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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 공씨책방 앞. 가을빛이 짙다.
 2016년 가을, 공씨책방 앞. 가을빛이 짙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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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라는 해를 남달리 돌아보곤 합니다. 1994년을 열쇳말로 삼은 연속극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그 연속극이 큰 줄거리로 다루는 '사랑놀이'에는 그리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1994년에 제 마음이 끌린 곳은 서울 어디에나 참으로 많은 책방이었습니다.

서울에는 커다란 책방도 많고, 인문사회과학책방도 많으며, 헌책방도 많았어요.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새로운 살림(배움살림)을 짓던 이즈음 '작은 인천에 없던 엄청난 책방'하고 '그 엄청난 책방에 가득한 더 엄청난 책'을 만나면서 '할 일이 많네' 하고 깨달았어요. 이 많은 책을 읽자면 하루 스물네 시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라구나 싶었지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서니, 학과 모임뿐 아니라 여러 동아리 술자리라든지 고향 동문 모임까지 날이면 날마다 '술을 마시는 일'이 잇달아요. 대학생은 으째 이래 술만 퍼 마시나 싶었는데, 저는 술자리에 가더라도 늘 책방을 먼저 들러서 두 시간은 책을 보았고,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조용히 빠져나와서 한 시간 즈음 책을 보다가 다시 살짝 술자리에 끼곤 했습니다. 때로는 술상 밑에 책을 펼쳐서 몰래 읽기도 했어요.

2001년 어느 여름날
 2001년 어느 여름날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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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서울 신촌이라는 곳을 처음 구경했어요. 요즈음도 신촌은 술 마시는 사람으로 넘실거리지만 그무렵에도 신촌은 온통 '술 마시는 젊은 물결'이었어요. 서울이 매우 낯선 인천내기가 신촌거리를 처음 구경하면서 '대학교 선배'라는 이들한테 꼬치꼬치 물었어요. "여기 대학교 앞이지요?" "응. 그런데?" "그러면 여기 대학교 앞 인문사회과학책방하고 헌책방은 어디 있나요?" "몰라. 책방은 묻지 말고 술이나 마셔."

웬만한 선배는 '대학교 앞 책방'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즈음 '피시통신'이 한창 퍼졌고, 피시통신에 '서울 헌책방 순례'라는 글을 열두 꼭지 올린 박상준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이분이 쓴 글에 신촌에 두 군데 헌책방이 나왔습니다.

이분 글을 발판 삼아서 '인천내기한테는 너무 낯설고 어지러운 신촌거리'를 헤매었어요. 며칠을 헤맨 끝에 <공씨책방>을 찾아냈습니다. 찾아내고 보니 퍽 쉬운 길이었지만, 찾아내기까지는 여러 날 다리가 아프도록 온갖 골목을 누볐어요.

2002년 어느 날 저녁
 2002년 어느 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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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어느 날. 아직 책꽂이가 낮던 때.
 2002년 어느 날. 아직 책꽂이가 낮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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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추위가 안 가신 1994년 삼월 어느 날, 신촌백화점 앞길에서 신촌장로교회로 가는 길목, 이 길목 가운데에서도 밑으로 움푹 파인 자리에 헌책방 <공씨책방>이 있었어요. 헌책방 옆에는 까만염소를 고는 집이 있었고요.

신촌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공씨책방>에 들렀어요. 어느 날에는 나이 지긋한 손님이 하는 말을 귓결로 듣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요. 옛날 광화문 자리가 좋았다는 말씀을 신촌에 작게 웅크린 헌책방에 들러서 하시더군요.

그 어르신 말씀마따나 사람 발길 없는 움푹 파인 구석자리에 있는 〈공씨책방〉은 참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고 하는 헌책방에 깃든 '책'은 어느 하나 초라하지 않아요. 우리가 읽어 주기를 기다리는 책이요, 우리 손길을 받으면 새롭게 피어날 책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읽어 주면 기쁘게 빛날 책이요, 우리가 곱게 읽어 보면 눈부시게 날아오를 책이에요.

