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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주택에 사시던 시부모님께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시고, 아파트에 살던 우리는 마당이 있는 30년 된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오래된 집이지만 감나무 그늘이 좋은 마당이 있고 한강과 넓은 유적지가 동네에 있어 아이들 키우기 좋다. 시부모님은 평생을 주택에서 안팎으로 집을 돌보며 사셨지만 아들이 출가한 지도 여러 해 지났고, 그 사이 연세도 드셔서 관리가 편한 아파트로 터전을 옮기셨다.

아직 좋은 어린이
▲ 추석을 손꼽아 기다리는 너는 아직 좋은 어린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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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의 이사, 주택에서 아파트로

예전 집에선 남편 방이 그대로 남아 있어 명절에 시가에 가면 우리 식구들은 남편 방에서 잤다. 그런데 시부모님께서 아파트로 이사 가시면서 남편 방을 시아버님 서재로 바꾸셨다. 자신의 방이 사라져버리자 남편은 조금 낯설어 했고, 다가오는 추석에 어느 방에서 자야 하나 이른 걱정을 했다. 차례는 지내지 않지만 여자들에겐 신경이 쓰이는 명절. 시어머님께서도 달라진 환경에 명절 준비를 낯설어 하셨다. 그런 어머님께 '해맑게' 한 말씀 드렸다.

"어머님, 추석엔 저희 집으로 오세요. 날씨 좋으니 동네 산책도 가시고 아범이랑 등산도 가시고요."

아이 셋 키운다는 핑계로 대충 해놓고 사는 며느리가 큰소리를 치니 시어머님께선 걱정의 눈길을 거두시지 못하셨지만, 며느리의 큰소리가 궁금도 하셨는지 그러자고 하셨다.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 꼭 시가로 가야 할 이유가 없었고, 날씨 좋은 추석엔 산책하기 좋은 우리 집에서 소풍처럼 명절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고작 7년 했는데도 하기 싫은 날이 훨씬 더 많은 살림, 시어머님은 얼마나 지치셨을까 싶어 추석 명절만이라도 아들 집에서 1박2일 쉬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막상 추석이 내 몫이 되자 추석 1주일 전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식단을 짜고 장 볼 목록을 정하고, 인터넷으로 레시피 공부하기를 며칠. 하루 주무시고 갈 시부모님 이부자리 세탁하고 뽀송뽀송하게 솜까지 말리기를 또 며칠. 그렇게 1주일을 마음을 바삐 움직이며 보냈다.

전문가들과 함께!
▲ 추석 준비는 동네 시장의 전문가들과 함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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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 맞이 추석 준비

드디어 추석 전날. 갈비와 물 양만 맞추면 '정말' 쉽다는 갈비탕 황금레시피에 속아 큰 곰솥까지 새로 사 갈비 10kg로 갈비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사 오면서 바꾼 인덕션이 아직 낯설어 그런지 두어 시간이면 뚝딱이라던 갈비탕은 오전 꼬박 걸려 겨우 완성했다. 갈비탕과 새 인덕션과 씨름하느라 진이 빠져버린 난 시장에서 50년 전문가 할머니가 곱게 부쳐놓으신 전을 사고, 송편 역시 전문가의 손길을 빌렸다. 식혜·수정과는 두말 하면 잔소리.

불고기도 마트에서 자본의 힘으로 딱 맞는 간으로 재워놓은 반조리 식품으로 집어오고, 썰어서 내놓기만 하면 되는 회도 넉넉히 떠왔다. 그래도 나물 몇 가지는 직접 했지만 껍질 깐 도라지를 사 왔다는 비밀 아닌 비밀.

결국 큰소리 친 며느리의 추석 상엔 국과 밥, 나물 몇 개만이 며느리 손끝이었다. 편하게 그냥 오시라고 몇 번이고 말씀 드렸지만 시어머님께선 추석 지낼 김치와 식혜, 밑반찬 몇 가지를 새로 만들어 오시고, 국산 도라지를 직접 골라 하나하나 껍질을 까 새콤하게 무쳐오셨다(나의 도라지무침은 냉장고 구석에서 빛도 못 봤다는 슬픈 이야기는 비밀 아닌 비밀에 '또' 비밀).

식어도 맛있는 전. (올해는 동그랑땡만 사고 동태전은 내 손으로 부쳐보기로)
▲ 전문가의 손길은 역시 다르다 식어도 맛있는 전. (올해는 동그랑땡만 사고 동태전은 내 손으로 부쳐보기로)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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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차린 추석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차리긴 며느리가 차렸지만 시장의 전문가들과 시어머님이라는 살림 전문가가 차린 상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해맑게'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을 솔직하게 자수하고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맛있어요" 하며 서투른 며느리 밥상을 넘겼던 작년 추석의 기억.

추석상은 시장의 힘을 빌려야 했지만, 계획했던 추석 소풍은 좋았던 날씨처럼 잘 진행되었다. 개를 좋아하시는 시아버님께선 든든한 아들과 귀여운 손자들과 함께 올 봄까지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던 짜니를 산책시키며 아주 즐거워 하셨다. 저녁 식사 후엔 늦게까지 소주 한잔 하시며 평소 잘 꺼내시지 않던 속이야기도 하셨다. 부모님을 집으로 모셔 술상을 대접하는 그 한때가 남편도 행복해 보였다.

며느리 어려워한다고 냉장고도, 싱크대도 좀처럼 열지 않으시는 시어머님께선 시장에서 사온 음식도 맛있다며 넘겨주셨다. 입맛에 꼭 맞는 추석 음식은 아니었지만 근 40년 만에 손끝에 물을 묻히시지 않는 명절을 보내시는 시어머님도 좋아 보였다.

