행자가 무슨 호환마마를 불러오는 것도 아닌데, 한국인 여행자가 많다고 질색팔색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럼 본인은 무슨 유럽인인가.
팜플로나 대성당 성물 전시관 전체적으로 옛건물과 조명, 전시물, 음악 등 모든 것을 섬세하게 꾸며놨다 ⓒ 정효정
그리고 내가 반년 동안 유라시아를 육로로 가로지른 것도 여행이고, 옆집 아줌마가 14박 15일 동안 유럽 10개국을 돈 것도 여행이다. 마찬가지로 속초를 무전여행으로 가는 것도 여행이고, 고속버스 타고 가서 포켓몬 잡는 것도 여행이다.

익숙한 내 지역을 떠나 새로운 지역을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이 여행인데, 꼭  여행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실존주의적 물음"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존주의적 물음 이전에, 더 넓은 세상을 보며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는 태도가 우선 필요할 듯 싶다. 여행이 뭐 별 건가. 각자 능력껏, 취향껏 가는 게 여행이다. 각자의 여행에는 각자의 가치가 있다.

팜플로나 대성당을 나오며 다시 그를 떠올렸다. '전 세계에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더 멋지고 유명한 트레킹 코스가 얼마나 많은데 거길 왜 가냐'는 말이 기억나서였다. 물론 전 세계에 유명한 경관을 자랑하는 트레킹 코스는 많다. 이탈리아의 돌로미테 트레킹이나 중국의 윈난 호도엽 트레킹,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레킹 등.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이 길만의 매력이 있다. 바로 '서사'의 가능성이다.
박물관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아가 4장 12절이 적혀있다. ⓒ 정효정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의 길.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해내려온 이 순례길에는 각기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마을과 유적지, 가톨릭 성인들의 기적, 마녀사냥의 역사, 템플기사단의 미스터리, 그리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새겨놓은 염원이 있다.

그리고 이 오래된 서사는 오늘날 길을 걷는 순례자에게 녹아들어, 새로운 이야기로 쓰여진다. 현대의 빠르고 편한 차를 놔두고 굳이 고집스럽게 이 길을 걷는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서사시다. 우연히 만난 피터가 전해준 '신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신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가 길을 걸으며 쓰고 있던 젊은 날의 서사시 중 한 대목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 옆을 걷고 있던 내게 전해져 내 인생에 더해진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 한국인 여행자가 이 글 보고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냥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천년동안 쓰여진 이야기와 새 이야기 사이를 걷는다는 의미이며, 그 이야기의  깊이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풍부한 이야기들은 이 길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인 것이다.
팜플로나 대성상 12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목재 성모상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걷는 것을 싫어하는 한 여자가 2015년 9월에서 10월 사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제 인생의 특별한 순간이던 순례길의 기억들과 다양한 정보들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태그:#산티아고, #까미노, #카미노, #순례길, #팜플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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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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