헌책방 <공씨책방>은 몇 해 뒤 신촌백화점 쪽에서 더 멀어진 자리로, 이러면서 신촌장로교회 고갯마루하고 가까워지는 자리로 옮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새로 옮긴 자리는 예전 자리에 대면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훨씬 적더군요. 어느 모로 보면 '세월과 유행에 밀려나는' 헌책방 모습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달리 보았어요. 까만염소를 고는 냄새가 자욱하던 구석자리 움푹 파인 골목보다는 앞이 환히 트이고 한결 조용한 이곳이 '책방 자리'로 아주 낫다고 여겼어요. 책을 볼 사람은 틀림없이 찾아오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터를 외려 반기리라 여겼어요.

2002년. 까만머리였던 책방지기는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습니다.
 2002년. 까만머리였던 책방지기는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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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모습.
 2002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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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하고 1995년 이태 사이에 서울역 언저리에 있던 숱한 헌책방은 한 군데를 남기고 모두 문을 닫습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헌책방은 아주 빠르게 문을 닫았어요. 문을 닫기 앞서 들른 헌책방마다 책방지기 아저씨나 아주머니는 몹시 고단한 낯빛으로 "이제 우리 시대는 끝났어요. 그동안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책을 읽는 사람도 다 사라질 듯해요. 젊은 사람들은 책을 안 읽고 컴퓨터만 하잖아요" 하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피시통신에 이어 인터넷이 막 움트려 하는 이즈음이에요. '책도 책방도 헌책방도 이제 몽땅 끝!'이라는 얘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곧잘 오르내렸어요. '종이 문명'은 끝이라는 소리가 높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흐름이나 물결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어요.

아무리 신문·방송에 '책은 끝! 책방도 끝! 헌책방은 더더구나 끝!'이라는 기사가 나오더라도 고개를 저었어요.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거 보라구요, 헌책방은 끝나지 않았어요. 잘 봐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싱싱하게 젊은 사람이 헌책방에서 날마다 대여섯 시간씩 죽치고 책을 읽어요. 여기 있는 이 젊은이는 안 보이나요?'

책방을 찾아온 할아버지.
 책방을 찾아온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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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공씨책방>이라고 하는 보물섬 같은 헌책방을 알려준 '서울 헌책방 순례'라는 글을 쓴 분은 열두 군데 헌책방만 다루었어요. 그러나 헌책방은 그무렵만 해도 청계천을 빼도 삼사백 군데가 넘었어요. 저는 '이 작은 마을헌책방이 문을 닫기 앞서 모든 마을헌책방을 사람들한테 알려서, 이 작은 마을헌책방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슬기를 베풀어 줄 책을 다리품을 팔아서 읽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헌책방 나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쓰기로 했어요.

이때가 또 1994년입니다. 대학교 구내서점하고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받는 돈으로 '우리말과 헌책방 이야기를 담은 소식지'를 찍어서 헌책방에 돌리고, 대학교 선후배한테 나눠 주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인 1998년부터는 '헌책방 길그림(지도)'을 그려서 곳곳에 돌리고 뿌리고 붙였어요. 헌책방 길그림은 '사람들이 헌책방 정보를 몰라서 헌책방을 못 알아본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렸어요. 아마 2002년이었지 싶은데, 그무렵 <공씨책방> 책방지기님은 제가 그려서 드린 '신촌 둘레 헌책방 길그림'을 살짝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공씨책방>은 젊은 손님이 많이 찾습니다.
 <공씨책방>은 젊은 손님이 많이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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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그린 신촌 둘레 헌책방 길그림 '일부'.
 2002년에 그린 신촌 둘레 헌책방 길그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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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책방> 책방지기님은 제 '신촌 둘레 헌책방 길그림'을 그 뒤로도 한두 해 동안 안 좋아하셨습니다. 이러다가 그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공씨책방> 셈대에 이 헌책방 길그림이 붙었어요. 드디어 이 길그림이 품은 뜻을 알아봐 주시는구나 싶어서 몹시 반가웠어요.

