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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곳에 깊은 애착을 갖는다. 우리는 고향이나 거주지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들을 때 무척 언짢아 한다. 물론 어디든 자기가 사는 곳이 나쁜 평가를 받을 때 환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지역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독특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내 고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남이 한 행동까지 부끄러워 하거나 자랑스러워 한다. 이는 국가 단위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사건의 범인이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고, 2015년 미대사 피습 때는 단체로 '대신'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지역 정서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측면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한국은 강하고 역동적인 시민사회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는 여러모로 특이한 결과라 할 만 하다. 한국을 지배해 온 배타적 가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주의는 공동체와 시민사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일본 등이 부러워할 만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지역적 애착과 동일시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집단적 지역 정서는 맹목적 지역주의나 배타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역주의의 부작용을 악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출세주의'를 꼽을 수 있다. 

'출세'가 망치는 나라

한국에는 반기문에 대해 60여 종 이상의 책이 나와 있으며, 거의 모두 그를 따르고 본받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그의 업적을 평가한 저서는 거의 없고, 대다수가 '사무총장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영웅시한다. 하지만 그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능력보다 '강대국의 최소공배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에게는 고분고분하고, 러시아에게는 무색무취의 인물이어서 반대할 이유가 없고, 중국에게는 같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름장어'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실패한 사무총장'으로 만들었다.
 한국에는 반기문에 대해 60여 종 이상의 책이 나와 있으며, 거의 모두 그를 따르고 본받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그의 업적을 평가한 저서는 거의 없고, 대다수가 '사무총장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영웅시한다. 하지만 그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능력보다 '강대국의 최소공배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에게는 고분고분하고, 러시아에게는 무색무취의 인물이어서 반대할 이유가 없고, 중국에게는 같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름장어'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실패한 사무총장'으로 만들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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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는 매우 한국적인 언어다. 이는 '성공'하고도 구분되는데, 단지 돈을 많이 벌거나 자신의 영역에서 인정받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출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지위이며, 그중에서도 높은 관직을 얻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출세'의 모든 조건은 충족된다. 그 자리에 어떻게 올랐는지, 맡겨진 역할을 어떻게 해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명문대'를 들어가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그 하나만으로 당사자는 존경받을 사람이 된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주역들은 하나같이 좋은 학교를 나와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다. 삶의 여정에서 한두 번 씩은 가족과 지역에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을 주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출세한 사람들이 나라를 망가뜨려 온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어떤 학교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조명을 받거나 책을 내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입학은 교육의 시작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그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하지만 한국적 출세론에서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경상남도 합천에는 '일해공원'이 있다. '일해'는 전두환의 아호이며, 합천군은 전두환의 고향이다. 대통령이 나온, 다시 말해 지역민 가운데서 가장 '출세'한 사람을 배출한 사실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으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대통령이 그 지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 사실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된다. 

일해공원과 반기문 생가

음성군 반기문 광장에 설치된 반기문 사무총장 흉상
 음성군 반기문 광장에 설치된 반기문 사무총장 흉상
ⓒ 충청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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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에 가면, 마을 어귀에서 머리 큰 반기문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그 옆에는 검은 하트 모양의 구조물에 흰색 유엔 상징이 새겨져 있고, 반기문은 '유엔'이라고 새겨진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열심히 뛰는 자세로 얼어붙어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고향 음성입니다"

음성군청 청사 전면에는 건물 너비와 맞먹는 거대한 현수막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곳에 세워진 '반기문 기념물'의 서막에 불과하다. 음성에는 잘 알려진 반기문 생가, 반기문 기념관, 반기문 평화랜드, 반기문 비채길 등이 있다. 반기문 이름을 딴 전국적 행사도 여럿이다. 반기문 영어경시대회, 반기문 마라톤대회, 심지어 반기문컵 국제오픈 태권도 대회까지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애나 파이필드 기자는 반기문이 대선 출마 의지를 내비친 뒤 음성을 찾았다. 그는 다양한 반기문 시설을 둘러 보았는데, 그 중 생가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소개된 반기문의 일대기를 확인하고 소책자로 된 '반기문 어록'까지 읽은 그는 신문에 이렇게 썼다.

