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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전국가맹점주협의회연석회의, 전국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그리고 참여연대가 '나는 자영업자다' 공모를 띄웠습니다. 자영업자의 절절한 속사정, 자영업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주세요. [편집자말]
나는 피자 매장 창업 이전에 13년동안 회사 생활을 했고, 5년가량 피씨방 운영을 경험했다.

비교적 순항했던 피씨방 운영은 '지역 재개발 사업'이라는 암초를 만나 5년 만에 접어야 했다. 제2의 창업을 고민하면서 피씨방과 같이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의 단점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창업 자본의 부담과 건물주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땀 흘린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청소대행'과 같은 소자본 업종을 알아봤다.

하지만, 추진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들로 계획은 좌초됐다. 시간에 쫓기다 당장 손쉽게 창업 가능한 프랜차이즈로 치킨에 비해 그래도 수명이 길다는 피자를 선택하게 됐다. 물론 이 업종을 선택하기 전 프랜차이즈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인터넷과 유경험자들에게 들어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들어선 프랜차이즈 가게들을 보면서, 서민 자영업의 대표 업종인 김밥과 떡볶이까지 프랜차이즈로 도배된 상황에서 프랜차이즈의 이런 저런 부조리가 있음을 인지한들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법치국가라는 대한민국에서 법은 분명히 상대적 약자인 내 편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프랜차이즈 피자집의 점주가 됐다.

그러나 가게 문을 연 뒤 서너 달 만에 내가 '설마' 했던 것은 '현실'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법'은 아직도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하루에 13~14시간 일했지만 손에 쥔 돈은...

우리 부부가 손에 쥔 돈은 꼴랑 200만 원...
 우리 부부가 손에 쥔 돈은 꼴랑 200만 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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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구 상권의 바닥 권리금과 치열한 경쟁을 피해 신도시에 프랜차이즈 피자집을 열었다. 첫날부터 피씨방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피씨방도 24시간 영업이라는 업무 특성상 쉬운 업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자집은 '패스트푸드'라는 수식이 무색할 정도로 상당한 강도의 주방 노동을 요구했다. 거기다 배달 전문이라 오토바이 기사를 구해야 했지만, 아직 입주민들 다 들어오지 않은 신도시에서 '구인'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직접 배달 오토바이를 탈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타본 스쿠터, 낯선 지리…. 눈과 비에 수십 차례 넘어지고 깨지면서 우리 부부는 창업 한 달 만에 급격한 체력 저하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갔다. 그러나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낯설고 고통스러웠던 1개월이 흘렀고, 첫 번째 손익계산을 내봤을 때 우리 부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두 사람이 하루에 최소 13시간을 꼬박 매장에 매달려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음에도 우리 부부 손에 쥔 돈은 겨우 2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던 것. 난 본사 슈퍼바이저를 불러 믿기지 않은 현실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따져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신도시의 특성'뿐.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매출을 더 올려야 한다는 설명뿐이었다.

"매출 30%가 수익"... 감언이설에 속았다

'30% 수익률'이라는 건 환상이었다.
 '30% 수익률'이라는 건 환상이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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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창업 상담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각 브랜드의 영업 담당자들은 흡사 입을 맞춘 듯 "매출 30%가 수익률"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보면 참 어이없는 엉터리 설명이었다. 임대료·인건비·경비 등 영업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지출의 비율과 매출에 따라 손익분기점이 달라진다. 당연히 그에 따라 수익률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무조건 30% 이상의 수익률을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이 '다음 달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창업 후 1년 동안 매달 얼마라도 매출이 올라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익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출이 오르는 만큼 직원을 더 고용해야 했고, 본사로부터 구입하는 식자재비는 매출의 50%를 넘었다. 어디 그뿐인가. 매출 증대에 비례해 올라가는 광고비까지 부담해야 했고, 본사는 '매출 향상 활동'이라는 명분으로 전단 수십만 원 어치를 강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 달은 매출이 더 올랐음에도 수익이 더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1년 후부터 내가 영업하던 신도시에 어느 정도 인구가 유입되자 봇물 터지듯 수많은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텅 빈 상가를 메웠다. 대부분 요식업이었다. 동종 업계의 유명 브랜드는 물론, 신생 브랜드들까지…. 거기다 새로운 먹을 거리 브랜드까지 들어서자 상승세를 그리던 매출은 1년이 지난 뒤부터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희망'은 나 스스로를 속이는 도구가 됐고, '희망고문'이 돼 우리 부부와 아이들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오늘은 쉽니다'... 이 문구, 쉽게 나온 게 아니다

