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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투쟁은 후세역사에 의해 평가받을 것이며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나가리라.' - 87년 가을, 중앙도서관 옥상 벽서 중
▲ 독재 타도 '우리의 투쟁은 후세역사에 의해 평가받을 것이며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나가리라.' - 87년 가을, 중앙도서관 옥상 벽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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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은 건국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모두에게 특별한 날이다. 30년 전, 교정을 '민주화'의 물결로 가득 채운 '10.28 건대항쟁'의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건국대학교 교내 언론 <건대신문>은 건국대학교 민주동문회인 '청년건대'의 도움으로 당시 탄압 등의 이유로 보도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한 사진 40여 장을 사진전 형태로 최초 공개했다. '건대항쟁 30주년 기념 <건대신문> 미보도 사진전'은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제1학생회관에서 오는 11월 2일까지 전시된다.

<건대신문>의 부국장으로 이번 사진전을 준비한 기자는, 30년 전 사진 속에서 '2016년 오늘'을 봤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당시 대학생들처럼, 오늘날의 대학생들 역시 '비선 실세 최순실'을 규탄하며 다발적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건대항쟁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당시 외쳤던 '민주화'의 목소리는 아직도 유효하다. 30년 전으로 퇴보한 듯한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건대항쟁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 학생 운동권은 크게 '자민투'와 '민민투'로 양분돼 있었다. 애학투련은 이들을 하나로 모아 공동의 실천방향을 정하자는 의도로 발족됐다. 이들은 '반독재' '반외세' '평화통일'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날 3000명에 이르는 각지의 대학생들이 애학투련의 이름 아래 모여 들었다고 한다.
▲ 애학투련 결성식 당시 학생 운동권은 크게 '자민투'와 '민민투'로 양분돼 있었다. 애학투련은 이들을 하나로 모아 공동의 실천방향을 정하자는 의도로 발족됐다. 이들은 '반독재' '반외세' '평화통일'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날 3000명에 이르는 각지의 대학생들이 애학투련의 이름 아래 모여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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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 한 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 27개 대학에서 2,000여명이 "반독재, 반외세 평화통일"의 구호아래 모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들을 '좌경용공' 세력으로 취급하여 전경을 투입했고, 학생들은 구속을 피해 불가피하게 농성을 시작했다.
▲ 폭풍전야 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 한 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 27개 대학에서 2,000여명이 "반독재, 반외세 평화통일"의 구호아래 모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들을 '좌경용공' 세력으로 취급하여 전경을 투입했고, 학생들은 구속을 피해 불가피하게 농성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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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바 '화형식'을 위해 준비된 전두환 허수아비 옆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의 허수아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반외세, 반미 감정이 엿보인다.
 이른 바 '화형식'을 위해 준비된 전두환 허수아비 옆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의 허수아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반외세, 반미 감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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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바 '화형식'을 위해 준비된 전두환 허수아비 옆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의 허수아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반외세, 반미 감정이 엿보인다.
▲ 반미반독재 이른 바 '화형식'을 위해 준비된 전두환 허수아비 옆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의 허수아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반외세, 반미 감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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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에서 모인 3000여 명의 대학생들은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개최했다. 이들은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평화통일" 구호를 외치며 전두환 정권을 규탄했다.

군부독재를 비판한 학생들이 마주한 것은 공권력의 폭력이었다. 애학투련 결성식이 마무리될 무렵 백골단을 포함한 전경이 교정으로 물밀 듯 들이닥쳤고, 학생들은 전경을 피해 건물로 숨어들었다.

행정관, 사회과학관(현, 경영대), 학생회관, 도서관 등에서 66시간 50분의 농성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은 "6인에 라면 1개, 4인에 빵 1개, 3인에 초코파이 1개"(건대항쟁 1주년 대자보 문구)를 나눠 먹으며 공권력의 폭력에 맞섰다.

학생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던 그 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에게 '좌경용공분자' '빨갱이' 낙인을 찍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이들"이라고 언론을 통해 보도했다. 이후, 강제 진압을 통해 학생 1500여 명을 연행하고 1288명을 구속했다. 검찰은 398명을 기소했다. 단일 사건으론 건국 이래 최다 구속, 최다 기소 사건이었다.