"맞다, 이곳은 분명히 남한이다. 당신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찬미하는 박물관이나 기념비를 돌아본 뒤 이곳을 찾았다면, 혹시 내가 비무장지대에서 길을 잘 못 들어 북한으로 되돌아 간 게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2016. 8. 15. <워싱턴포스트> "반기문의 대선행보에 떠들썩한 음성군")

위 기사를 불쾌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산 사람의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을 세우고,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온갖 시설과 행사를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은 분명히 아니다. 같은 이유에서, 기자가 일해공원을 보았다면, 독재자의 아호를 딴 기념물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두 사람이 동일하게 비교될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와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 사이의 연결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1985년 반기문이 하버드대학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관련 정보를 전두환 정권에 보고한 일이 있다. 이는 반기문이 귀국한 뒤 해명해야 할 여러 의혹 가운데 하나다.

반기문은 '준비된 인재'?

그렇다면 반기문은 어떻게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을까? 꿈꾸고 노력하고 준비해서? 물론 그럴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어했고, 그를 위해 부지런히 영어공부를 했다고 한다. '반기문 영어경시대회'는 바로 이런 노력을 기리고 본받자는 행사일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반기문을 향한 비판의 첫 번째는 '소통능력의 부재'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반기문이 "고통스러울만큼 말주변이 없다(painfully ineloquent)"고 평한다. 그리고 다수가 그 원인으로 언어능력 부족을 꼽는다. 지난 9월 20일 반기문 특집기사를 낸 미국의 <네이션>지는 반기문이 유엔의 공식 언어인 영어와 불어 모두가 서툴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는 공식 연설문을 읽을 때에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방송 인터뷰나 기자회견 때에는 한계가 확연히 두드러진다. 영국 런던대 영문과의 헨리 위도슨 교수는 반총장의 발언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예컨대 반기문은 세계화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The world is going through global communication and globalizations. The China is number 2 economic power in the world."

뜻이 되게 번역하면 "세계는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과 세계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입니다"가 되지만, 두 문장 모두 기초적인 문법과 어법을 무시하고 있다.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세계화(globalization)'는 복수형을 쓸 수 없는 추상명사이고, '중국(China)'은 관사를 쓸 수 없는 고유명사이며, 명사구인 '2의 경제대국(number 2 economic power)'는 앞에는 정관사(the)를 붙여야 한다.

반기문의 언어 문제는 유엔 직원들도 오래 전부터 잘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2010년 6월에 "유엔의 '투명인간' 반기문의 수행능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최근 은퇴한 유엔 관리에 따르면, 반기문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영어실력의 부족이다. 그로 인해 미국과 그외 다른 나라에서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엔 직원들은 반기문에게 말하기 훈련을 시키고 언론 대응법도 가르쳐 왔다고 그 전직 관리는 말했다. 한 주에 두 세 차례 말하기 훈련을 시켰고, 그것이 도움이 되긴 했으나 충분치는 않았다. '우리들은 그에게 가급적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 문제가 아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링컨 흉상의 코를 만지고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링컨 흉상의 코를 만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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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은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웠고, 이것은 비슷한 상황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외국인이 영어를 완벽하게 말하기는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앞에서 반기문의 영어 문제를 지적했던 위도슨 교수도 그의 영어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반기문의 소통문제는 언어차원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애초부터 뚜렷한 사고와 목적의식을 갖지 않았기에, 그것을 보여주거나 실천할 일도 없었다는 점이다. '기름장어'라는 그의 불명확한 태도는 그를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들어준 은인인 동시에, '최악의 사무총장'이라는 평가를 받게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 살피겠지만, 반기문은 무시할 수 없는 성과도 이뤄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못하다. 반기문이 거듭 지적 받아온 문제는 앞에서 말한 '소통능력 부재' 이외에 '손놓은 구경꾼', '소수 측근에 의지', '위기상황에 무능' 등이다. 불행히도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질적 문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반기문은 사실상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으나, 우려스럽게도 유권자들은 그를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연재기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는 베일을 벗겨내고 '대선 후보' 반기문의 자질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태그:#반기문, #박근혜, #대선후보, #유엔,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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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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