자영업자에게 '휴무 권리 보장' 따위는 없다. 급한 일이 생겨 하루 쉬고자 해도 반드시 사전에 본사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내용증명'이 날아온다.
 자영업자에게 '휴무 권리 보장' 따위는 없다. 급한 일이 생겨 하루 쉬고자 해도 반드시 사전에 본사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내용증명'이 날아온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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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면서 박한 수익에 점주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가혹한 육체노동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게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맹점 착취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통제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중 한 예로, 근로자라면 적어도 근로기준법과 같은 법으로 '휴무'의 권리를 보장받지만 가맹점주들을 위한 관련 법 어디에도 가맹점주의 휴무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은 없다. 오히려 국가는 가맹점주의 기본적 권리보다는 '프랜차이즈'라는 특수한 상황을 인정해 가맹계약서에 '연중무휴'라는 조항을 인정했다. 그리고 가맹점주의 '휴무'는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반드시 사전에 본사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었다. 가맹점들의 자율적인 휴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나처럼 본사에 찍힌 가맹점주(당시 나는 가맹점단체의 임원이었다)나 돌발적 사정으로 본사가 제시한 기간 이전에 휴무를 통보하지 못하고 하루라도 쉬거나 영업시간을 단축 경우, 본사는 가맹해지를 언급하는 '내용증명'을 득달 같이 보냈다. 

워낙 박한 이윤 때문에 태풍이나 폭설 등 악천후 때도 상당수의 프랜차이즈 사장들은 직원들을 들여보내고 자신이 직접 배달을 뛰었다. 나 또한 그랬다. 이웃의 모 치킨 프랜차이즈 사장은 태풍 때 배달 나갔다가 바람에 의한 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웃으면서 "이 상처는 가족을 위해 사명을 다한 훈장과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서글픔을 느껴야 했다.

명절은 물론 심지어 태풍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악천후에서도 '박리' 때문에 마지못해 나오면서도 이건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한 당연한 희생'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현실을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우리 가맹사업자가 계약서에 휴무를 보장해달라고 하는 게 '배부른 투정'일까? 이건 당연히 누리고 보호받아야 할 '기본적 권리'와 '자유 의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박탈됐을 때 인간으로서 느끼는 '존엄성 상실'에 대한 문제였다.

세계인권 선언문 제24조를 보면 '모든 사람은 휴식할 권리 그리고 여가를 즐길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에는 너무 심한 노동을 하지 않게끔 노동시간을 적절한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정기적인 유급 휴가를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리 같은 가맹점주에게 그런 '인권'은 사치일 뿐이다.

본사의 유통 폭리... 설상가상 '1+1 정책'

'1+1 정책'은 지옥과 같았다.
 '1+1 정책'은 지옥과 같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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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이 올라도 수익이 쉽게 오르지 않는 기이한 상황은 본사의 유통 폭리 때문이었다. 피자에 소요되는 재료대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매출 향상으로 직원을 한 명만 더 고용하면 수익은 아주 조금 오르거나 심지어 오히려 줄어들었다. 더욱이 본사는 시중에서 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자유구입(권장물품)품 수십 종을 가맹점주 단체가 생기기 전까지는 반드시 본사로부터 구매해야 한다고 기만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이 치열한 시장 속에서 영리를 위한 사업을 한다면 업종을 막론하고 제품 제조에 들어가는 재료를 도매가가 아닌 소매가로 구입해 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정신 나간 사업자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정신 나간 사업자 중 하나였다.

