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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개헌 논의로 주권자는 다시금 공론장에서 소외되는 기분을 느낄지 모릅니다. 다만 개헌 논의를 그 자체만으로 '더러운 기득권의 권력 나눠먹기'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헌법은 쉽게 표현하면 일종의 계약서이며, 중요한 것은 계약의 내용입니다. 내용이 복잡하다고 지금 정치인들이 무슨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는지 따져두지 않는다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 앞에 진열된 상품들의 질과 판매자들의 진정성을 요리조리 집요하게 따져보는 일입니다. - 글쓴이 말

① '제도'가 문제라는 사람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지난해 10월 2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 국회 도착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지난해 10월 2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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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권력 구조는 대통령 중심제 그중에서도 5년 단임 대통령제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에서 의도적으로 이 제도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규정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개헌론자들은 크게 셋 정도의 근거를 들어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첫째, 현 권력 구조는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을 낳는다.
둘째, 단임 대통령은 책임성과 소통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셋째, 임기가 짧다보니 국정 운영이 효과적이지 못 하고 무리수를 두려고 한다.

공통적으로 '제도가 곧 지도자의 리더십 실현 방향을 결정한다'는 숨은 전제가 깔려있는 주장들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21세기형 법가(法家)라고 부릅니다. 법가는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집단들인 제자백가 중 한 학파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에 강한 회의를 품고 있어서, 제도를 (아주 엄하게) 잘 확립시키지 않는 한 나라 운영이 제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물론 민주주의 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21세기의 법가들을 그때의 법가들과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제도를 사회의 최우선적인 요소로 본다는 점에서는 조상 뻘과 후예 뻘과 다름 없습니다.

여하튼 그럼 21세기 법가들의 첫째 주장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정치학자 슈가트와 캐리는 <대통령과 의회: 헌법의 디자인과 선거 동학>에서 42개 국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진단에 따르면 한국 대통령의 힘은 중간 정도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봐서는 제왕적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하지요?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비교일 뿐 한국의 대통령제 자체가 내장한 절대적인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슈가트와 캐리의 책.
 슈가트와 캐리의 책.
ⓒ Cambridge University P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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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는 최상위 법인 헌법 해석에 근거해 국가의 크고 작은 결정들을 뒤집을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가졌기에 '제4부'라고도 불립니다. 한국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3권 분립이 원칙인 나라죠. 그래서 헌법재판관 지명권자도 각 부가 3명씩 나눠 지명하고 있습니다다. 그런데요.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나머지 3부가 헌법재판관을 기계적으로 3명씩 나눠 지명하면 공평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 하거든요. 헌법재판관 3명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또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3명 지명하는데 그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지명하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관의 임기는 대통령보다 긴 6년입니다. 주기만 잘 맞아 떨어지면 대통령은 직접, 혹은 (대법원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헌법재판관 6명을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들로 채울 수 있죠.

여당이 보조를 맞추면 7명입니다. 작금의 5기 헌재는 탄핵 심판으로 대통령의 명줄을 쥐고 있지만 평소에 보수 성향으로 기울어진 편이라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정권을 잡든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죠. 결국 한국의 현행 대통령 중심제에도 찾아보면 손 볼 곳들은 존재합니다. 물론 이견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② '사람'이 문제라는 사람들

2012년 7월 10일 18대 대선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
 2012년 7월 10일 18대 대선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
ⓒ 공동취재사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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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들은 '제도보다 사람이 문제의 본질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시지요. 그래서 필자는 이런 분들을 개인적으로 인치(人治)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분들은 '제왕적 대통령제'는 없고 '제왕적 대통령'만 있다고 주장하시지요. 과거 유신헌법, 5공화국 헌법 같은 것들은 분명 '제왕적 대통령제'였지만 현행 87년 헌법까지 그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는 거죠.

또한 인치주의자들은 법 위에 선 권력 남용, 정치과정 독점, 국정 지배를 하는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리더가 선출된 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정당의 비민주적·무책임한 행태, 국정원·검찰 등 권력기관들을 국회가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 부재,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유교적(?) 정치 문화, 지역주의 등이 문제라고 보죠.

