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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백범일지>를 권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무조건 읽어라' 그것이다. 나는 이제껏 <백범일지>를 다섯 번 읽고, 다섯 번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 새로 나온 듯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자람을 뉘우쳐 백범 김구 선생의 10만 분의 1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는 꿈도 꾸어보았다."

시인 고은은 <백범일지>를 두고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백범일지>를 책꽂이에 꽂아놓고, 실컷 울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는다고 했다. 그것이 어찌 노(老) 시인만의 이야기일까. <백범일지>는 전국민의 애독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까닭은 백범 사후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여전히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를 추억하고, 그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인생책 <백범일지>

내 책꽂이에는 다양한 <백범일지>가 존재한다. 풀어쓴 이도, 출판사도 제각각이다. 서로 다른 <백범일지>를 읽는 맛은 제법 쏠쏠하다.
 내 책꽂이에는 다양한 <백범일지>가 존재한다. 풀어쓴 이도, 출판사도 제각각이다. 서로 다른 <백범일지>를 읽는 맛은 제법 쏠쏠하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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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백범일지>는 특별한 책이다. 누군가 "네 인생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백범일지>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여러 권의 <백범일지>가 꽂혀있다. 출판사도, 풀어 쓴 이들도 제각각이다.

언제 처음 <백범일지>를 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백범일지>를 접한 후로, 내 곁에서 이 책이 떠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고은 시인은 실컷 울고 싶을 때 이 책을 읽는다지만, 나는 무언가 큰 결단을 내려야 하거나 용기와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백범일지>를 일일이 손으로 필사했다. 경건한 종교의식을 치르는 수도승의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백범일지>를 읽었다. 비가 내려 작전이 취소된 날에는 종일 부대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의 소원'을 필사했다.

2015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6주기가 되던 날 군에 있었던 나는 부대 도서관에 틀어박혀 종일 <나의 소원>을 필사했다.
 2015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6주기가 되던 날 군에 있었던 나는 부대 도서관에 틀어박혀 종일 <나의 소원>을 필사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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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이 힘들 때마다 꺼내 읽고 위안으로 삼았다.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기에 <백범일지>는 나와 함께 했다. <백범일지>는 내게 기쁨도 주었다. 부대에서 실시한 독후감 대회에서 <백범일지> 독후감을 제출해 장원을 차지하고 4박 5일의 포상휴가증도 받았다. 이런 끈끈한 인연 탓에 <백범일지>는 내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책'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2015년 8월, 부대에서 실시한 독후감 대회에 <백범일지>를 읽고 낸 독후감이 최우수상에 당선되었다. 4박 5일의 포상휴가증을 받으며 '김구 선생의 선물'에 감사했다. 실제로 휴가 나가서 김구 선생 묘소에 참배하며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2015년 8월, 부대에서 실시한 독후감 대회에 <백범일지>를 읽고 낸 독후감이 최우수상에 당선되었다. 4박 5일의 포상휴가증을 받으며 '김구 선생의 선물'에 감사했다. 실제로 휴가 나가서 김구 선생 묘소에 참배하며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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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백범일지>는 백범이 쓴 게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백범일지>가 백범 자신의 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백범의 문장이 워낙 난해한 관계로, 이미 백범이 생존해있을 당시부터 윤문(글을 읽기 쉽게 풀어쓰는 것)을 거친 상태로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백범일지>는 대부분 이 윤문본을 바탕으로 현대 맞춤법에 맞게 다시 풀어쓴 것이었다. 이후 백범의 친필본까지 참고하여 펴낸 <주해본 백범일지>(1997)가 출간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주해본이었기에 백범 자신의 문장은 아니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 사실을 알고서 부랴부랴 백범의 친필 원본을 구했다. 다행히 백범의 친필이 고스란히 담긴 영인본이 출간된 바 있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백범 특유의 '총알체'가 눈에 들어왔다(백범은 1938년 중국 장사의 남목청에서 한 한인 청년의 총격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총격 사건의 후유증으로 수전증이 생기는데, 수전증 탓에 떨리는 글씨를 백범 스스로 총알체라고 불렀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국·한문의 문장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고심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먹물 자국들. 이게 진정 백범의 글이구나. 백범의 숨결이 오롯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며 눈물이 왈칵 터졌다.