또한 본사는 피자 두 판을 한 판 값보다 30~4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1+1 정책'으로 가뜩이나 박리에 시달리는 가맹점주를 더욱 쥐어짰다.

물품 유통 폭리와 본사 부담은 전혀 없는 '1+1 할인 정책'으로 본사는 나날이 자신들이 곳간을 채워갔지만, 우리를 비롯한 다른 가맹점들은 박리다매를 위해 온몸에 병이 생기도록 쉬지도 못하고 하루에 13~14시간 일해야 했다. 나아가 매장의 직원들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애들 용돈이라도 벌어보고자 왔던 50대 아주머니는 주문에 밀려 퇴근 직전 급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귀가한 뒤 심야에 급체로 응급실에 가야 했다. 그날 그 분은 그만뒀다. 어느 날, 주방을 담당하는 알바 2명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개인사정으로 나오지 못해 결국 손가락 건초염으로 매장 일을 포기했던 아내까지 나와 주방 일을 도왔다. 하지만 젊고, 건강하고, 숙련됐던 그 직원을 대신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그날따라 '1+1 주문'이 많아 출근한 다른 대학생 알바생은 파김치가 돼 퇴근했다. 그 모습을 본 그 학생의 어머니는 우리 가게에 항의했고, 나는 졸지에 알바를 착취하는 '악덕업자'가 됐다. 물론 그날로 숙련된 직원 두 명을 한꺼번에 잃어야 했다.

그들이 주방에서 지쳐가는 동안 난 도로 위에서 목숨을 내놓고 달렸다. 한여름에는 폭염과 싸우고, 한겨울에는 살을 애는 듯한 강추위와 싸워가며 미친 듯이 배달했다.

어느 날, 계속되는 배달과 매장 상황까지 신경 쓰느라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우리 구역에서 가장 먼 지역까지 배달을 하고 돌아왔다. 매장에 도착하자 내 스쿠터 바로 뒤에 경찰차가 따라붙어 있었다. 경찰은 내게 "사장님 도대체 신호를 몇 개를 위반하는 겁니까? 바쁜 건 알지만 그러다 죽어요!"라고 말했다. 그 경찰은 내가 배달했던 아파트부터 가게 앞까지 2km를 넘게 쫓아오면서 외부 스피커로 스쿠터를 세우라고 이야기했다지만, 난 전혀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신호를 위반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사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알바들까지 힘들게 일해서 다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면 덜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월말 결산 때, 무지막지한 본사 물류대와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광고비, 거기에 강제로 할당되는 전단 구매비를 내고 나면 우리 4인 가족의 정상적인 생활비는 고사하고 월세와 알바 시급도 전전긍긍하며 쥐어줄 정도로 돈이 없었다.

그러니 알바를 더 여유 있게 고용해 일의 부담을 줄일 수도 없었다. 주방의 고된 업무 특성상 알바들에게 항상 최저시급보다 몇백 원 이상 더 줬지만, '1+1 정책'으로 다른 피자 브랜드와 비교해 비슷한 주문이 들어와도 일의 양은 더 많았다. 거기다 브랜드 품질 유지라는 미명으로 현실 무시한 제조 절차와 매장 유지 매뉴얼의 압박을 버텨낼 알바는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배달 직원은 가뜩이나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최저시급보다 1000원 이상 더 줘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왕이면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이 같이 근무할 수 있는 큰 브랜드의 대형매장으로의 쏠린다. 우리 같은 영세 매장은 구인에서조차 빈익빈 부익부 상태에 놓인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내도, 알바도 없이 혼자 일하게 됐다.

툭 하면 '내용증명', 집배원만 봐도 스트레스가...