마당에서 할아버지랑 달리기도 하고 즐거웠지요
▲ 작년 추석날 아침 마당에서 할아버지랑 달리기도 하고 즐거웠지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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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소풍처럼 보낸 추석

추석 날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간식 도시락을 싸 집근처 유적지로 소풍을 가자고 아이들을 시켜 시부모님을 졸랐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뛰어노는 동네 구석구석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 신발을 채 신기도 전에 들떠 종알댔다. 걸어서 5분, 숲이 울창한 유적지에 도착하자 두 분은 아주 좋아하셨다.

층간소음 눈치 보지 않고 탁 트인 자연에서 손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시는 시아버님, 나무 그늘 아래서 햇사과를 드시며 여유롭게 아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시는 시어머님. 추석을 앞두고 1주일을 바쁘게 지냈지만 오랜만에 며느리 노릇 한 것 같아 뿌듯한 며느리, 이만하면 괜찮은 그림이었다.

. 이 모습이 부러운 첫째는 아빠를 졸라 장기를  배우고 있지요.
▲ 작년 추석날 오후, 아들과 십수 년 만에 두는 장기 . 이 모습이 부러운 첫째는 아빠를 졸라 장기를 배우고 있지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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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드시고, 짧은 낮잠도 주무시고, 아이들과 게임도 하신 후, 시장에서 샀으면서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당당하게 보따리보따리 싸서 안기는 며느리 음식을 싣고 시부모님의 추석 가을소풍은 끝이 났다.

"어머님, 겨울엔 주택이 추우니 따뜻한 아파트에서 설 보내고, 추석엔 이젠 계속 저희 집으로 오세요."

이렇게 며느리 공수표를 마구 남발하며!

다시 돌아온 추석

전문가의 손길을 빌렸지만 사실 몹시 고단한 작년 추석이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고단하고 부담이 됐다. 추석을 열흘 앞두고 시부모님께 추석 일정을 의논드렸다.

"괜찮겠어? 니가 오라면 우린 가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웃으시는 시어머님. 뱉어놓은 공수표도 있고, 작년 추석 소풍의 그림 같은 풍경도 떠올라 또 '해맑게' 말씀드렸다.

"그럼요, 오세요. 시장에서 다 살 거예요. 걱정 말고 오세요."

다섯 식구가 움직이는 것 보다는 두 분이 가볍게 오시는 게 좋겠다며 대신 추석날 아침에 오셔서 아침만 드시고 가신다는 시아버님의 결정. 1년에 한 번하는 며느리 노릇인데 며칠 팔 아프면 어떠랴 싶어 작년처럼 전날 오셔서 소풍처럼 지내다 가시라고 거듭 말씀 드렸다.

"정 니가 원한다면 그러마. 그런데 물가도 비싸고 너도 바쁜데 갈비탕 끓이지 말고 간단하게 불고기랑 탕국 정도만 끓여 지내자. 전도 사지 말고 회도 뜨지 말고 송편도 사지 말고. 김치랑 식혜는 내가 담가 가마."

덕분에 안밖으로 정리되는 집
▲ 추석의 시작은 대청소 덕분에 안밖으로 정리되는 집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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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시작은 청소

이렇게 올해 추석도 우리집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됐다. 그런데 음식이 문제가 아니다. 작년엔 이사온 지 두어 달 지났을 때라 대청소 수준의 청소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소에 취미 없는 내가 살림하는 집은 고작 1년 살았을 뿐인데 곳곳이 얼룩덜룩하다. 추석 1주일 전부터 침구 세탁을 시작했다. 그런데 빨아놓고 보니 계속되는 늦더위 탓에 마땅한 시부모님 침구가 어중간하다. 결국 간절기 이불을 새로 주문했다.

주말엔 대청소 돌입. 토요일엔 유리창을 닦고, 그런데 거실만. 1년 동안 한 번도 안한 방충망도 청소, 그런데 싱크대 앞에 섰을 때 딱 보이는 곳만. 커튼은 거실과 안방 것만 떼어서 빨고. 남편은 마당의 잡초를 뽑고 잔디를 깎고. 일요일엔 싱크대 문과 손잡이 안쪽을 중심으로 청소, 그러나 씽크대 내부는 닦지 않았다는 게 함정. 냉장고 청소도 대동소이.

동네 시장 떡집에서 반죽까지 해주니 송편 만들기 참 쉽네요.
▲ 첫째의 그림일기: 가족과 함께 송편만들기 숙제 동네 시장 떡집에서 반죽까지 해주니 송편 만들기 참 쉽네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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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엔 눈에 보이는 것들 위주로 대강 정리를 하고, 화장실 청소는 추석 전날 오전에, 시부모님 도착 1시간 전에 딱 맞춰서 제일 신경 써서 할 계획이다. 추석 덕분에 미루고 미루던 면피용 청소로 시작하는 추석맞이. 이런 사정으로 올해도 전은 보나마나 시장에서 살 거고, 시금치 한 단에 4000원 하니 나물도 사는 게 낫나 고민 중이다.

겨우 면피용 청소를 시작하고, 식단만 짰을 뿐인데 벌써부터 팔이 아픈 걸 보니 나도 며느리는 며느리, 그것도 추석 앞둔 며느리. 드디어 성균관에서도 "홍동백서 근거 없다"며 소박한 차례상을 권한다 하니 이 땅의 모든 며느리들이 산뜻하고 가벼운 상차림으로 모두가 즐기는 추석 같이 즐길 수 있기를(그래서 나는 전도 당당히 사고 올해도 깐 도라지를 사는 걸로!).

달님에게 소원을 말하면 달님이 소원줄을 내려주지요
▲ 첫째가 기다리는 추석 그림:소원을 말해봐 달님에게 소원을 말하면 달님이 소원줄을 내려주지요
ⓒ 이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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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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