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세상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비단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인습의 잔재에 영향 받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노스햄튼(Northhampton)의 찰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구두 공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찰리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만약 제가 구두를 만들고 싶지 않으면요?"라고. 하지만 찰리의 질문에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클랙튼(Clacton)의 사이먼도 마찬가지이다. 챔피언 벨트를 간절히 손에 쥐고 싶었던 아버지는,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뤄주기를 바랐다. 사이먼은 소질이 있었고, 권투를 곧잘했지만 챔피언 벨트는 사이먼이 바라는 길이 아니었다.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니며 '롤라'가 될 때 가장 행복한 사이먼은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으며 억지로 연습하러 가야만 했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못난 아들 찰리(왼쪽, 김호영)와 롤라(오른쪽, 강홍석)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으며 살기에는 각자의 가슴에 품은 게 달랐다. ⓒ 곽우신


"나 아주 어릴 땐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 그랬었지. 늘 하시던 말씀 강하게 싸워라. 별난 짓 말아라. 어울려 살아라. 나를 봐 힘없이 숨을 죽인 채 힘겹게 억눌린 나란 존재를. 그가 원한 사람, 난 쉽지 않았어. 자유롭게 숨도 못 쉬었어. 진실한 내 모습 그는 외면했지.

나는 못난 아들 그가 원했던 모습이 아냐. 정말 노력하고 애써 참아 봐도 난 될 수 없었어. 아빠의 그림자. 끝없는 기대의 고통 속에 지쳐 쓰러졌지. 아팠어. 하지만 난 깨달았어. 괜찮다고, 이대로. 내 모든 걸 다 바쳐 원하고 원해도 난 될 수 없었어. 아빠의 그림자. 그 속에 설 수 없었지. 거울 속 내 모습, 너와 나." - 뮤지컬 <킹키부츠> 1막 No.09 '못난 아들(I'm not my father's son)' 중에서

사이먼은 사이먼일 수 없었다. 그는 롤라이고 싶었다. 하이힐에 가짜 가슴을 달고, 드레스를 입은 채 춤추며 노래하는 여장남자 아니 드래그 퀸(Drag Queen)이 그의 정체성이었으니까. 그의 언행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남자다운' 것이 아니었고, 결국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야만 했다.

찰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구두 상자. 이 상자는 사실 하나의 '맨박스'(교육자 토니 포터가 제시한 용어. 남자를 '남자다움'이라는 틀 안에 억압하는 시선이나 편견)였다. 공장을 잘 이끌고 가업을 물려받는 것. 자신의 길에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자다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남자의 길이 갑자기 교차한다.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이들 앞에 놓인 도전 과제. 길이 80cm의 강렬한 빨간 부츠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1년 8개월 만의 컴백, 더 화려하고 강렬하게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정성화의 롤라 <영웅>의 안중근, <레미제라블>의 장발장도 잘 어울렸지만 <킹키부츠>에서 롤라를 소화하는 정성화도 굉장히 매력적이다. 희극인 출신임에도 안정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그는, 생각보다 넓은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이다. <라카지> 때 보여줬듯이, 이번에도 정성화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뽐낸다. ⓒ 곽우신


<킹키부츠>가 서울 블루스퀘어로 돌아왔다.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줬던 초연에 이어 재연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올라왔다.

우선 배우. <라카지>에서 이미 소수자 역할을 진정성 있게 소화했던 정성화는 무대를 휘어잡는 매혹적인 롤라였다. 초연에서 누구보다 빛났던 강홍석은 그때 그대로 다시 한 번 롤라가 되어 돌아왔다. 제 옷을 입은 듯한 김지우는 로렌으로 분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한다. 신의정의 니콜라는 배우의 역량에 비해 캐릭터 분량이 너무 적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신 스틸러로 활약하는 돈의 고창석과 심재현의 재능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됐다. 관능미 넘치는 엔젤들은 관객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데 특히 한선천은 이 역을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두 명의 롤라 롤라 역에 더블 캐스팅된 정성화(왼쪽)와 강홍석(오른쪽). 초연 때 이미 자신의 재능을 뽐낸 강홍석이 제 옷을 입고 돌아왔다. <드라큘라>의 반 헬싱 같은 역할보다는 역시 이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니콜라와 로렌 두 아들들(찰리와 롤라)의 이야기가 주된 극의 흐름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지분이 적다.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짙은 감성을 호소하던 김지우(오른쪽)는 로렌으로 분해 열연하는데, 특히 자신의 솔로 넘버 '연애의 흑역사(History of Wrong Guys)'는 초연 때 정선아의 로렌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나다. 니콜라(왼쪽)는 다소 아쉬운데, <난쟁이들>의 백설공주로 무대를 휘저었던 신의정 배우의 끼가 다 발산되기에 니콜라의 분량이 부족하다. 솔로 파트라도 하나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터인데….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돈 심재현(왼쪽)과 고창석(오른쪽)은 돈 역에 캐스팅된 배우들이다. 돈은 전형적인 남성성,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끊임없이 롤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이지만, 권투 시합 이후의 변화 그리고 마지막에 직접 킹키부츠를 신고 밀라노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의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편견을 주변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깨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 곽우신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엔젤들 <킹키부츠>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인 엔젤들. 앙상블이면서 댄서인 이들은 존재 자체로 무대에서 가장 강렬한 포인트를 찍는다. ⓒ 곽우신


