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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암이 살았던 해남읍내 해리 일대의 전경.
ⓒ 정윤섭
<미암일기>의 저자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인 유계린은 해남 땅에서 금남 최부의 사위가 되어 성춘(成春)과 희춘(希春) 두 아들을 낳는다. 이로 인해 해남은 미암에게 본가이자 곧 외가가 된다. 미암은 나중에 처가인 담양으로 옮겨가 지금은 담양을 중심으로 자손들이 번창해 있지만 그 기반은 해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미암의 생가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미암바위.
ⓒ 정윤섭
지금 미암의 생가 터라고 하는 곳이 해남읍 해리에 남아있다. 예전에는 이 터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미암의 집터에 자리 잡아서인지 아파트의 이름 또한 '미암아파트'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호를 짓게 하였다는 '미암바위'가 머리 위처럼 올려다 보인다. 이곳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이곳을 '미암산'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지명을 따 붙여 '미암교회'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모두 미암 유희춘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재 미암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 미암의 생가 터 일대.
ⓒ 정윤섭
미암의 외조부인 금남 최부와 어초은 윤효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정호장의 사위가 되어 재지사족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미암이 살던 16C의 조선은 사족(사대부)들이 주도권을 잡고 살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옛날하면 서울(한양)과 지방이 아주 격리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미암일기>에 나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미암은 서울에 있는 동안 지방인 해남과 끊임없이 인편과 편지를 통해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과 지방과의 끊임없는 교류

▲ 미암일기.(출처 미암 유희춘연구집)
ⓒ 정윤섭
미암은 처가인 담양으로 본가를 옮기게 되지만 외가이자 본가이기도 하였던 해남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친 누님과 첩이 살고 있기도 하였지만 해남 윤씨가와 맺어진 관계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집안이 서로 통혼관계를 이루며 미암의 딸은 윤항(윤효정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윤관중과 결혼, 윤관중은 미암의 사위가 된다. 최부는 유희춘의 조부가 되는 셈이다. 당시 재지사족들이 이러한 통혼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문중의 결속을 다져 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통혼관계 속에서 해남 윤씨가와의 관계를 흥미있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미암일기>다. <미암일기>는 선조실록을 쓰는데 참고할 만큼 중요한 기록으로 미암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간의 기록을 집대성한 방대한 기록으로 당시 생활사를 살펴보는 데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창권 선생(고려대 교수)은 <미암일기>의 생활사 부분을 재해석하여 '나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를 저술 당시 사회를 새롭게 살려놓아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미암일기>를 통해 보면 미암의 본가이자 외가였던 해남에서의 생활과 통혼관계로 맺어진 해남윤씨가와의 생활을 실감 있게 살펴볼 수 있다.

<미암일기>에는 서울(한양)에서 지역의 관련인물들과 주고받은 기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누이와 첩이 살고 있고 자신의 사위인 윤관중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암일기>의 앞부분인 제1, 2권(冊)에 나타난 부분만 보아도 이러한 기록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16세기의 생활사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서울의 조정(정가)이야기에서부터 집안 일가친척과, 첩, 노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생활이 그림처럼 지나간다.

미암은 해남에 살고 있는 누님(오천령의 처)과의 사이가 각별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첩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미암은 본처에게서 남매를 두었고 첩의 소생으로 딸 5명을 두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미암과 해남의 누님이 인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근황을 묻는 기록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정묘년(1567년), 10월 19일 "해남의 경방자(공문을 전달하는 하인)가 윤동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안동대도호부사 윤복(윤효정의 넷째 아들)과 해남누님과 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정묘년(1567년) 12월 18일 "멧돼지의 두 다리와 생전복을 생원 윤항(미암의 사위인 윤관중의 생부)과 안동부사 윤복댁에 보내고 또 뒷다리를 해남 누님댁에 보냈다."

무진년(1568년) 정월(1월) 30일 "저녁에 해남 누님댁의 종 개동이가 왔는데 누님댁과 첩이 모두 무고하다 한다."

무진년(1568년) 6월 18일 "해남에서 정인향(鄭仁香)이 왔는데 첩과 해남누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해남에는 누님과 첩이 살고 있기 때문인지 수시로 편지와 인편이 오가며 서울과의 연락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땅의 가장 변방고을인 해남이지만 육로와 해로를 통해 서울(한양)과 지속적으로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은 해남 윤씨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알 수 있다.

정묘년(1567년) 11월 15일 "참판 윤의중(윤효정의 둘째아들)과 이중호(李仲虎), 예조정랑 이증(李增), 첨지 윤행, 사예 이원록(李元祿)이 찾아왔다. 객들이 가버린 뒤에도 윤의중과 윤행, 이중호가 오래 머물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기록을 통해서 미암은 해남 윤씨가 인물들을 따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미암은 해남 윤씨가의 사람들과 서울에서 만나며 해남(녹우당)을 오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정묘년(1567년)12월 8일 "백련동에서 서책을 가져왔다. 이것은 내 소유인데 경신년(1560년)에 윤랑(尹郞)의 집에서 옮겨온 것이다."

정묘년(1567년)12월 14일 "새참에 백련동의 생원 윤항댁에 가서 윤항, 안동부사 윤복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복과 장기를 두었다. 그들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윤항이 인배(관노)에게 벼 한섬을 주었다. 신시(申時)경에 집에 돌아왔다."


<미암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조선 16C는 재지사족이 지방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호장 아래서 성장한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을 비롯한 석천 임억령 등 모두가 중앙의 관계진출로 사족으로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감을 알 수 있다. 해남 윤씨가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윤효정의 아들인 윤구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과거 급제들을 통해 중앙에 진출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미암일기>에 등장하는 해남 윤씨가 인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16C 조선사회가 서울로의 관계 진출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기도 하였지만 이곳 조선의 가장 변방인 해남은 아주 먼 오지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울과 지방(해남)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교통로가 바닷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울과 해남의 거리는 단순히 공간적 거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해남 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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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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