실제 <백범일지> 원문. 백범 특유의 총알체를 비롯해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들이 많아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 <백범일지> 원문. 백범 특유의 총알체를 비롯해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들이 많아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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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속 읽기는 어려웠다. 백범이 살아있을 때부터 윤문을 거쳐야했을 정도로, 원문은 난해했다. 지금은 전혀 쓰지 않아 그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도 수두룩했지만, 백범 특유의 서체를 해독하는 것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왜 친필 원문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백범 탄신 140주년, 드디어 백범의 친필 원본 출간

<백범일지> 연구의 권위자인 도진순 교수가 펴낸 <정본 백범일지> 표지
 <백범일지> 연구의 권위자인 도진순 교수가 펴낸 <정본 백범일지> 표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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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이번에 백범 탄신 140주년을 맞아 출간된 <정본(定本) 백범일지>의 의의는 남다르다고 할 것이다. 비로소 백범의 숨결이 온전히 담긴 그의 문장이 세상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본(定本)이란 원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본(異本)들을 비교·검토하여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복원해낸 책을 의미한다. 기존에도 이미 영인본과 직해본이 출간된 바 있지만, 적지 않은 오류 탓에 정본이라고 할 만한 책들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정본 백범일지>를 펴낸 창원대 사학과 도진순 교수는 이미 <주해본 백범일지>(1997), <쉽게 읽는 백범일지>(2005) 등을 펴냈을 정도로 <백범일지>에 정통한 역사학자다. 백범의 친필 원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본들을 대조해가며 탈초·교감하여 오류들을 잡아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출간된 <정본 백범일지>는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될 <백범일지>의 표준이 될 만하다. 그런데 그는 왜 이제서야 정본을 냈을까.

"주해본을 먼저 출간하여 <백범일지>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탈초본은 출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천만다행인 듯 하다. 한두 글자를 해독하지 못해도 주해본을 낼 순 있지만, 탈초본에서는 일자(一字)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어 한 글자라도 손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 p.5


이번에 새로 출간된 <정본 백범일지>는 기존의 주해본과는 달리 백범의 투박한 구어체가 생생히 살아 숨쉰다. 백범이 쓴 친필 원본은 시골 상민들의 일상어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국문·한문·일본어가 뒤섞이는 언어의 격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읽는 것과도 같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원고를 수정한 백범

그동안 <백범일지>는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1928~1929년에 상권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간 뒤인 1941~1942년에 하권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범일지>는 집필 완료 후에도 끊임없이 수정을 거쳤다는 것이 도 교수의 설명이다.

"백범은 자식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으로 <백범일지>를 썼고, 피난 중에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번 수정·보완하였다. 원본에서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글자들을 등사본이나 필사본에서 찾아 보완하는 것은 떨어져 나간 살점을 찾아 꿰매는 것과 같았다. 또한 시초 원본과 최종 원본 사이에서 백범이 지우거나 추가한 것을 추적하면서 그간 무심코 지나갔던 속살이 드러났다" - p.7


실제로 <백범일지>는 백범 자신의 원본 뿐만 아니라 필사본, 국사원본, 등사본 등 다양한 판본이 존재했지만, 원본에만 존재하는 문장들이 상당히 많다. 다양한 이본 출간 후에도 백범 자신이 원본에 끊임없이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원본에는 없지만, 다른 판본에는 존재하는 문장들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백범일지>에는 먹칠을 하거나 절삭한 부분이 자주 보인다. 백범은 <백범일지>의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유로 기존에 쓴 문장들을 지우려고 했다. 그렇기에 백범이 수정을 가하기 전 상태에서 원본을 등사하거나 필사한 판본에는 원본에서도 지워진 문장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 교수 역시 원본과 여러 이본들을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백범 내면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고 고백한다.

"백범의 시초 집필에서 출발하여 수정·삭제·추가한 것을 추적하는 것은 마치 백범의 뇌를 시기별 단층사진을 통해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한 글자의 수정이나 보완이 때로는 백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와 같았다. 최종 결과만 일괄적으로 정서한 필사본이나 주해본으로는 백범 내면의 숨은 의도와 변화를 온전하게 전할 수 없다" - p.6~7


백범이 먹칠해가며 지우고자 했던 사실

이번에 출간된 <정본 백범일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서두의 '해제' 편이다. 도 교수는 해제를 통해 <백범일지> 탈초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낸 사실들을 공개하고 있다. 특히 백범이 원본에서 먹칠해가며 지우고자 했던 부분들을 추적한 사실이 흥미롭다.

<백범일지>에서 가장 많이 삭제된 부분은 안공근 관련 기록이다. 안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당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백범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최측근이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백범과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1939년 충칭에서 행방불명된 후 지금까지도 그의 최후를 알 길이 없다. 안공근의 행방불명을 두고 백범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설이 난무할 정도였다.

