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대동여지도> 포스터.

<고산자, 대동여지도>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지도꾼' 김정호에 대한 그간의 일반 상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험난한 여정 끝에 지도를 만들었다는 인식에 기초를 두고, 영화 초반부는 그가 돌아다녔을 전국 주요 명소들을 쭉 보여준다. 참고로, 고산자(古山子)는 그의 호다.

김정호(1804?~1866년)는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19세기 전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대 최고의 '지도꾼'이었다. 한반도를 지도 위에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도를 통해 대중에게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한국 지도의 발달사라는 관점에서, 그는 분명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정호가 업적을 이룬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눈비를 맞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희박하다. 그래서 영화 <고산자>가 기반을 두고 있는 그 같은 설정은 지금으로서는 실제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옛날 지도는 기본적으로 통치의 목적에서 나왔다. 백성을 다스리고 조세를 징수하며 외적을 방어해야 하는 왕실로서는 당연히 지도를 갖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제작되었다.

일례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고구려 편)에는 서기 628년 고구려 영류태왕이 고구려 지도를 당나라에 제공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이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전국적인 지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발굴된 고구려 무덤의 벽면에서는 만주에 있는 요동성을 그린 지도가 발견되었다. 이 지도에는 성벽과 강과 산은 물론이고 거리와 건물까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도에 대한 국가의 욕구가 꽤 구체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전쟁이 빈발했기 때문에, 옛날 국가는 지금 못지않게 지도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그 같은 자신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방에 있는 통치조직을 활용해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중앙에 있는 관료나 병사들에게 말을 내주고 이들을 언제라도 변경에 보내 지도를 그리도록 할 수 있었다.

지도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낄 뿐 아니라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조건도 가장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국가만큼 지도를 잘 만들 수 있는 주체는 없었다. 국가가 최고의 인적·물적 기반과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따라서 영화 <고산자> 속의 김정호처럼 홀로 외롭게 전국을 여행하는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조직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자세한 지도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김정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생산한 기존 자료를 십분 활용했다. 기존의 지도를 참조하고 보완 내지는 수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도를 그려낸 것이다.

기존의 지도만 갖고는 더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없다. 구체적인 지리 지식을 담은 지리지의 도움도 빌려야 한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의 도움까지 빌려 <청구도>와 <동여도>란 지도를 만들고 나아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지도를 만든 일차적 방식이었다. 무릎 관절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전국팔도를 일일이 누비는 영화 속의 김정호와는 분명 달랐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홈페이지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고산자, 대동여지도> 홈페이지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김정호가 기존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에도 많이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동여도지>나 <여비도지> 같은 지리지를 집필한 데서도 추론할 수 있다. 지리지를 많이 읽어보고 참고하다 보니 기존 지리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니 기존과 다른 새로운 지리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여행에 주로 의존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면, 지리지를 만드는 데 그렇게 공을 쏟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증언

이런 사실은 김정호와 친밀했던, 혹은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친구인 실학자 최한기(1803~1877)는 김정호의 지도 <청구도>에 실린 서문에서 "친구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은 뜻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장단점을 살폈다"고 말했다. 김정호가 기존 지도 및 지리지를 고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리 지식을 발전시켰다고 말한 것이다. 

유재건(1793~1880)이란 사람도 증언을 거들었다. 왕립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문서를 다루는 서리로 근무했으며 7000수 이상의 시를 남긴 문학인이다. 성공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향견문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바로 이 <이향견문록>에 그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도학에 취미가 있어서 이것들을 고증하고 널리 수집하여…. (중략)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 중에서

김정호의 주된 방식이 지리지 고증이었다는 점은 김정호의 후원자인 신헌(1810~1884)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신헌은 영화 <고산자>에도 등장했다. 영화에서 흥선대원군을 보필하는 핵심 측근이 있었다. 배우 공형진이 연기한 그 인물이 바로 신헌이다.

최종적으로 정1품 작위를 받은 신헌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할 당시의 조선측 대표였다. 그가 청·장년기에 역임한 관직 중에 한양을 방어하는 금위영대장과 임금을 보좌하는 좌승지가 있다. 국가 기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관직을 역임했던 것이다.

이런 관직 경력은 신헌이 김정호를 위해 국가 지리에 관한 고급 정보를 빼낼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정보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신헌의 글을 담은 <신대장군집>의 일부인 '금당초고'에 김정호와 관련된 아래의 글이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과, 오래된 집에서 좀먹은 채 보존된 책들을 널리 수집하여 고증하고 여러 판본들을 참고했으며, 많은 책들에 근거하여 수집해서 편집했다…. (중략) 그에게 위촉하여 완성했다." - 신헌, <신대장군집> '금당초고' 중에서

이에 따르면, 신헌은 규장각은 물론 국가안전보장회의인 비변사에서 빼낸 지도 자료를 고증해서 나름대로 편집한 뒤 이것을 김정호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김정호는 그것을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다. 최한기·유재건에 이어 신헌 역시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이 주로 지리지 고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옛날 지식인들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요즘 책들에서도 그런 인식이 나오고 있다. 소설 형식을 가미해서 김정호의 일대기를 풀어낸 이기봉의 <평민 김정호의 꿈>에서도 최한기·유재건·신헌과 동일한 관점이 나타난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고지도 및 지리지를 연구한 이기봉은 김정호가 최한기·신헌 등의 자료 제공에 힘입어 지도를 그렸다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과 활동을 정리했다.

당시와 지금의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정호는 발로 뛰어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고증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교통·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일개인이 전국을 누비면서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김정호의 방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김정호 입장에서도 발로 뛰면서 자료를 수집하기보다는 규장각이나 비변사에 소장된 일급 자료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정확했을 것이다. 국가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수집한 지리 정보의 수준을, 한 개인이 발로 뛰어다니며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다가 김정호에게는 여기저기를 마음껏 여행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직업적인 지도 조각가였기 때문이다.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직업적인 조각가였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정호는 상업적 마인드를 갖고 지도를 조각해서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영화 <고산자>에서처럼 가정과 생계를 내팽개치고 전국을 누빈다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발품을 최대한 적게 팔면서도 더 좋은 지도를 만들어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위인이었다

 대동여지도의 축소판인 대동여지전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대동여지도의 축소판인 대동여지전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정호가 오로지 지도와 책만 뒤졌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지금의 한반도와 별로 다르지 않는 우수한 한반도 지도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가 어는 정도는 발로 뛰는 현장조사를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에 불과하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실제 여행이 아니라 책속 여행을 통해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국학 권위자 중 하나인 개리 레드야드(전 뉴욕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세계 지도학 통사> 전 8권의 일부로 <한국 지도학>을 집필한 일이 있다. 이 책은 옮긴이 장상훈에 의해 한국어로는 <한국 고지도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이 책에서 레드야드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에 대해 추정 섞인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김정호는 연구와 여행을 계속하면서 거리 정보를 가다듬었고, 전국을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다시 그렸다."

레드야드는 김정호가 '연구와 여행'이란 방법으로 지도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연구'를 통해 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앞서 소개한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그가 '여행'을 통해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경우가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증거가 없다. 그래서 '연구와 여행' 앞에 '분명히'란 말을 넣은 것이다. 여행이란 방법을 병용하지 않고는 이런 지도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분명히'란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김정호는 기자로 치면 오로지 발로만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색하는 기자였다. 그러다가 가끔은 현장으로 뛰어나갈 때도 있는 기자였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조선 최고의 지도를 만들어냈다. 그가 오로지 발로 뛰어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업적이 대중의 입과 입을 거쳐 전파되는 과정에서 생산된 일종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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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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