다른 역할들에 비해 주인공 찰리가 살짝 아쉽지만, 이지훈이나 김호영 두 배우 모두 자신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기념비적인 도전을 수행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 일단 첫 시도치고는 선전하는 모양새이다. 특히 이지훈의 '스텝 원(Step One)'과 김호영의 '소울 오브 어 맨(The Soul of a Man)'이 이미 강한 흡입력을 뿜어내는 점에서 발전 가능성도 엿보인다. 초연 때 찰리를 맡은 배우 김무열이 개막과 폐막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던 것처럼 갈수록 나아지기를 바라본다.

여기에 화려한 조명과 눈을 사로잡는 의상이 더해진다. 쇼 뮤지컬의 교범이라고 할 만한 <킹키부츠>는, 쇼 뮤지컬의 기본에 충실하다. 보는 재미를 강조하여 관객의 시각적인 부분을 극한까지 만족시킨다. 듣는 재미는 또 어떤가. 초연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익히 알듯이, 신디 로퍼의 작업물은 굉장하다. 한 곡 한 곡 모두 훌륭하지만,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넘버(음악)의 배치가 특히 도드라진다. 재미와 감동의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다가 어느새 눈가를 훔치게 한다. 배우와 관객이 함께 춤출 수 있는 커튼콜도 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한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섹스 이즈 인 더 힐(Sex is in the Heel) 아름다운 남자, 예쁜 남자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롤라와 엔젤들. 페미니즘이 구원하는 건 여자만이 아니다. ⓒ 곽우신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점은, 이 모든 요소가 묵직한 메시지와 흥미로운 서사에 잘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노래만 듣기 좋거나, 엉망인 극을 살려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에게 연민이 가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은 <킹키부츠>라는 이름 아래에 완결성 있는 꼴을 잘 갖추고 있다. 노동자(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나라 영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종종 볼 수 있는(<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려 보라), 현실 고발과 노동 가치의 존중을 저변에 깔았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유달리 부족한 부분 없이 탄탄하게 흘러가는 이 극에서 무엇보다 눈이 가는 건, '남자다움'에 대한 편견을 벗고 '나다움'을 찾아 나가는 주인공의 갈등과 화해이다. 사실 세상이 정한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 말 자체가 과연 온당한 조어인지 물음표가 붙지만, 사회가 정한 그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관계없다. 남자다운 여자이든, 여자다운 남자이든 중요한 건 그 '다움' 앞에 '나'가 붙을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니까.

누구도 나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할 수는 없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완성된 킹키부츠 표준 남성의 몸무게를 지탱할 정도로 튼튼하면서, 매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꾸며줄 수 있는 아이템. 킹키부츠는 드래그 퀸을 위한 맞춤형 패션 아이템이다. 누구나 '나다움'을 찾기 위해서는, 그 나다움을 잘 표현하기 위한 나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모두가 똑같이 따라하는, 기성 사회가 강요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 곽우신


하지만 사회는 각자에게 존재하는 나다움의 개성보다는, 통념에 걸맞은 인간을 요구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남자다움도 마찬가지이다. '어디 가서 맞느니 차라리 때려라'라든가 '남자는 우는 거 아니다'라든가와 같은. 물론 이런 잔소리에 단순히 자식을 통한 욕망의 대리 실현만 포함된 건 아니다. 굳이 모나게 현실의 풍파를 겪느니, 둥글둥글하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길을 따라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어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그저 다수가 걷는 길을 따라, 별다른 감흥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행복할까. 그런 모습을 보는 우리의 부모는 정녕 만족해할까.

누구도 우리의 인생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 '누구도'에는 가족도 포함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거친 세상의 가시밭길에 발이 다치지 않도록 튼튼한 구두를 신겨주는 것뿐이다. 그 구두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내 인생을 걸어나갈지는, 내가 결정할 뿐이다.

