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패니메이션의 '모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 연출'은 길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판치라, 바스트 모핑으로 대표되는 이 연출에 대해서는,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게리온 파>에 새로운 캐릭터 마리를 등장시키면서 콘티에 썼다던 "야하게, 피규어 많이 팔리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존재를 상품화해서 내놓고, 그것으로 하나의 코드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에 덧붙인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연출은 이 장르의 일정한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너의 이름은.>역시 이 공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모에'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젠더의 두 사람을 연대하게 하는 방식이다.

'낯 모르는' 사람과 '꿈속'에서 뒤바뀌기

 <너의 이름은.>에서는 타키와 마츠하의 몸이 바뀐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타키와 마츠하의 몸이 바뀐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바디체인지물'을 생각하면 가장 흔하게 떠오르는 포맷은 '서로 싫어하는 사이'인 두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프리키 프라이데이>부터 한국 영화 <체인지>, 아직 탄핵당하지 않으신 대통령이 사랑하신다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까지. 가장 싫어하는 상대가 되면서, 두 사람은 지금껏 서로를 싫어했던 이유를 돌이켜 보고 이해한다. 상대의 사정을 깊이 알게 되고, 다음 단계의 진정한 우정(내지는 사랑)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다. 물론 그 발판은 서로가 자기 몸으로 돌아옴으로써 완성될 수 있다. <너의 이름은.>도 마찬가지 패턴을 밟는다. 두 사람이 낯 모르는 사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타키와 미츠하의 관계는 굳이 말하자면 인터넷 랜덤채팅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어째서 그 둘이 꿈을 통해 연결되었는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고, 관객들도 이해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느닷없이 내 몸속에 들어와서 내 삶을 휘젓는 새로운 존재에 적응해야만 한다. 심지어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성별이 바뀌는 바디체인지물이 흔히 그렇듯이, 두 사람은 먼저 자신들의 근원적 물질인 신체에 적응해야 한다. 타키는 미츠하의 몸에 들어올 때마다 원래 자신에게는 없었던 가슴을 만져대고, 미츠하는 타키의 성기를 가장 예민하게 의식한다.

휴대폰으로 서로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그들이 한 번도 만날 수가 없다는 점도 '인터넷 시대'의 바디체인지물답다. 물론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 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영원히 만날 수가 없는 일직선을 그리면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독보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장르였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장악하는 장소가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것은 중요한 장치로 읽어낼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이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잠이 들었을 때는 하염없이 무의식의 근처에 다가섰다고 느끼다가도, 의식의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현실 뒤의 것들을 잊어버린다.

타키가 '미래의 도시'에서 온 '남성'이고, 미츠하가 '과거의 시골'에서 온 '여성', 더욱이 '재해 피해자'라는 점은 이 부분에서 더욱 방점을 찍게 된다. 미츠하는 타키를 만나러 미래까지 찾아오지만, 타키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므로 미츠하를 기억하지 못한다. 타키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츠하는 죽고, 잊히고, 사회의 저편에서 흐릿해지고 만다.

미츠하는 타키보다 더 약한 고리에 서 있으며, 우리는 애를 쓰고 애를 써야만 그 약한 고리를 간신히 지켜내고 세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타키는 그 세계를 지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행'을 했지만, 애니메이션 밖에 존재하는 사회는 그것을 '투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서로에 대해 전혀 몰랐던 타키와 미츠하는, 자신들의 세계 바깥에 '틀림없이 존재하는' 두 사람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접속했다.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다.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제일 처음 미츠하는 "자신의 동의 없이 가슴을 만진 일"에 대해 항의하고, 타키는 그 항의를 받아들이고 사과를 한다.

그 순간 더 이상 미츠하는 "모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상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으로 '돌아와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미츠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르면서 마을을 구하는 것은 결국 미츠하의 책임이다.

여성-여성 연대, 여성-남성 연대

 미츠하의 할머니인 히토하

미츠하의 할머니인 히토하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몸이 바뀌고 나서 미츠하는 타키가 짝사랑하고 있던 오쿠데라 선배와 타키의 껍데기 사이에 가교를 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미츠하가 의도적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다. 오쿠데라 선배가 성추행(치마 찢기)을 당했을 때, 미츠하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을 건넨다.

오쿠데라 선배가 우물쭈물하는 미츠하를 도와줬듯이. 도시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을 수도 있을 바느질과 자수는, 카페 하나 없는 시골에서 끈을 다루며 사는 소녀에게는 필수적인 스킬이었을 것이다. 미츠하가 남성의 몸을 하고 있음에도, 오쿠데라는 그때 "여자력 높네"라고 말을 건넨다. 오쿠데라의 호감은 소위 말하는 '남성성'의 전형 밖에서 출발한다.

물론 타키와 미츠하의 성격은 젠더의 전형을 보여주는 측면이 적지 않다. 더불어 그들의 나이는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이란 나이는 성 정체성을 '강고히 하는' 시기다. 그 시기에 '퀘스처닝'을 겪는 사람들이 많듯, 그 시기의 인간은 다양한 성적 역할들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어떤 방식으로건 사회화를 겪는다.