집배원만 봐도 심장이 쿵쾅쿵쾅... (물론 이런 표정은 아니었겠지만)
 집배원만 봐도 심장이 쿵쾅쿵쾅... (물론 이런 표정은 아니었겠지만)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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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는 이런 부당한 폭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가맹점들에게 독재국가에 버금갈만한 감시와 통재를 자행했다.

수시로 '사입 점검'이라면서 덩치 큰 본사 직원들이 2인 1조로 가맹점을 불시에 방문해매장을 압수수색하듯 샅샅이 뒤져 외부 구입 물품을 수색한다. 외부 구입 사실이 발각되면 본사로 9시까지 방문해 반성문을 쓰게 만들었고 '가맹 해지'를 언급하는 '내용 증명'을 날렸다. 물류대나 광고비의 입금이 조금만 늦어도 '내용증명'은 바로 날아왔고 매장 오픈 시간을 현장에서 몰래 감시하거나 온라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원격으로 감시했다. 역시 위반하면 바로 '내용 증명'이 날아왔다.

너무도 빈번하게 도착하는 내용증명에 집배원조차도 편지를 전달할 때마다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급기야 나는 멀리서 우리 매장을 향해 다가오는 집배원의 모습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매년 두 번씩 이뤄지는 매장 평가(위생, 피자 제조, 매장 관리 등)는 전형적인 가맹점 길들이기 도구로 전락했다. '가맹점주 단체'에 가입한 매장은 상대적으로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으로 평가를 시행했다. 탈락 후 재평가를 받게 만드는 수법으로 압박을 가했다.

본사는 이런 가맹점들의 고통을 퇴비로 풍요로운 수확을 거둬들였다. 동종업계에 새로운 경쟁 브랜드가 등장하고 다른 먹을 거리의 유행으로 지역 가맹점들은 매년 매출이 줄어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본사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류대 폭리, 전단 강매 등의 정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식자재 유통만으로도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는 본사는 전단까지 각 가맹점들에게 반 강제로 팔아먹었다. 전단 디자인은 회사 지적 재산이라면서 각 가맹점들에게 전단 디자인을 주지 않고, 오로지 본사를 통해서만 구매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시중가에 비해 30~40% 비싼 값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제 지역 광고는 종이 광고가 아닌 스마트폰 광고 시대로 바뀌다. 집 앞 현관문에 덕지덕지 붙이는 불법적 전단 광고를 용납할 소비자는 없었다. 이와 같은 세태 변화에 나와 같은 가맹점들이 점점 전단 발주를 줄이자 본사는 슈퍼바이저들을 통해 '가맹계약갱신 거부' '본사 정책 위반은 계약위반'을 협박수단으로 전단을 강매했다.

나는 결국 강매로 수십만 원을 본사에 지불하고 사들인 전단지 수만 장을 폐지로 버리거나 폐지업자에게 몇천 원에 팔아버렸다.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됐고, 다른 가맹점주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단돈 몇만 원을 아껴도 부족한 상황에 피같은 돈 수십만 원을 폐지로 버려야 하는 상황. 본사의 정책에 어떠한 저항도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노예에 불과하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부당행위에 분노한 가맹점주 몇 분은 본사에 찾아가 전단 1연(32절 기준 1만5000장)의 발주 비용 중 본사 마진으로 추정되는 발주 금액의 절반인 8만 원을 매달 입금할 테니 전단은 매장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사건으로 가맹점주들이 느끼는 전단 강매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탈탈 털린 자존감... 난 실패한 점주, 무능한 가장이 됐다

"왜 매출이 오르지 않는 거죠?"... "그건 점주님 잘못이죠"
 "왜 매출이 오르지 않는 거죠?"... "그건 점주님 잘못이죠"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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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방일로 너덜너덜해진 내 두 팔은 행주조차 짜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에 세 번의 교통사고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진통제를 복용한 지 3년이 넘었고 단기간에 효과를 주는 스테로이드 주사는 이젠 너무 맞아 그 '반짝' 효과마저도 사라졌다.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고, 통증 때문에 더 이상 매장 일이 불가능했다. 나는 8000만 원을 들여 문을 연 매장을 2500만 원에 넘겨야 했다. 물론 보증금도 1000만 원 까먹은 상태였다.