<백범일지> 원본에서는 안공근에 대한 백범의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안공근의 암살 배후로 백범이 지목되는 상황에서, 내용이 너무 민감했던 탓인지 백범은 안공근 관련 기록에 대폭 먹칠을 가한다. 도 교수는 바로 이런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고증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가운데 백범 김구 선생이 앉아있고,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가운데 백범 김구 선생이 앉아있고,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이다.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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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백범은 1911년 안악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당시, 일제의 고문을 이겨낼 수 있었던 바탕에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그 부분 역시 훗날 먹으로 지워버렸다. 이에 대해 도 교수는 "원본을 수정하는 시점에 백범은 이미 기독교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백범일지>를 둘러싼 세간의 의혹도 반박하고 있어

해제에서는 그동안 <백범일지>를 둘러싼 세간의 오해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백범일지>와 관련된 대표적인 의혹 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의 조작설'이다. <백범일지>를 최초로 윤문한 이가 이광수라는 이유로 인해, 그동안 이광수가 의도적으로 <백범일지>를 조작해왔다는 의혹이 존재해왔던 것.

그러나 도 교수는 "1994년 백범의 차남 김신에 의해 <백범일지> 원본이 공개되면서, 그런 의혹은 이미 다 반박이 된 사실"이라고 결론 짓는다. 윤문 과정에서 원본의 뜻을 잘못 해석하거나 축약·삭제된 것, 새롭게 추가된 부분은 존재하지만, 악의적 왜곡은 없다는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이광수가 개입한 역할은 있었다고 해도 미미하며, 현재는 이광수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백범 친필 원본의 영인본, 원본의 초서를 정서한 활자본, 원본에서 최소한의 교정을 한 직해본, 각주가 있는 주해본 등 많은 종류의 백범일지가 나와있다. 아직도 <백범일지>를 두고 이광수 운운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 백범 내지 <백범일지>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거나, 특정 <백범일지>를 내세우려는 상업적인 욕심 때문일 것이다" - p.35


<백범일지>는 반성과 참회의 기록

"汝等(여등)은 아직 나히 얼이고 또한 半萬里(반만리) 重域(중역)을 時時(시시)로 說與(설여)할 슈도 없음으로 其間(기간) 나의 所經歷(소경력)을 略述(약술)하야 멧멧 同志(동지)의게 寄與(기여)하며 將後(장후) 너의들이 長成(장성)하야 아비의 經歷(경력)을 알고 십어 할 程度(정도)에 및으거든 뵈여 달나고 부탁하엿거니와, 나의 가장 恨(한)하는 바는 너의 兄弟(형제)가 장성하엿드면 父子間(부자간) 서로 땃뜻한 사랑의 談話(담화)로 一次(일차) 說與(설여)하엿으면 滿足(만족)할 것이나, 世上事(세상사)가 所願(소원)과 갖이 아니하야..." - p.107


<백범일지>는 백범이 자신의 두 아들에게 아비의 일생을 알려주기 위해 유서의 형식으로 쓴 글이다. 머리말도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독립운동가의 숙명이 느껴진다. 그의 문장에서는 시대의 조류를 거부하고, 세상에 맞서고자 했던 한 거인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더욱 눈물겹다.

<백범일지>는 위인전이 아니다. 백범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의 면모보다는,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역시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이었다. 인간적인 감정 앞에서 흔들리고, 큰 일을 앞두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눈물 흘리며 참회했다. 충분히 흠이 될 만한 이야기도 여과없이 기록했다. 그 통렬한 반성과 참회의 기록이 <백범일지>다. 따라서 우리 역시 <백범일지>를 위인전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다. 험난한 시대적 상황에서, 백범이라는 한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갔는지, 스스로 과오를 기록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는지 고민하면서 읽어야 한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
 독서삼매경에 빠진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
ⓒ 청년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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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건국절 논란으로 사회 분위기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정본 백범일지>가 출간되었다는 사실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고 축소하는 기막히는 현실에 대해 백범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날 백범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민해보고 싶거든 <정본 백범일지>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정본 백범일지> / 김구 저, 도진순 탈초·교감 / 돌베개 / 2016. 8. 22 / 30,000원



정본 백범일지

김구 지음, 도진순 탈초.교감, 돌베개(2016)


태그:#백범일지, #백범 김구, #건국절, #도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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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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