사회 밖에서 살아갈 수 없는 한 그 안에는 (옳지 않은) 성적 억압도 존재한다. "시선 조심, 스커트 주의! 기본이잖아!" 같은 미츠하의 대사는 성적 억압을 내면화하기 시작한 소녀의 당혹감을 현저히 보여준다. 타키 역시 마찬가지로 "거칠게 대해야 한다"는 성적 억압을 내면화하고 있는 시기를 살고 있기에, 그는 오쿠데라에게 호감을 표현할 방식을 '아직' 주먹질 외에 알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방식을 그에게 알려주는 것은 또래의 남자 친구들이 아닌 '꿈속의' 미츠하다. 서로의 존재를 무의식 차원에서만 알고 있는 사회의 이면이다.

미츠하의 몸에 든 것이 미츠하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미츠하의 할머니인 히토하다. "너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할머니, 어머니, 미츠하로 이어지는 이 여성들이 '신을 모시는 작업'은 마을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무스비'로 연결된다.

입으로 뱉어서 지은 술은 '거대한 자연'의 신전에 바쳐져 있다. 너무도 오래된 상징이라서 뻔하게 읽힐 수밖에 없고, 오히려 위험한 부분도 있다고는 여겨지지만 "여성으로 이루어진 예언자들", "그 신탁이 들어있는 거대한 자연 속 동굴"은 뚜렷하게 세상을 구원하는 여성성에 대한 오래된 원형적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원형 속에 미츠하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근대적, 혹은 자본주의적 질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는 사회의 이면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에 기반해서 "가만히 있으라"라고 명령하는 주체다. 그는 사회에서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가시화되기를, 이면이 아니라 전면으로 나서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그는 건설회사 사람들과 친밀하다. 이 점은 한국의 맥락에서는 '뉴타운을 재개발하는' 시장으로도 비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원칙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그가 가시화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을 영원히 잊히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뻔한 비유지만 바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하는 이 상징적 존재가 '아버지'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츠하의 아버지가 건설회사 사장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텟시의 아버지는 그 자리의 부속으로만 존재하는 부인에게 "술상을 봐오기를" 명령하며, 동시에 텟시에게 자신이 주관하는 '근대'의 자리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한다.

세상을 구하자는 미츠하와 타키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들이 아니다. 서로의 몸에 들어갔던, 그러나 서로의 세계에서 '비 가시화된' 영역인 미츠하와 타키, 근대를 이어받기를 거부하는 남성인 텟시, 여자 친구인 겁 많은 사야카다. 이들은 모두 어리고 고등학생이다. 아직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온갖 난관을 뚫어가며 세계를 구해내야만 한다.

끌려 나오기 직전까지 고등학교 방송실에서 하는 사야카의 방송은 도호쿠 대지진의 의인 엔도 미키를 연상시키며, 그에 대비해 가만히 있으라는 '공식 방송'은 세월호를 연상시킨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텟시가 선택한 방법은 변전소 폭파다. 변전소를 폭파하는 건 엄연한 무질서고 범죄다. 질서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때, 가장 약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투쟁의 방식이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들을 설득해내는 것은 미츠하다. 물론 약하고 옳으며 예견하는 것을 '여성'으로, 강하고 틀리기에 굴복해야 하는 것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뻔한 공식이다. 그러나 재패니메이션에서 페미니즘적 서사가 등장할 때는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 오래도록 반복되어 온 문법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런 종류의 문법을 극복하는 다음 서사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따분한 공식이 여전히 힘을 얻는 것은 지금도 갈라진 혜성이 떨어지는 사회의 '이면' 속에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대 "우리는 만나면 바로 서로를 알아볼 거야"

 <너의 이름은.>은 연대의 서사다

<너의 이름은.>은 연대의 서사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타키와 미츠하는 결국 서로를 잊어버린다.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서로 되뇌어도, 그것은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꿈은 우리의 의식에서 존재하지 않고,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다. 꿈은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게 결합할 수 없다.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장기기억으로서의 트라우마'는 기억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트라우마를 잊었기에 우리의 의식은 간신히 일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일상에 개입한다.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저질렀던 폭력의 기억을 완전히 망각하고, 그 때문에 껍데기만 남은 삶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에게 학살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첫 번째 단계는 바로 '기억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상실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세월호의 약속은 그곳에서 의미를 가진다. 서로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지하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건져냈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미츠하의 죽음에서 타키가 느끼는 강렬한 상실감은 바로 미츠하라는 '세상'을 살리는 것이 타키라는 '세상'을 살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면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을 그저 죽도록 방치하고서 사회는 온전하게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미츠하가 죽는 상황은 "미래에서 온" 타키의 몸은 살아있을지언정 영혼을 죽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들 사이에 놓인 '무스비'는 사회적 언어로 변환한다면 '연대'가 될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무의식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던 각자는 '반드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비단 타키와 미츠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비정규직이 놓일 수도 있고, 해고자가 놓일 수도 있고, 재해 피해자가 놓일 수도 있고, 성폭력 피해자가 놓일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되었던 사람들은 '연대'의 경험을 잊지 않는다. 때로 잊고 살아갈지언정, 그 연대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반드시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에 대해서 서정적이고 아름답지만 서사가 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쭉 해 왔다. 이 작품 이후로는 그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달리는 두 사람 대신, "반드시 서로를 알아보는" 연대의 서사를 선택했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서로가 힘을 합치고 시선을 마주할 때, 그곳에서부터 '내러티브'가 시작된다. 영화관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그렇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서영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annwn/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너의이름은. 너의이름은 신카이마코토 모에 바디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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