바야흐로 신촌 둘레 헌책방마다 서로서로 이웃 헌책방을 소개하는 숨결이 뿌리내리던 2005년 즈음이었어요. 2004년에 저는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책을 쓰면서 전국에 '서울 시내 헌책방 연락처와 주소'를 모조리 공개하기도 했어요. 2006년에는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이라는 책을 내면서 '전국 헌책방 연락처와 주소'를 몽땅 갈무리해서 공개했고요.

2003년. 눈이 온 어느 날.
 2003년. 눈이 온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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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즈음에는, 창고로 쓰던 자리를 터서 책방을 안쪽으로 넓혔다.
 2003년. 이즈음에는, 창고로 쓰던 자리를 터서 책방을 안쪽으로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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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첫무렵에 '까만염소를 고는 옆에 웅크린 작은 헌책방' 겉모습만 보며 <공씨책방>이 '끝났다'고 여긴 책손은 2016년 오늘 <공씨책방>을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헌책방 <공씨책방>은 지난 2013년에 서울 시내 헌책방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미래유산'으로 뽑혔습니다. 앞으로도 서울이 지킬 아름답고 오래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씨책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 앞에 그늘이 짙게 드리웁니다. 2016년 여름·가을 사이에 건물임자가 바뀌면서 하루 빨리 가게를 비우라고만 한답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서울시장 박원순 님도, 또 서울시에서 요즈음 한창 '서울 책문화'를 북돋우는 일을 하는 서울도서관도, 서울에 많이 있는 출판단체에서도, 이 '서울미래유산'에 아무런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고 해요. 서울시하고 서울도서관 쪽에서는 '관련 조례가 없다'는 까닭을 들며 도와줄 수 없다고 합니다.

문간에 있는 거울로 들여다보기.
 문간에 있는 거울로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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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에서. 2003년
 책방 앞에서.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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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로 보면 마땅한 일이에요. 이제껏 서울시나 서울도서관에서는 '마을책방·마을헌책방'을 돕는(지원하는) 정책을 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관련 조례'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서울시하고 서울도서관은 이제라도 '책방 지원 관련 조례'를 서둘러 마련할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 스스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놓고서 '책방 지원 관련 조례'가 없다는 핑계를 댈 일이 아니에요. 어서 관련 조례를 세우고, 앞으로 <공씨책방>뿐 아니라 서울 시내에서 40∼50년을, 또 예순 해를, 또 20∼30년을 마을살림을 가꾸고 지키는 일에 이바지한 크고작은 책방(새책방·헌책방)을 돕는 길을 열어야지 싶습니다.

도서관은 도서관대로 포근하며 아름다운 책터라고 느껴요. 헌책방은 헌책방대로 따스하며 고운 책터라고 느껴요. 마을책방은 큰책방(대형서점)하고 사뭇 다른 아늑하며 예쁜 책터라고 느껴요. '마을헌책방(동네헌책방)'은 마을사람이 가벼운 차림새로 언제나 드나들 수 있는 우물가나 쉼터 구실을 해요. 먼 곳에서 찾는 책손도 마을헌책방에서 따사롭고 아늑하며 즐거운 한때를 누려요.

2004년. 손님이 뜸하면 책방지기는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2004년. 손님이 뜸하면 책방지기는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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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책꽂이가 차츰 높아집니다.
 2004년. 책꽂이가 차츰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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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헌책방이 서울미래유산으로 뽑힐 수 있던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아주 대단하거나 번듯하거나 놀라운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작은 책 한 권에 서린 깊고 너른 숨결을 오래도록 정갈히 가꾼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책 한 권을 찾는 작은 책손을 헤아리는 곱고 넉넉한 손길이 있기 때문이에요.