찰리와 롤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어떻게든 이 시골을 벗어나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찰리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공장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자신이 '프라이스 앤 선'의 사장이 될 것이라 상상치 못했던 그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떠밀려진 이 책임을 억지로 수행하느라 버둥거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신의 구두 끝이 정말로 이 공장을 향하고 있었음을. 어렸을 적 보아왔던 가족들(노동자)과 함께 이 일터이자 삶터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아름답고 위대한 신발을 만드는 것. 그게 그의 꿈이자 열정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버지의 유지를 이으려 노력하던 찰리는, 아버지가 자신(찰리)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고 공장을 팔려고 했었던 사실을 안 후에도 밀라노에 가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찰리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프라이스 앤 선 공장으로 돌아왔고, 이 구두 공장을 훌륭하게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소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롤라는 아버지의 소원과는 달리 권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드래그 퀸으로 남았고, 브래지어와 하이힐을 한 채 노래를 부른다. 프라이스 앤 선 공장의 디자이너가 된 후에도 그는 힐을 신고 스카프를 두른다. '정상적인' 남자 옷을 입은 사이먼일 때 그는 부끄럽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힐과 드레스만 있다면 누구든 무릎 꿇릴 수 있는 넘치는 자존감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남자답지 못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던 아버지와의 연은 끊긴다. 아들과의 연은 끊으면서 담배는 끊지 못해 요양병원에 가 있는 아버지를, 롤라는 계속 원망하고 있다.

요양원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롤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찰리는 말한다. 만약 남자다움이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뜻하는 것이라면, 세상 전체와 맞서 싸우는 롤라만큼 남자다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남자다운 게 아니다. 롤라다운 것이었다. 휠체어 앉아 있는 아버지 앞에 누구보다 슬프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그.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아버지 앞에 노래하는 아들 <킹키부츠>의 장점 중 하나는, 아들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아버지들을 그저 파괴하고 싸워야 할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는 것이다.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법 그리고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킹키부츠>는 이야기 한다. ⓒ 곽우신


"그대 이제 날 잊나요. 내 얼굴 보기조차 싫겠죠. 춤추는 내 모습도, 행복한 목소리도 더 이상 의미 없어. 모르죠, 진짜 내 모습을. 가장 거짓 없고 진실한 나. 하지만 이 순간 난 네 옆에 서있어. 이대로 그대 마음속에 새겨줘, 나를. 이해해줘요, 이 모습 그대로. 놓지 마. 날 포기하지 마, 나를.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줘도, 우린 서로가 너무도 소중한 걸. 그대 마음속에 새겨줘, 나를. 날 받아줘요. 이 모습 그대로." - 뮤지컬 <킹키부츠> 2막 No.15 '그대 맘 속에 나를 새겨줘(Hold me in Your Heart)' 중에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롤라. 노래를 마친 후 이별 인사를 하고 나오는 롤라의 손을 아버지는 꼭 부여잡는다. 그건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교차하는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대사 없이 잠시간 흐르는 그 정적이 묵직하다. 찰리와 롤라의 다른 선택은 같은 곳으로 귀결된다. 내가 가고 싶은 길, 나다움을 찾아 나섰던 그 길로.

찰리의 아버지도, 롤라의 아버지도 사실은 자신의 아들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만 아들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 걸어가는 길이, 그 행복에 닿기도 전에 지나친 불행을 감내해야 할까 봐 나무라고 말렸다. 하지만 두 아들이 그 길의 끝에 결국 손에 '나다움'을 쥐었을 때, 누구보다 축하하고 안아주는 것 역시 이 아버지들이었다. 극의 마지막, 찰리와 롤라의 어렸을 적 모습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각자의 아버지 품에 안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가슴에 안았다.

연휴 동안 학업, 취업, 결혼 등에 관한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데 지친 당신이라면, 이 뮤지컬이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 세상 풍파 앞에 맞서려는 자녀에 대한 걱정이 지나친 부모라면,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를 거스르고 나만의 길을 찾기를 주저하는 자녀라면, 그래서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준 사이라면 더더욱.

만약 그런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함께 손을 잡고 이 작품을 보기를 추천한다. 블루스퀘어를 나오는 가족의 손은 찰리와 롤라, 그리고 두 아버지들이 서로를 안았던 것처럼 뜨거우리라. 뮤지컬 <킹키부츠>의 마지막 넘버는 '저스트 비(Just Be)'라고 외친다.

뮤지컬 <킹키부츠> 프레스콜 지난 9일 오후,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뮤지컬 <킹키부츠>의 재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은 찰리가, 드래그 퀸 롤라의 도움을 받아 80cm 길이의 드래그 퀸 전용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로 지난 2014-2015 재연 이후 1년 8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지훈·김호영(찰리), 정성화·강홍석(롤라), 김지우(로렌), 고창석·심재현(돈), 신의정(니콜라) 등이 출연하며 특히 앙상블인 엔젤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 밀라노 패션쇼 그리고 화해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지난 2일 개막한 <킹키부츠>는 오는 11월 13일까지 상연된다. 극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 넘버부터 커튼콜까지 이어지는 그 '흥'은 관객을 일어설 수밖에 없게 한다. 보고 듣는 재미와 메시지를 잘 버무린 <킹키부츠>를 놓치지 말자. ⓒ 곽우신


[관련 기사]
[2014-2015 킹키부츠] 하이힐에 가짜 가슴 달아도... 나는 '나'


킹키부츠 롤라 찰리 신디로퍼 드래그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