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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핀 야생화는 뜨거운 태양과 모진 비바람을 홀로 맞으며 견뎌내고서야 이름 모를 들꽃이 됩니다. 들꽃은 꾸밈없는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합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꺾이지 않고 꽃을 피웁니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은 발에 치일 정도로 널려 있고 쉽게 밟히고, 쉽게 꺾이는 들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간제, 파견, 하청, 특수고용, 계약직 등의 시시각각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들꽃 같은 존재로 느껴집니다.

무수히 많은 들꽃들이 시멘트 바닥을 뚫고 자라는 구미공단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등을 만드는 전기전자 산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2005년 구미공단에 입주한 일본기업 아사히글라스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용 유리 기판을 만듭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마스크와 보호안경, 토시를 착용하고 있으면 사람 키만 한 유리가 15초에 한 장씩 라인에 들어옵니다.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식사시간은 20분. 휴게실로 배달되는 식어버린 도시락을 먹고, 허겁지겁 담배 한 대 피우고 나면, 동료와 식사 교대를 해야 합니다.

일하다가 관리자에게 찍히면 징계로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 징벌용 조끼를 입고 일합니다. 9년을 일해도 오늘 입사한 신입사원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받습니다. 아사히글라스 안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9년 경력자와 신입사원이 똑같은 월급

경북 구미시 구미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 내걸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걸개그림.
 경북 구미시 구미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 내걸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걸개그림.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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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산업단지를 사람과 기술, 산업과 문화가 융합 발전하는 창의와 혁신의 창조융합산업단지로 탈바꿈시켜 창조경제의 거점이 되도록 해나가겠습니다. 이와 함께, 산업단지 환경개선과 안전사고 예방노력을 강화하여 삶의 질이 보장되는 쾌적하고 안전한 행복산업단지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산업단지공단 황규연 이사장의 말입니다. 1960-1970년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시로 이끌려 나왔던 십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잠 안 오는 약을 복용하면서 닭장 같은 공간에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열 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산업역군이라 불렀지만, 한국사회는 '공돌이' '공순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고, 무시와 혐오의 시선으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공순이와 공돌이의 아들딸은 오늘 비정규직으로 가난과 사회적 멸시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일본 외국인투자기업인 아사히글라스는 경상북도와 구미시로부터 특혜를 받고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50년간 토지 무상임대, 5년간 국세 전액 감면, 15년간 지방세 감면의 특혜를 받고 국내에 들어온 기업입니다.

연평균매출 1조, 연평균 당기순이익 800억, 사내유보금만 7200억으로 수치만 보더라도 잘 나가는 알짜기업입니다. 한국에서 아사히글라스가 얻은 눈부신 수익은 외투기업에 대한 특혜와 비정규직이라는 질 낮은 일자리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일한 지역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일본기업, 특혜 받고 저임금 비정규직 사용

2015년 5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노동자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아사히글라스는 문자 한통으로 170명을 하루아침에 해고했습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입니다.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에서 9년을 일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쫓아냈습니다(관련기사: 9년간 최저임금 받았는데, 노조 만들었다고 해고?).

우리는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공장 앞에서 짐 싸들고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7월경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 구미지청에 부당노동행위와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노동위원회에도 부당해고 구제신청도 냈습니다.

2016년 3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아사히글라스와 하청업체의 부당노동행위 공모를 인정했습니다. 중앙노동위는 아사히글라스에게 "해고된 근로자들에 대한 생활안정 및 재취업 등 지원대책을 마련하라"는 이례적인 판정을 내렸습니다. 아사히는 중노위 판정을 인정하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고용노동부 구미지청은 1년이 넘도록 불법을 판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미시청은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판정 이후인 지난 4월 21일 구미시 공무원과 구미시가 위탁한 용역업체 직원 700명을 동원해서 길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몸 누일 천막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했습니다.

간신히 법으로 이겨도

지난해 9월 경북 구미시 구미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서 열린 연대한마당 풍경.
 지난해 9월 경북 구미시 구미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서 열린 연대한마당 풍경.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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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어쩌다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줘도 해고된 노동자들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수년간 거리에서 싸워야 작은 성과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길거리 천막농성장에서 세 번의 명절을 보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계는 길게 싸우는 만큼 절박해집니다. 사용자들은 그것을 알고 법대로 하자며 시간끌기를 합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보낸 1년 4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6개월은 실업급여, 6개월은 금속노조에서 지원을 받으며 지금껏 싸웠습니다. 이제 생계비 지급이 끝났습니다. 생계비 마련을 위한 CMS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2300명의 후원자를 통해서 조합원들에게 생계비로 백만 원이라도 지급하며 투쟁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2300명의 소중한 후원자를 절박한 마음으로 찾고 있습니다.

11월이 되면 저희들의 싸움이 500일이 됩니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0월 17일부터 2주 동안 서울에 올라가 아사히글라스의 불법 해고와 잘못을 시민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11월 4일에는 구미 아사히 공장에서 500일 결의대회를 엽니다. 힘들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싸워나가려고 합니다.

박정희와 박근혜의 도시, 구미의 공단에는 민주노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저희가 유일합니다. 콘크리트를 뚫고 간신히 피어난 들꽃을 저들은 밟아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싸움이 밑불이 되어 공단 곳곳에서 민주노조의 들꽃이 피어나도록 할 것입니다.

ⓒ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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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장입니다.



태그:#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문자 해고, #부당노동행위, #구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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