작은 책방을 돕는 길은 대단한 정책이 되지 않아도 돼요. 아주 작은 정책이어도 작은 책방을 얼마든지 도와요. 어쩌면 바로 '작은 정책'을 마련해서 '작게 돕는 행정·제도·조례' 하나야말로 마을살림을 북돋우며 마을사람을 아끼는 길이 되리라 생각해요.
책방마실을 하는 즐거움이란. 2004년
 책방마실을 하는 즐거움이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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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책방지기 셈대. 아직 제 길그림이 놓이지 않았으나 머잖아 헌책방 길그림을 저 자리에 놓아 주십니다.
 2004년. 책방지기 셈대. 아직 제 길그림이 놓이지 않았으나 머잖아 헌책방 길그림을 저 자리에 놓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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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문고판을 묶어서 쌓은 모습.
 2005년. 문고판을 묶어서 쌓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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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하고 함께 늙어 가는 사다리.
 책방하고 함께 늙어 가는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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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책방 둘레 길가 바라보기. 이제 막 버스전용차선이 생길 무렵.
 2005년. 책방 둘레 길가 바라보기. 이제 막 버스전용차선이 생길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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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에 깃든 헌책방 <공씨책방> 책방지기 가운데 한 분인 장화민(60)씨와 9일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날 주고받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 요즘 <공씨책방> 이야기가 여러 매체에 나왔어요. 다른 매체에서도 책방에 닥친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지만, <오마이뉴스>를 보는 분들한테도 다시 한 번 어떤 일이 닥쳤는가를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난 7월 하순께 처음 연락이 와서, 또 8월 초에 내용증명이 왔어요... 책방을 비우라고. 다시 10월 5일에 2주 동안 시간을 줄 테니까 (책방을 비우고) 나가라고 했어요. 여기가 문화유산(서울시에서 2013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으로 되었잖아요. 서울시에 얘기했더니 별로 도와줄 게 없는 것 같다고 해요. 저희는 세를 좀 올리더라도 여기에 그대로 있고 싶은데 무조건 나가라고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2005년. 아직 박지성 축구선수를 잡지에서 만나던 때.
 2005년. 아직 박지성 축구선수를 잡지에서 만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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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어느 날 낮. 책방에 만화책을 사러 온 아이들.
 2005년 어느 날 낮. 책방에 만화책을 사러 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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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씨책방>은 처음에 광화문에 문을 열었고, 신촌현대백화점 옆에 있는 움푹 파인 골목으로 옮겼다가, 이 자리로 다시 옮긴 지 어느새 스물한 해가 되었네요.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옛 (건물) 주인하고 분쟁도 없었어요. 여기서 21년을 했잖아요. 새 주인은 여기 임대료가 싸다고 하지만, 예전에 이곳은 사람도 잘 안 다니고 썰렁했어요. 이쪽이 요즘 홍대 철길거리 때문에 특화거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건물 주인들은 그걸 보고 여기 세를 올려 받아야겠다고 하는가 봐요. 저희 바로 옆에 있는 가게 주인은 너무 속상하다고 더 비싼 세를 내는 곳으로 이사를 갔어요."

2006년. 이즈음 <공씨책방>은 책장사가 몹시 어려워서 한동안 '옷장사'도 했습니다.
 2006년. 이즈음 <공씨책방>은 책장사가 몹시 어려워서 한동안 '옷장사'도 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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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신촌이라는 곳은 여러 대학교가 모인 자리예요. 이 신촌에서도 큰길에 있던 헌책방은 <공씨책방> 하나였지요. <정은서점>은 연세대 앞문 건너편에 있었고, <숨어있는책>은 노고산동 골목 안쪽에 있고, <글벗서점>은 동교동로터리 쪽 큰길가에 2000년대가 넘어선 뒤에 새로 옮기셨고요. 아현동에서 헌책방 하시던 분들이 이곳 옆으로 옮겨서 2층에 <신촌헌책방>을 열기도 했지만 그만 문을 닫았지요. 참말로 <공씨책방>은 이제 이 신촌거리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헌책방이에요. 지난 스물한 해 동안 헌책방을 해 온 뜻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손님이 오시면 책 찾아 드리고, 책을 장만해 놓고 그런 것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손님이 오시면 책을 살펴 드리는 것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사건을 겪으며 생각하니까, 여기 와서 편안함을 느끼시는 분도 많이 있구요, 이곳이 안정감이라고 할까 그런 걸 느끼시는 분이 많은 걸 이번에 알았어요. 그래서 이런 일(책방을 빼라고 하는)을 서운해 하시는 분이 많고, 집 근처에 매일 가던 가게나 식당이 없어지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데, 여기 마을책방이 사라지면 쓸쓸하고 가슴이 허전하다는 분이 많아서, 이번에 이 책방이 그런 역할을 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이 책방 없어지면 어떡해, 큰일이네 하는 손님도 있어요."

