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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생가 터의 옛 '이광로 가옥'의 사랑채. 허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난설헌 생가 터의 옛 '이광로 가옥'의 사랑채. 허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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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여행을 염두에 두면서 나는 허난설헌과 허균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아이들에게 '홍길동전'과 허균(1569~1618)을, 난설헌(1563∼1589)과 '규원가(閨怨歌)'를 가르쳐 온 문학교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들 남매의 파란 많은 삶에 끌려왔기 때문이었다.

남매의 시대, 파란의 삶

블로그에 이들 이야기를 쓴 것은 거의 10년 전이었다. 나는 고액 종이돈에 실릴 인물 선정과 관련하여 신사임당(1504∼1551)과 비겨지는 여성으로서 난설헌을 바라보았고(관련 기사 : 다시 난설헌을 생각한다), <허균평전>의 서평(관련 기사 : 허균, 자유와 혁명을 꿈꾼 로맨티스트의 초상)을 썼던 것이다.

허균과 난설헌 유적지로 향하는데 아내가 그이들이 강릉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허균과 난설헌이 여기서 태어난 것은 강릉이 예조참판을 지낸 이들의 외조부 김광철(1493~1550)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강릉 외가는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1517∼1580)이 재취하면서 생긴 인연이었다.  

한때 삼척부사를 지낸 데다 강릉에서 차남 허봉을 포함하여 삼남매를 얻었으니 초당에게 강릉과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 그는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간수 대신 바닷물을 받아 만드는 강릉의 명물 '초당두부'를 처음 빚었다고 한다. 경포호 남쪽의 이 마을이 '초당마을'이 된 것도 순전히 그러한 인연의 결과다.

초당 순두부 정식. 허엽은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간수 대신 바닷물을 받아 만드는 ‘초당두부’를 처음 빚었다고 한다.
 초당 순두부 정식. 허엽은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간수 대신 바닷물을 받아 만드는 ‘초당두부’를 처음 빚었다고 한다.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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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에 세워진 전통 가옥의 안채. 외부와 단절된 이 공간에 난설헌 영정이 모셔져 있다.
 생가터에 세워진 전통 가옥의 안채. 외부와 단절된 이 공간에 난설헌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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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마을의 난설헌 생가 터 일원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된 것은 1980년대다.(균은 이름, 난설헌은 호로 알려져 허균·허난설헌 공원이 되었다.) 강릉시는 한때 이광노 가옥이라 불리었던 전통가옥을 매입하여 생가로 꾸몄고, 입구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공원의 뒤쪽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생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후대에 생가 터에 세운 양반가옥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면 4칸 규모의 큰 사랑채와 마당이 있고 안채는 담장과 중문 등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사랑채에는 허균의, 안채에는 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난설헌, 시대적 모순 앞에서 좌절한 여인

허균은 외가인 사천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고 이 집터에서 태어난 이는 난설헌이다.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이어야 하지만, 유가(儒家)의 내외구분에 따라 동생의 영정은 사랑채로, 그 자신은 안채에 모셔진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의 삶을 가로막은 것이 '봉건의 질곡'이었다면, 죽어서도 그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신사임당의 오죽헌이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신영복,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나무야 나무야(1996)> 중에서)이라면 이 후대의 가옥, 안채에 모셔진 난설헌은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반대편에 선 여인이다.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두 여인은 비겨지는 대목이 많다. 5만원권 지폐 속 신사임당과 생가터 안채에 모신 난설헌의 모습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두 여인은 비겨지는 대목이 많다. 5만원권 지폐 속 신사임당과 생가터 안채에 모신 난설헌의 모습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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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의 사후에 중국과 일본에서 시집이 나올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난설헌집 목판본 1책.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난설헌의 사후에 중국과 일본에서 시집이 나올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난설헌집 목판본 1책.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허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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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어린 남매는 물론, 뱃속의 아이와 남편의 애정마저 잃고 요절한, 실패한 어머니, 실패한 아내였다. 그보다 반세기 전의 인물이었지만 정승 아들 율곡을 두었던 행복했던 어머니, 사랑스런 아내 신사임당이 비켜간 그 시대적 모순 앞에서 좌절한 여인이다.

난설헌의 연보는 그녀의 고단했던 삶에 비기면 단출하기만 하다. 당대의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중국과 일본에서 시집이 출판된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사회 활동이 불가능했던 중세 봉건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이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초당의 막내딸로 태어난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楚姬), 천부적 시재를 지녔지만 그녀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혼인생활도 순조롭지 않았고,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하면서 후사도 잇지 못한 그는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난설헌은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등 '세 가지의 한'을 늘 입에 올렸다 한다. 남성 시인들의 시편을 뛰어넘는 탁월한 문재조차도 마치 실패한 어머니와 아내의 지위를 극복한 방편쯤으로 폄하되면서 그이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도 기억되지 못한다.

어진 어머니와 착한 아내(현모양처), 사임당 신인선(申仁善)의 성공한 삶에만 쏟아지는 갈채가 오히려 난설헌의 삶에 드리운, 실패한 어머니와 아내의 그림자를 더욱 짙고 어둡게 만든다. 그 질곡은 그들이 살았던 16세기가 아니라 이 눈부신 21세기에도 여전하기만 하다. 쇠귀 선생의 탄식도 그것을 겨냥한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 신영복, 위의 글 중에서

"같은 강릉 출신이지만 사임당과 난설헌의 삶은 엇갈렸어. 결코 뒤지지 않은 재능을 가졌는데도 난설헌은 사임당에 눌려서 존재감이 떨어지지."
"사임당은 5만 원짜리 지폐에도 얼굴이 실리고?"
"그렇지. 아예 나라에서 현모양처의 모델로 치켜세워 준 셈이지."
"맞아요, 현모양처 신사임당. 우리 때는 아이들 장래 희망이 죄다 '현모양처'였어. 지금 생각하니 코미디네."

