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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마켓 프렌즈'가 함께 책을 읽는 모습
 '피치마켓 프렌즈'가 함께 책을 읽는 모습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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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과 델러는 부부입니다. 짐과 델러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짐과 델러는 가난합니다. 그래도 짐과 델러는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짐과 델러는 행복합니다..."

서울 마포구 상암고등학교 도서실, 수업이 모두 끝난 느지막한 시간에 둘씩 짝을 지어 나란히 앉은 학생들이 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번갈아 가며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하고, 뻔히 알만한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딘가 고등학교엔 어울리지 않는 풍경과 대화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몇 학생들의 말투와 행동도 낯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절반은 몸과 마음의 발달이 남들보다 느리다. 흔히 말하는 '발달장애' 친구들인 것. 이곳에선 이들 발달장애 학생들에게 책과 친구를 선물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상암고등학교에 발달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짝을 이뤄 함께 책을 읽는 동아리 '피치마켓 프렌즈'가 꾸려졌다. '피치마켓(Peachmarket)'은 겉보기에도 맛있고 실제로도 달콤한 복숭아처럼 정보의 불균형이 사라진 시장을 가리키는 경제용어다.

여기에 친구인 '프렌즈(Friends)'를 더해 '정보의 불균형을 함께 넘어서는 친구들'이란 뜻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피치마켓'은 이 실험을 이끌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세상에 없던 책

'피치마켓'의 두 번째 책 『O.헨리 이야기』
 '피치마켓'의 두 번째 책 『O.헨리 이야기』
ⓒ 피치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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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는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자라면서 나타나는 지적장애, 인지장애, 자폐 등을 가리킨다. 인지 기능과 감각 능력, 의사소통 능력, 사회적 행동 등 여러 방면에서, 발달장애인은 평균치에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발달장애인이 책을 읽기란 불가능해 보일 법 하다.

하지만 눈높이에 맞는 책에 약간의 도움만 더해지면 이들도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이들을 위해 나서지 않았을 뿐. 발달장애인의 독서 길라잡이를 자처한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는 직접 책을 만들고 발달장애인들을 모아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왔다.
  
"스무 살이 되도록 동화책밖에 읽을 수 없던 제 아들이 남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주셔서 정말 눈물 나도록 감사합니다."
  
발달장애 아들을 둔 어느 어머니가 '피치마켓'에 보내온 감사의 글이다. 함 대표는 힘들어 포기하고 싶던 때에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글이라고 털어놓았다. '피치마켓'이 하는 일이 얼마나 값진가를 보여주는 글이자 동시에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글인 셈이다.
  
'피치마켓'은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2015년 1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시작으로 O.헨리 단편집을 모은 <O.헨리 이야기> 그리고 지난 10월에 출간한 알퐁스 도데의 <어머니>까지. 이날 상암고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읽은 책은 <O.헨리 이야기>('크리스마스 선물')였다.
  
발달장애인들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동화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도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O.헨리 이야기> 표지에는 '특별한 사람을 위한, 꼭 필요하지만 세상에 없었던 책'이라고 작게 쓰여 있을 뿐, '발달장애'란 말은 없다. 발달장애인들이 이 책을 당당하게 읽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피치마켓'의 책은 비장애인들이 읽는 책과는 다르다. 앞에서 살펴봤듯 원작의 문체나 구성까지 옮기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라는 고전문학의 본령만은 놓치지 않고 담아내려 애쓰고 있다.

같은 것을 하기 보다 같이 하는 친구

발달장애 학생이 책을 읽은 뒤 쓴 독후감
 발달장애 학생이 책을 읽은 뒤 쓴 독후감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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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세상에 없던 책을 만들고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힘에 부쳤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책 읽는 법을 가르칠 사람이 턱없이 적었다. 오랜 고민 끝에 또래가 '책읽기 친구'로 나서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더 많은 발달장애 청소년이 책을 접하게 할 수 있는 방안으로, 또 지속가능한 교육 모델로 시도해볼 만하다 판단했다. 때마침 서울시 리빙랩(Living Lab) 사회혁신 실험 공모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을 접하게 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응모를 결심했다.

상암고 교장선생님과 특수학급 교사 등 여럿의 도움으로 9명의 장애학생과 10명의 비장애 학생을 모았다. 그리고 한 달여의 긴 준비를 거쳐 10월 7일 드디어 첫 수업을 시작했다.
  
"그냥 새로운 친구를 한 명 사귄 것 같아요."
  
이번 실험에 '독서 친구'로 나선 1학년 지훈이의 말이다. 지훈이도 처음엔 발달장애 학생들이 책을 읽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편견은 보기 좋게 깨졌다. 그의 짝이 된 동갑내기 승우(가명)는 깜짝 놀랄 만큼 활발하고 똑똑했다. 그날 이후 지훈이는 날마다 쉬는 시간에 특수학급을 찾아 승우와 인사를 나눈다.
  
"도와 준 것도 별로 없어요. 오늘도 저는 손가락으로 짚어 주기만 했을 뿐이지 다 혼자서 읽고 혼자 이해한 거예요."
  
사실 둘은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특수학급 학생들도 일반학급에 이름을 올려놓고 가끔 같이 수업을 듣는데, 둘은 같은 반이었다. 승우는 가끔 수업을 들으러 올 때마다 내내 엎드려 잠만 자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였다.

그러던 승우가 신이 나서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말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 어쩌면 승우처럼 조금 느린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같은 것을 배우는 수업'이 아니라 '같이 배울 수 있는 수업'이었을지 모른다.

탐스러운 복숭아가 열리길 기대하며

'피치마켓'의 책 본문과 교육자료
 '피치마켓'의 책 본문과 교육자료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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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마켓'은 학교마다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함께 책을 읽는 동아리가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실험이 끝나는 대로 동아리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공개할 생각이다. 마침 올해 교사 직무연수 기관으로 선정돼 겨울방학엔 이번 실험을 정리해 소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학교에 이런 동아리가 만들어지려면 이런 식의 만남과 교육이 비장애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줘야 해요. 스스로 교육 자료를 만들고 설명을 하면서 비장애 학생도 사고력과 논리력, 공감능력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함의영 대표는 남은 기간 동안 '독서 친구'로 나선 학생들끼리 모여서 교육 자료를 함께 만들며 토론하는 기회도 만들 생각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두 학교에서도 동아리를 만들고 싶다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송파공고에서도 뒤늦게 동아리를 꾸렸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학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연합동아리도 곧 공개모집을 마치고 첫 수업에 들어간다.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가능성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 다름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발달장애인 수는 약 20만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손에 책을 쥐여주는 일은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선물하는 일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도록 돕는 '피치마켓'의 아름다운 도전이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결실을 맺길 기대해본다.

'발달장애ㆍ비장애 학생의 참여형 통합교육 시스템 개발' 실험은...
올해 8월 서울시(서울혁신파크) 리빙랩 사회혁신 실험 공모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에 선정된 6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이 실험은 발달장애 청소년의 책읽기를 돕기 위해 비장애 청소년이 '책읽기 친구'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의 눈높이에 맞는 책과 교재 그리고 대화법이 활용된다.

발달장애 학생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비장애 학생에게도 학습능력을 높이고 장애인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통합교육의 대안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실험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서울혁신파크 블로그 http://s_innopark.blog.me 와 리빙랩 사회혁신 실험 공모 블로그 http://innovationpark.kr/livinglab 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리빙랩, #발달장애, #피치마켓, #사회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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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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