옷장사랑 책장사를 함께 하던 2006년 어느 날 낮.
 옷장사랑 책장사를 함께 하던 2006년 어느 날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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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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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씨책방>은 2013년에 서울시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뽑기도 했지만, 마을을 지켜 온 헌책방이에요. '마을책방'이라는 곳은 어떤 구실을 할까요?
"마을책방이라는 곳은, 내가 늘 찾아가서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도서관 가면 여러 절차도 있어야 하고, 열람을 하려면, 회원증도 보여주고 해야 하지만, 책방에서는 그런 것 없이 어떤 책이든 다 찾아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다른 대형 신간서점을 가 봤어요. 대형서점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니까, 아, 우리 책방이 그 책방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책을 두었구나 하고 알았어요. 크기는 대형 신간서점보다 작아도 우리 헌책방들이 이렇게 다양하고, 책도 다양하구나 하고 이번에 알았어요."

- 책이 다양한 만큼 손님도 다양하겠지요?
"광화문에서는 아주 도서관 같았지.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던 도서관. 광화문에는 그 지하 매장에 소파도 있었어요. 어느 손님은 점심 드시고 거기에 와서 한숨 주무시고 책도 보시고 늘 그러시던 분이 있었어. 헌책방은 손님과 책방 주인과 대화가 원활하게 통하는 곳이라고 할까. 저녁에는 이모부하고 손님하고 책방이 토론장이 되기도 하고, 밤에는 사랑방이 되기도 했지요. 주위에 법원이나 신문사도 있었잖아요, 그분들이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요. 요즘 책방하고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들 거야."

책방지기 달력. 손님들 주문을 적어 놓는다.
 책방지기 달력. 손님들 주문을 적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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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탑은 높아진다. 2006년.
 책탑은 높아진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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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요즘 독립책방이, 그런 구실을 하려고 생기는지도 몰라요.
"저는 요즘 독립책방 얘기를 들으면, 맥주 마시는 책방도 그렇지만, 추리소설만 다루는 책방이 연남동인가 생겼더라고요. 그런데 추리소설만 가지고도 책이 맞춰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에 코넌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하고 미스 마블하고, 정건영씨이니, 추리소설 명작이라든가 고전도 외국에 유명한 것도 많지만, 대접 못 받고 하는 책들도 있었는데, 그런 한 가지 책으로만 책방을 꾸린다니까 궁금해."

커피 한 잔.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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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책방을 가 보면 책꽂이를 꽉 채우지 않아요. 팔 만한 책만 판다는 생각으로 하더라고요. 책을 보는 사람은 책을 보기 때문에, 책손님을 믿고 씩씩하게 '작은 + 전문 + 마을' 책방을 하는구나 하고 느껴요. 그러니 독립책방에서는 참고서도 안 다루지요. 책을 팔아서 돈을 벌고 살림도 하되, 책방지기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들고 책손님한테도 가장 즐거울 만한 책을 가리고 추려서 아늑한 쉼터로 가꾼다고 느껴요.
"헌책방 오래 운영했던 사람도 그 독립책방한테서 배울 점이 있어. 우리도 방향은, 이것도 하고 보고, 또 괜찮은 저것도 하고, 갈등이에요. 요새는 갈수록 책을 많이 쌓아 놔요. 그러다 보니 어중이떠중이 책이 많이 쌓이는 거지요. 이사를 가려면 다 버리는 책이 되는 거지. 돈 주고 산 책이 다 버려지는 거지. 예전에는 '그 책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경계를 그었던 것을, 요새는 그런 경계 밖으로 밀어낸 책을 손님이 찾으니까, 이런 책도 보관하고 저런 책도 보관하다 보니 중구난방으로 책이 쌓이는 거예요. 볼 만한 책만 쌓이는 게 아니고.