독자 여러분은 법가와 인치주의자들의 생각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있게 들리시나요? 우선 필자는 인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람과 문화가 문제의 한 원인일 수는 있다고 봅니다. 4년간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이런 생각이 상식에 속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생각은 해봐야 합니다. "독단적" "비민주적" "무책임" 등은 상대적인 가치판단이라는 거죠.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가령 필자는 개혁보수신당 의원들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이러한 가치판단들을 내릴 만한 사례들을 앉은 자리에서 밤새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쪽 사람들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을 겁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합의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정치철학적, 윤리적 차원에서 날 잡고 끝장 토론하지 않는 한 끝을 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논의는 주로 서로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제도'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87년 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다'라는 말은 386세대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만 만족하고 멈추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앞서 필자가 헌재 사례를 지적했듯 87년 체제에도 구멍은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87년 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다'라는 인정까지는 할 필요가 없지만, 최소한 '87년 체제 내에도 제왕적 대통령제적 요소는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죠. 민주 시민이라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를 갖는 게 자신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라고 전제해야 하니까요. 현실은 법가와 인치주의자들의 주장 사이 어디쯤 있습니다.

다음으로 법가들의 둘째 주장. 단임 대통령은 책임성과 소통의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따져보겠습니다. 인치주의자들은 대통령도 사람이라 다시 선거에서 평가받을 일이 없다면 현재의 소통보다 역사적 책임을 지는 것을 중시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우선순위를 두는 게 꼭 민주주의의 본질을 위협할 수준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죠.

그런 논리라면 단임이든 연임이든 임기가 있는 모든 공직자는 마지막에 무책임하고 불통의 모습을 보인다는 건데 실제로 그렇냐는 반론입니다. 일리가 있지 않나요? 독자 여러분 각자의 머릿속에는 시민들과 책임 있게 소통한 역대 대통령들의 순위가 존재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임기 때문에 독단적인 대통령이 출현하면 어떡하냐는 거죠.

이에 대한 인치주의자들의 답은 아직 모호합니다. 애초에 그런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으면 되고, 만약 대통령이 그런 모습을 보여도 견제할 수 있는 강제성 있는 제도와 정당을 구성하고 지도자에게 맹목적인 지지가 아닌 합리적 비판이 가능한 시민이 넓게 존재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답할 뿐이죠. 그런데 이건 구체적인 답이 아니죠.

그 제도와 시민은 어떤 모습일 것이며 그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논점1) '대중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지도자가 대중의 기대를 배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51.6%의 사람은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줬으니까요.

우리가 오류를 범했을 때 시정을 하려면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탄핵도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선거로 해결하니까요). 5년은 시민 입장에서 기회비용이 큰 긴 시간이므로 이게 적당한지도 따져봐야 합니다(논점2).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임기가 짧다 보니 국정 운영이 효과적이지 못 하고 무리수를 두려고 한다는 주장을 따져봅시다.

이 주장에는 인치주의자들도 선뜻 동의한답니다. 대통령은 임기 첫해에 이전 정부가 정해놓은 예산과 사업을 집행합니다. 자기 과제는 토론과 연구 정도 밖에 할 수 없죠. 그리고 2년 차에는 민의를 수렴하고 예산을 확보하고 각종 인허가 및 발주 등을 하느라 바쁩니다. 3년 차에 첫삽을 뜨고 4년 차에 본격화되지만 곧 5년 차가 되어 임기가 끝난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럼 얼마나 충분한 임기가 보장되어야 하느냐가 문제죠(논점3).

이쯤 되면 영리한 독자들은 여기서 논점2와 논점3이 상충한다는 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두 논점을 조화시킬 방법은 '4년 중임 대통령제' 편에서 검토해보겠습니다. 다만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왜 매력이 떨어지는 낡은 상품이고, 위 논점 세 가지 논점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못 내놓는 이상 개헌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한 글(필자와 저자들의 의견은 일부 다를 수 있음)
- 한상익, 「민주화 체제를 넘어 민주주의 체제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제도 개혁」『수권정당의 길』,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2016년 8월 23일.
- Matthew S. Shugart, Johh M. Carey, President and Assemblies: Constitutional Design and Electoral Dynamics, Cambridge Univ Press, 1992.


태그:#개헌, #5년 단임 대통령제, #박근혜, #제왕적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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