백골단을 필두로 행정관에 들이닥친 전경은 끝까지 저항하던 학생들을 옥상까지 몰아넣었고, 결국 진압, 체포했다. 건대항쟁은 건국 이래 단일 사건으로는 연세대사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 1,288명을 기록했다. 그렇게 66시간 50분의 투쟁은 끝이 났다.
▲ 허탈 백골단을 필두로 행정관에 들이닥친 전경은 끝까지 저항하던 학생들을 옥상까지 몰아넣었고, 결국 진압, 체포했다. 건대항쟁은 건국 이래 단일 사건으로는 연세대사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 1,288명을 기록했다. 그렇게 66시간 50분의 투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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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8일, 애학투련 결성식에 전경이 들이닥쳤다. 진압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행정관, 사회과학관, 학생회관, 도서관 등에 숨어들었다. 자의반 타의반 점거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출입구와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사복경찰을 경계해 출입을 통제했다. 행정관이 점거되자 최소한의 학적업무는 대학원 교학과에서 임시로 처리하게 됐다.
▲ 출입금지 1986년 10월 28일, 애학투련 결성식에 전경이 들이닥쳤다. 진압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행정관, 사회과학관, 학생회관, 도서관 등에 숨어들었다. 자의반 타의반 점거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출입구와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사복경찰을 경계해 출입을 통제했다. 행정관이 점거되자 최소한의 학적업무는 대학원 교학과에서 임시로 처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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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농성이 끝난 후 행정관 앞모습. 불에 탔거나 부서진 잔해들이 당시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 후유증 점거농성이 끝난 후 행정관 앞모습. 불에 탔거나 부서진 잔해들이 당시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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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학투련 소속 학생들이 일감호 옆을 행진하고 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구호를 외치고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이다.
▲ 하나 되어 행진 애학투련 소속 학생들이 일감호 옆을 행진하고 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구호를 외치고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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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항쟁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독재정권이 '좌경용공' '빨갱이'라고 낙인찍은 자국은 아직도 건대항쟁에 남아있다.

이상근(연세대·85학번) 건대항쟁 계승 사업회 준비위원장은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몇몇 인원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라면서도 "하지만 이는 개별적 차원의 보상이었고, 공식적으로 정부가 건대항쟁에 대한 성격을 조작해 '좌경용공' 누명을 씌운 것을 인정하며 무죄로 처리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분신까지 자행하며 구속된 이들의 명예와 건대항쟁 이후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던 경성대 진성일 열사와 고문과 진압과정의 폭력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입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신대 곽현정 열사의 한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30년 전, 서울 화양동 건국대학교 교정에 울려 퍼진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평화통일" 구호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하다. 사드 배치는 반외세 자주화를, 고 백남기 농민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최순실은 반독재 민주화를, 북한의 핵실험은 평화통일의 구호를 연상케 한다.

건대항쟁 기념일이 오기 2일 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박근혜 정부는 사퇴하라"고 발표한 건국대 시국선언문의 내용은 30년 전 대학생들이 군부에 요구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록됐으나, 보여지지 못했던 사진들은 지금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같이 짚어봤으면 한다.

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에는 이른 바 '독재 군부정권 화형식'도 있었다. 헝겊으로 감싼 작은 허수아비에 전두환 등의 이름을 적어 넣고 불태우는 행사였다.
▲ 화형식 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에는 이른 바 '독재 군부정권 화형식'도 있었다. 헝겊으로 감싼 작은 허수아비에 전두환 등의 이름을 적어 넣고 불태우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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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에는 이른 바 '독재 군부정권 화형식'도 있었다. 헝겊으로 감싼 작은 허수아비에 전두환 등의 이름을 적어 넣고 불태우는 행사였다.
▲ 화형식 애학투련 결성식 행사 중에는 이른 바 '독재 군부정권 화형식'도 있었다. 헝겊으로 감싼 작은 허수아비에 전두환 등의 이름을 적어 넣고 불태우는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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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문(후문)을 통해 전경 부대가 돌입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얼굴을 가린 채 각목과 화염병 등을 이용해 전경의 돌입을 방해하고 있다. 학생운동과 그 진압과정에서의 물리적 충돌은, 당시엔 매우 빈번한 일이었다.
▲ 돌입 건국문(후문)을 통해 전경 부대가 돌입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얼굴을 가린 채 각목과 화염병 등을 이용해 전경의 돌입을 방해하고 있다. 학생운동과 그 진압과정에서의 물리적 충돌은, 당시엔 매우 빈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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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학생들은 구속된 채 취조를 받느라 어쩔 수 없이 강의에 출석하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는 일이 잦았다. 이에 당시 본부는 기소유예,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학생들에 한해 86학년도 2학기 학사경고를 모두 철회했다.
▲ 학교로 돌아오라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학생들은 구속된 채 취조를 받느라 어쩔 수 없이 강의에 출석하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는 일이 잦았다. 이에 당시 본부는 기소유예,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학생들에 한해 86학년도 2학기 학사경고를 모두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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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건대항쟁, #건대항쟁 30주년, #사진전, #미보도, #최초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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