그런데 볼 만한 기준이 시간에 따라서 필요한 게 있고 필요없는 게 있고 그러잖아. 오래되어도 생명을 갖고 있는 책도 있어. 그런데 요즘 흔하게 말하는 트렌드를 못 읽는 게 있지. 우리가 보기에 '왜 이런 책을 돈 들여서 만들어?' 하는 책이 오히려 인기가 있을 수 있지. 우리는 그런 책이 이해가 안 가는 거지. 저희는 에쿠니 가오리 책이 재미가 없어. 애들이 많이 사 가기에 읽어 봤는데 재미없어. '뭔 얘기를 하려는데 읽는 거야?' 그러는데, 요즘 만화책도 읽어 보면 어지럽고 저희 취향에 안 맞아서 못 읽겠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책을 많이 보고. 어느 거는 너무나 끔찍하고, 이토 준지 만화, 저는 그거 그림도 볼 수 없고. 그런데 저것만 찾는 사람도 많고. 저런 공포물 책만 다루어도 운영이 된다는 거야. 이토 준지 책이 언젠가 두 질 들어왔는데 여기 두는 것만 해도 속이 힘들어서, 옆에 있는 가게 분이 그 책을 좋아해서 그냥 줘 버린 적이 있어요."

2007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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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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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그래요. 모든 책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수는 없으리라 느껴요. 다만, 모든 책은 저마다 사랑받을 값어치하고 뜻이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잘 팔리는 몇 가지 책'만 너무 크게 늘어놓는 큰책방에는 사람내음이 적구나 싶어요. 독립책방이 마을책방으로서 사랑받는 대목이라면 아무래도 '잘 팔리는 몇 가지 책'이 아니라 '사랑받을 여러 가지 책'을 알뜰살뜰 갖추려 하기 때문이지 싶어요. 그동안 헌책방을 꾸리면서 느끼신 대로, '책'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씀해 보신다면요?
"책이란 무엇인가 하면, 음... 삶. '삶'이지요. 책은 다양한 삶을 말해 주지요. 제가 모르는 부분도 많이 알 수 있으니까. 내용도 그렇지만, 사진집, 저는 사진집 보기 되게 좋아해요. 사진집하고 화보를 보면 제가 몰랐던 세계를 많이 알게 되고. 내셔널지오그래픽 보기를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도 되게 다양한 삶을 담잖아요. 책은 다양한 삶을 알게 하고, 살게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얘기를 하며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것도 책을 읽어서 알 수 있잖아요.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고, 몰랐던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삶이지요, 책은."

2008년 여름날
 2008년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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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즈음 가게에서 비닐봉지를 거저로 주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나왔다. 책방에서도 비닐봉지 값을 20원 받았다.
 2009년 이즈음 가게에서 비닐봉지를 거저로 주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나왔다. 책방에서도 비닐봉지 값을 20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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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씨책방>은 신촌에서 어떤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씨책방>은 우리 신촌에서 재미있는 곳? 네, 재미있는 곳 같아요. 관심을 두고 오는 분은 재미있는 곳 같고, 십년 넘게 지나가면서도 안 들어오신 분은 여기가 재미있는 곳인 줄 모르지요. 젊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 새로 이사 와서 '여기 책방이 있네' 하고 책을 보려는 분도 있어요. 그래도 알라딘처럼 이곳이 편리하지 않잖아요. 알라딘은 너무 많이 알려졌고. 그렇지만 알라딘은 요즘 책만 있고 오래된 책은 없잖아요. 그래서 덜 다양하다고, 저희 집보다는 다양성이 적다고 할 수 있지요. 알라딘에 몇 십 년 된 삼중당문고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는 분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텔레비전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다 떨어진 교과서를 카페에 나란히 진열해 놓은 모습을 봤는데 그것도 볼 만하더라고요. 그건 소품으로 장식을 해 놓은 건데, 그래도 카페에 책이 있으니까 보기 좋아."