경포호 남쪽의 초당마을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포호 남쪽의 초당마을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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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라 휴관 중인 기념관을 지나 생가로 드는 길은 활짝 핀 코스모스로 화사했다. 생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외부와 이중으로 단절되어 있는 안채의 구조가 난설헌이 살았던 시대의 질곡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싶었다.

생가와 기념관 사이의 공원에는 난설헌의 동상과 이른바 '5문장가'를 기리는 시비가 일렬로 서 있었다. 아버지 허엽 말고도 큰오빠 성, 작은오빠 봉, 그리고 자신과 남동생 균이 그들이다. 한 가문에서 5문장가를 배출한 것 또한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난설헌의 시비에는 고향 강릉에서의 추억을 담아 지은 한시 '죽지사(竹枝詞)' 중 세 번째 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노래한 한글 가사 '규원가'를 썼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곡자(哭子)'나 가난한 여인의 고통스런 삶을 통하여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한 '빈녀음(貧女吟)'이 더 곡진한 정서를 담고 있는 대표작이다.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여 /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구나. /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 <곡자(哭子)> 중에서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리오. / 바느질 길쌈 솜씨 좋은데 /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 중매쟁이는 나를 몰라주누나. / 손으로 가위를 잡느라고 / 밤은 추운데 열 손가락 곱아온다. /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지만 /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다오.' - <빈녀음(貧女吟)> 1· 4

허균,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된 사내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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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태어난 그의 외가,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에 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이튿날, 강릉을 떠나 주문진으로 향하다가 얼핏 길가에서 '허균 시비'라 쓰인 이정표를 발견한 것이었다. 거기가 허균이 자호(自號)로 쓴 '교산(蛟山)' 언덕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사천의 하평마을은 허균의 외조부 강릉 김씨 애일당(愛日堂) 김광철의 옛터다. 부근 사천 바닷가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밑에는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 때가 되자 이무기는 바위를 깨뜨리고 바다로 떠났다. 연산군 7년, 서기 1501년이었다. 이 바위는 '이무기가 떠난 문'이라 하여 '교문암(蛟門岩)이라 불리었다.

68년 뒤, 하평마을에서 '이무기 산[교산(蛟山)]'을 자호로 삼은 풍운아 허균이 태어났다. 완고한 중세 봉건사회를 살던, 마흔한 살에 당상관에 오를 만큼 출세가도를 달리던 이 명문거족 출신의 선비는 <홍길동전>을 쓰고, 서얼(庶孼)의 무리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당대의 서얼들과 각별한 교유를 갖고 적서차별의 계급 모순에 저항해야 할 이유나 동기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교산은 "이름난 집안에서 정실의 소생으로 떳떳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되었다."(허경진, <허균평전>)

허균은 즐겨 교문암을 찾아 혁명을 꿈꾸었다던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무기를 그린 이 로맨티스트의 최후는 능지처참 형이었다. 홍길동전과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 등의 저술에 드러난 세계관과 민중관,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 외교적 감각 등으로 교산은 중세 조선 사회를 혁명 직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가긴 했지만 '그의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허균의 실패한 거사는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 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는 치밀한 계획으로 세상을 뒤엎을 만한 담대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사 실패 후의 동지들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하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하고 있다.  

이들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했고,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들의 머리를 깨뜨리기도 했다. 하급 아전과 노비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교산이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대변했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목이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시장 바닥에 전시되었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連坐籍沒)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守直)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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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자신의 글이 당할 운명을 저어했음인지, 잡혀 들어가기 전날 밤, 7년 전 유배지에서 스스로 엮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초본을 외손자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역신으로 죽어 그의 글까지도 죽어야 했다. 남은 글들도 감추어졌다.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는 400년이 흐른 뒤 공화제 사회에서 비로소 복권되었다. 능지처참 형을 당한 역신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는 되살아났다. 그가 저항했던 적서차별의 사회는 종언을 고하고 만민평등의 시대가 열렸다.

400년 후 공화제에서 복권된 혁명가

하평마을의, 오대산에서 뻗어 나온 나직한 산줄기, 교산의 끄트머리에 허균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빗돌은 잘 자란 키 큰 소나무 숲에 마치 남의 시선을 꺼리는 듯 숨어 있었다. 허균의 문학을 기리기 위해 1983년 8월에 세워진 시비에는 그의 시 '누실명(陋室銘)'이 새겨져 있다.

"빈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 한 잡음 향 피우고 / 외딴 집에 누워 / 건곤(乾坤) 고금(古今)을 가늠하노니 /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저." - 김동욱 번역(*거우르다 : 속에 든 것이 쏟아지도록 기울이다)

허균은 젊은 시절과 임란 뒤에 잠시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에 살았다. '명(銘)'은 '새겨놓고 보는 글'이니 '누실명'은 '누추한 집에 걸어놓고 마음을 다스리는 글'인 셈이다. 마음속 불길을 다스리며 때를 기다렸던 이단아가 꿈꾼 세상은 수백 년 뒤에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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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허균이 역모죄로 처형된 거. 고작 마흔아홉 살이었어."
"누나는 스물일곱에 보내고, 자신은 마흔아홉에? 하여간 남매는 대단했네......"

강릉은 오죽헌으로 상징되는 사임당과 율곡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만난 강릉은 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것이었다. 누이는 시대의 모순에 희생되었고, 남동생은 그 시대와 맞부딪치다가 부서졌으니 말이다.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나는 교문암에 들르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백과사전의 교문암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중세 봉건사회를 살아갔던 남매의 삶을, 부딪쳐 깨어진 혁명의 꿈을 생각해 본다.


태그:#허난설헌,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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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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