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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설가 이대환이 펴낸 <박태준 평전>
 최근 소설가 이대환이 펴낸 <박태준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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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역주행한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사적 이익의 사적 교환, 정경유착 역시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갔음이 명백해지고 있다. 말 몇 마리 상납하고 대통령의 힘을 이용했다. 참 싸다. 심지어 시민의 미래야 어떻게 되든 말든 개인의 미래를 위해 국민연금까지 동원했다. 참 나쁘다. 참으로 저열한 재벌의 시대다.

이런 시대에, 그래서, 다시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 최근 나왔다. <박태준 평전>이다. 소설가 이대환이 2004년 내놓았던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 '회장님'이 2011년 12월 타계하기까지 7년의 발자취를 더한 완결판이다. 포스코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제인으로의 삶 뿐 아니라,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정부 시절 총리 등을 역임하며 정치인으로서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도 상세하게 나와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기에 "박태준의 박정희를 향한 신뢰와 박정희의 박태준에 대한 신뢰는 아마도 '대한민국 100년'의 가장 위대한 만남으로 남을 것"이란 저자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독자에게는 불편할 만한 구석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2017년 지금을 관통하는 육성이 적지 않다.

당대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는 지도자는...

"노숙자, 명예퇴직자, 정리해고자, 대졸 미취업자, 불행한 오늘의 이 현실을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다름 아니라 정권이 잘못하고 정치가 잘못해서 만들어낸 이 시대의 희생자입니다. 잃어버린 그들의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정치적 굴레이고 멍에입니다." (1999년 11월 국회 교섭 단체 대표 연설 중)


박태준의 이 한 마디는 그때 못지 않게 불행한 서민들이 많기에 '오늘'과 정확히 통한다. "한 나라가 일어서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은 지도층과 엘리트 계층이 부패하지 않고 자신감을 바탕으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지도자가 된다고 해도 당대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에 이르면 당연히 지금의 대통령이 떠오른다.

"검찰만 서도 나라가 바로 선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될 일은 검찰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사실"이란 박태준의 이 말 또한 지금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란 비극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트럼프 당선으로 더욱 불안정성이 커진 한반도이기에 "분단 극복의 방법은 이미 결정돼 있다. 평화통일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가 후세에 전할 가장 큰 교훈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란 그의 말은, 그래서 지금도 역시 귀하다.

"박태준의 신념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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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경유착의 그 저열한 민낯을 생생하게 목도하는 지금이기에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평생 몸바친 포스코의 주식을 단 한 주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주의 주식도 유족에게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 울림이 꽤 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제기되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36년 간 살아온 집을 처분하고, 집 값 14억5천만 원 중 10억 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박태준은 "처음 집을 구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보태줬으니 처음부터 100퍼센트 나의 사유재산이 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밝힌다.

그 후 박태준은 한남동 전셋집과 딸의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그 면모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삶을 가능하게 만든 힘, 그것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로 요약되는 그의 기업 철학이었다.

"국가경제를 위한 박태준의 신념은 재벌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80년대 중반에 재벌기업 창업주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2세들이 물려받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 재벌 2세와 만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보라, 1세와 달리 2세는 할 수 있다. 그렇게만 하면 당신은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간곡히 제안한 적도 있다." (박태준 평전 중)

이런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박태준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재벌 개혁의 전도사로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책에 따르면 1997년 9월 도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나눈 주요 대화는 재벌 개혁이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재벌이 방만한 경영을 한다면 나라 경제가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데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저열한 재벌의 시대, 박태준의 그 한 마디

1990년 7월 당사에 출근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모습.
 1990년 7월 당사에 출근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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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보다 재벌의 방만한 경영이 줄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다. 아니, 오히려 도대체 어디까지가 재벌들의 사업 영역인지 맺고 끊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2000년 국무총리 취임식 기자간담회에서 '재벌 개혁의 의미와 배경'을 묻는 질문에 "재계 스스로 신산업분야를 개척해야 한다"고 박태준은 강조했지만, 골목상권까지 내 것으로 만드는 손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일부 재벌 2세나 3세들의 현주소다.

특히 '잃어버린 9년'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들을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했다. 2008년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가 폐지됐다. 2012년에는 결합 재무제표(재벌 총수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계열사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작성한 재무제표) 제도가 폐지됐다. 박태준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재벌 개혁의 해법 중 하나로 도입했던 정책이었다.

뿐인가. 감세라는 큰 선물까지 재벌들에게 턱 하니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것도 모자라 노동자를 보다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성과연봉제' 도입을 요구한 것이 바로 재벌들이었으며, 또 그것도 모자라 재벌들의 사금고화를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 '금산 분리'마저 완화하자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또한 지금의 전경련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정권은 재벌들의 이런 요구에 충실히 부응했고, 그 결과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정경유착'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저열한 재벌의 시대', 박태준의 이 한 마디는 그래서 앞으로 우리 사회의 공론이 어디로 모아져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소유와 경영은 분리돼야 한다'. 참으로 저열하기 짝이 없는 수준의 정경유착의 '목격자'들이 참담한 와중에도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적 과제임이 분명하다.


태그:#박태준, #포스코, #재무제표,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정경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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