2009년 가을날
 2009년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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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여러 책방을 다니면서, 사라진 책방을 아주 많이 봤어요. 책방이 사라진 곳은 다시 찾아갈 마음이 안 들더라고요. 그리고 책방이 사라진 곳은 마을이 예전하고 달라진다고 할까요, 사람 냄새가 좀 많이 사라진다고 할까요.
"우리 동네도 헌책방이 여러 군데 없어졌는데, 연대 앞 <정은서점> 자리도 편의점 들어섰죠(정은서점은 연남동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기 2층에 있던 <신촌헌책방>도 고깃집 들어왔죠. 책방하고 전혀 연관이 안 되잖아요. <우리동네책방>도 그 자리에 화려한 뭔가 들어왔죠. <글벗서점>도 이사를 가는데, 그 자리에 올리브영이라는 화장품가게가 들어선대요. 이달 말까지."

2009년 책탑.
 2009년 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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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이 마을에서 살림을 이으려면, 서울시에서는 뭘 해야 좋을까요?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해야 해요. 방문자가 많아지게. 지금 방문자들이 줄고 있잖아요. 금요일(11월 11일)에 서울도서관에서 서점인대회를 한다는데, 여기 봐요, 나한테도 초대장이 왔어요. 우리는 우리 책방에 닥친 일도 있고, 한 사람이라도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서 그 행사에 못 가요. 서점인대회 행사 안내표를 보면 '중고서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는데, 프로그램을 보니까, 중고서점 섹션에서 말하는 이분, 이분은 인터넷으로 하는 거 같더라고. 책방이라기보다. 그리고 희귀서적들하고. 행사에 '헌책 팝업북 만들기' 이런 것도 있는데, 이런 건 놀이이지. 헌책을 아끼는 길이 아니지. 그리고 말이에요, 예전에는 '중고서점'이란 말을 안 썼어요. 다 '헌책방'이라고 했지요. 말이 이상하잖아, '중고서점'이라 하면? 알라딘이 들어서면서 우리하고 차별을 두려고 '중고서점'이라는 말을 쓴 듯한데, '중고서점'이라고 하면 헌책 맛이 나지 않아."

2010년 밤에.
 2010년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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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낮에
 2013년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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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단골이라고 하시는 박원순 서울시장님은 요즈음 찾아오신 적이 있나요?
"아뇨, 책방에 찾아오시지는 않았고, 박원순 서울시장님은 길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공씨책방 큰일 났어요, 건물 팔려서 비워 줘야 해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소상공인 주무관한테 책방 도와줄 수 있는 길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공무원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는가 보더라고요. '소식은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도와 드릴 수 있는 길은 없네요' 하시는가 봐요. 서울미래유산에 지정이 되었어도 '아유, 가슴이 아프지만 도울 수 있는 제도가 아직 마련된 것이 없어서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하시고요."

- 마지막으로 헌책방은 어떤 곳인가 하고 말씀해 주셔요.
"헌책방이란, 다양성, 다양성을 말하고 싶어요. 많은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교보문고 같은 책방도 다양성이 있겠지만, 헌책방은 훨씬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다양한 삶, 다양한 생활. 그리고 헌책방은 황금을 건지는 곳이지."

2010년. 책방 앞 공사.
 2010년. 책방 앞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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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책방지기 손때가 묻은 장갑
 2011년. 책방지기 손때가 묻은 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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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손님이 고른 책을 손으로 적으면서 값을 셈하신다.
 2011년. 손님이 고른 책을 손으로 적으면서 값을 셈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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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책시렁에 붙은 전화번호 적은 연필꽂이
 2015년. 책시렁에 붙은 전화번호 적은 연필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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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서울 신촌 <공씨책방> / 02) 336-3058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112-12 (신촌로 51)



태그:#공씨책방, #헌책방, #마을책방, #신촌, #서울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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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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