나는 한때 회사에서 인정받는 엔지니어였다. 피씨방을 운영할 때는 그 지역에서 가장 매장 관리를 잘한다고 소문도 나 제법 능력 있는 사장으로 인정받았다. 회사 생활이나 피씨방으로 큰돈은 벌지 못해도 가족들을 건사하고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누구보다 잘하고 성실하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었다.

피자 매장을 오픈했을 때도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300만 원을 지불한 본사 교육과는 별도로 매장을 운영하면서 피자를 잘 만드는 본사 직원 2명에게 따로 부탁해 피자 제조 기술을 배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기술을 습득했고, 직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할 수 있도록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위생과 이미지에 신경 많이 쓰는 '프랜차이즈'의 특성을 이해해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꼼수 부리지 않고 본사가 제시한 매뉴얼을 그대로 준수했다.

그런데 나는 실패한 사업자가 됐다. 본사에 '왜 매출이 떨어지고 수익이 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본사는 "점주님이 경영을 잘못했다" "전단을 많이 뿌리지 않아서 그렇다"라면서 오로지 내게 책임을 돌렸다. 그들은 내 남은 자존감까지 빼앗아갔다. 프랜차이즈를 하면서 난 실패한 점주, 무능한 가장이 됐다.

점주 때려치우고 알바가 되다

점주를 때려치우고 알바로 돌아갔다.
 점주를 때려치우고 알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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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 실패는 내 무능함 때문일까. 우리 매장 바로 옆에서 한 브랜드 프랜차이즈 치킨점을 하던 사장은 나보다 먼저 매장을 양도양수했다. 그는 우리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은 매출을 올렸기에 좋은 가격에 매장을 팔았다.

난 그 사장에게 왜 매장을 팔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아내가 어느 날 매장 바닥에 앉아 펑펑 울었다고 전했다. 아직 초등학생도 안 된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자기 자식들은 남의 손에 맡겨두고 매장에 나와 하루종일 손목이 아프도록 닭이나 튀겨야 하는 삶이 너무 서글펐단다.

그 부부는 이미 개인 김밥집을 15년 운영했던 요식업의 나름 고수였고, 심지어 일흔이 다 돼가는 사장 아버님까지 무보수로 배달일을 도와 나름 수입이 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는 매장의 수입이 가족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온 가족이 매장에 매달려야 겨우 수익이 나는 프랜차이즈에 진절머리가 났다고 했다.

이제 나는 점주가 아닌 알바다. 몇 달 전부터 그 치킨점 사장과 나는 한때 우리 매장과 경쟁(?) 관계였던 빅 브랜드 피자 매장에 알바로 취업했다.

역시 빅 브랜드답게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 10년 동안 알바를 다뤘던 내가 쉰이 다 돼 알바가 됐다. 물론 우리는 더 큰 일을 하기 전 '당분간'이라는 조건으로 스스로를 설득시켰지만 그것보단 우리에게 더 이상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얼마 전 배달을 하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오픈하고 연배도 같은 또 다른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 사장을 만났다. 이미 내가 하던 매장을 넘기고 다른 피자 매장에서 배달 알바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나를 붙잡아 세우고 자신도 매장을 내놨는데 아직까지 나가지 않았다면서 한탄했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서둘러 서로의 목적지로 떠나기 직전, 미간을 찌푸린 채 세상의 고민을 다가진 듯한 표정으로 그는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사장님, 차라리 알바가 낫지 않아? 아니, 더 낫지?"


태그:#프랜차이즈, #불공정, #가맹사업, #갑질, #부당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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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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